오스트리아 제2도시 그라츠(Graz)
예전에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서 처음 발견한 건데,
유럽의 몇몇 도시엔
그 도시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명소와 여행정보,
도시 안내를 담은 USE-IT 지도가 있다.
정작 이제 바르샤바엔 USE-IT 지도가 없지만,
바르샤바엔 꽤 오래 머물러서,
Use-it지도에 표시된 곳을 모두 가봤는데,
누구나 다 알만한 대표적 관광지도 있고,
관광객은 그냥 모르고 지나칠만한
숨은 현지인의 명소도 있다.
아주 편한 그림과 부드러운 글씨체로 만들어져
지도 자체가 스타일리시할 뿐 아니라,
젊은 로컬들이 많이 가는
가성비 좋은 카페나 식당에 대한
알짜 정보가 많고,
또 내부인들만 아는 숨은 이야기도 좀 쓰여 있어서,
유럽 도시에 가서 Use-it 지도를 발견하면
열심히 정독하고,
거기서 알려준 곳에도 가보는 편이다.
모든 USE-IT 지도엔
ACT LIKE A LOCAL이라는 항목이 있어,
현지인처럼 행동하는 법 혹은
그 도시의 특징 5가지 정도가 나오는데,
그라츠(GRAZ)에선 그 항목 1번에
“왜 오스트리아 관광객들이
빈,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만 가고
그라츠는 그 관광루트에서 빠지는지 모르겠다”
는 얘기가 쓰여 있었다.
아마 그라츠 현지인들이
자기 도시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관광지로 저평가되었다는 하소연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그거 신기했다.
오스트리아 제2도시이긴 한데,
대외 인지도가 낮고,
도시 구석구석이 포토제닉하게 예쁘고,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물가도 비싸지 않고,
날씨도 좋은데,
인기 관광지는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또 이해가 되기도 한다.
수도 빈,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같은
주요 오스트리아 관광지와 거리가 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루트에 넣어보기에
그라츠엔 관광지로 뭔가 특별한 한방,
일부러 거길 가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긴 하다.
한국어 블로그에서 그라츠 관련 글을 보면,
대체로 어디 다른 데 가는 길에 들른 게 대부분이고,
다들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방문을 한 모양새다.
나는 다른 데 가다 들르진 않고,
“그라츠”를 최종 목적지로 잡고 가긴 했지만,
사실 나도 특별한 방문 목적은 없었다.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어 배울 때 만난
오스트리아인들이 다 “그라츠” 출신이었고,
그 중엔 3주간 인텐시브 고급반 코스에 연수 온,
그라츠에서 크로아티아어 가르치는 선생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라츠에 대해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라츠가 크로아티아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리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 도시 사람들이 크로아티아어를 배우는 것인지,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길래,
위시리스트에 넣어 두었다가,
가까운 자그레브에 있는 동안 그냥 한번 가봤다.
그때가 아니면 갈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지금이 거길 갈 유일한 기회라는
막연하고 이상한 절박함이 날 그곳으로 이끌어서,
2018년 6월 말 꽉 찬 2박 3일 일정으로,
관광지로 저평가되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여행지 그라츠로 떠났다.
“그라츠”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던 곳도 아니고,
인기 관광지도 아닌데,
크로아티아 수업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친구가
그라츠 출신이라고 했을 때,
왠지 모르게 이름이 익숙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슬라브어에 어원을 둔 이름이다.
그라츠(Graz)는
“작은 성”을 의미하는 슬로베니아어
Gradec[그라데츠]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아마도 “성”을 의미하는
체코어 hrad[흐라드]와
슬로베니아어 grad[그라드]의 예전 의미일
“도시”를 뜻하는 남슬라브어, 즉
세르보-크로아티아어, 불가리아어 grad[그라드]와 어원적으로 연관되는 것 같다.
12세기에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는 그라츠(Graz)는
아마도 그보다 오래 전부터
슬라브인의 도시였던 것 같다.
지금도 남슬라브 국가 슬로베니아와 매우 가깝고,
현재 그라츠 인구 중 약 10%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러시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에서 온
슬라브인이다.
19세기 이전 수세기 동안 남슬라브엔
독립적 슬라브인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고,
변변한 고등교육기관도 별로 없었는데,
"가까운" 그라츠엔
16세기에 세워진 유서 깊은 대학이 있어서,
남슬라브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유학을 많이 했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모두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노벨문학상 수상자 보스니아인 이보 안드리치도
그라츠에서 대학을 다녔었다.
특히
그라츠에서 가장 가까운 슬라브 국가 슬로베니아의
중요한 문화적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나서,
그라츠는 슬로베니아인에게 매우 중요한 도시다.
하지만 12세기 역사에 등장한 이후
그라츠는 공식적으로 줄곧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독일인 과학자 케플러가 17세기
이곳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그라츠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독일어 사용 지역이자,
독일 문화권이었기 때문일 거다.
오스트리아 남쪽에 자리 잡아
남유럽과도 가까운 그라츠는
이탈리아의 영향도 많이 받아,
지금도 건축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라츠는 16세기 오스만제국의 공격을 받았지만,
주변 다른 도시와 달리 함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침략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한
터키인이 등장하는 전설과 속설이 많다.
그리고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처럼,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면 물을 한 컵 주는
터키식 혹은 그리스식 풍습으로 보이는
커피 문화가 있다.
심지어 그라츠의 어떤 카페에서는
물 0.5리터를 주기도 했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는
짧게 몇 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 프랑스군이 언덕의 성을 파괴했는데,
당시 그라츠 부르주아들이
일정 금액을 프랑스군에 지불해
그라츠의 상징인 슐로스베르크 시계탑과 종탑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20세기 1,2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양 세계대전 중 큰 손상을 입지 않아,
그라츠는 이 근방에서
구시가가 가장 잘 보전된 도시기도 하다.
그라츠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오스트리아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그라츠까지는
기차로는 2시간 30분에 9-30유로,
버스로 2시간에 8-15유로의 비용이 들고,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에서 그라츠까지는
기차로 3-5시간, 18-27유로,
버스로는 2-3시간, 9-16유로가 든다.
내가 갔던 루트인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그라츠까지는
기차로 4-7시간, 비용은 19-45유로,
버스는 2-4시간, 비용은 15-18유로다.
그래서 당연히 난
시간도, 비용도 적게 드는 버스를 타고 갔다.
시간을 어떻게든 아끼려고,
첫 버스인 6:30 버스를 탔는데,
원래는 9:25 도착 예정이었지만
10시 좀 넘어 도착했다.
슬로베니아 북부도시 마리보르(Maribor) 근처에서
마침 출근 시간에 걸렸는데,
길이 1차선인가 2차선으로 아주 좁아서
많이 지체된 것 같다.
그라츠는 아래 지도처럼 생겼다.
남북으로 무어(Mur)강이 흐르고,
그 동쪽에 구시가가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서 빨강, 파랑 원이 많은 지역이다]
버스터미널은 서쪽에 있어서,
[아래 지도 왼쪽 OBB라고 쓰여 있는 근처]
버스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동쪽으로 걸어가면,
강 건너에 구시가가 보인다.
난 자그레브와 그라츠 사이는 버스를,
할슈타트와 그라츠 사이는 기차를 타고 오갔는데.
그라츠의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은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아래 사진은 할슈타트 가기 전날,
티켓도 출력하고,
기차역도 “사전답사”하러 간 건데,
한적한 기차역에 하늘이 너무 예뻐서
한참 동안 햇볕에 광합성을 하면서
인적 드문 기차역 구석에 앉아 있었다.
기차역 근처에는 큰 마트들이 몰려 있다.
그런데 영업시간이 거의 다 8시까지라,
밤이 되기 전에 서둘러서 쇼핑을 해야 한다.
그라츠의 빵집은 저녁 5시나 6시쯤 문을 닫는다.
난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막연한 호기김에 가본 거라,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구시가 쪽으로 걸어갔다.
6월 말인데 날씨는 덥지 않고,
긴팔에 뭐 하나 걸쳐야 될 정도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춥지도 않다.
첫날 저녁에 좀 비가 흩날렸고,
그 다음날 할슈타트 가던 아침에는
비가 오기도 했는데,
전반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공기도 좋다.
내륙국가인 오스트리아 다른 도시와 달리,
그라츠는 대륙성 기후이면서도
지중해식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다른 오스트리아 도시보다 일조량은 많고,
강수량은 적어서,
“오스트리아 속 작은 이탈리아”라 불리기도 한단다.
기차역/버스터미널에서 구시가에 가려면
트램이 다니는 대로인
아넨슈트라세(Annenstraße)를 걸어야 한다.
19세기 중반 기차역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길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쇼핑거리 중 하나였단다.
지금은 예전만큼은 못하다지만,
그래도 식당, 카페, 상점이 즐비하고,
파스텔톤 건물들로 나름 알록달록 예쁘다.
아넨슈트라세에서 멀리 보이는 둥근 초록 지붕은
무어 강 동쪽에 자리 잡은
프란치스코 성당(Franciscan Church, Franziskanerkirche Graz)이다.
13세기에 건설된 가톨릭 성당이며,
멀리서도 눈에 띄는 높은 탑은
17세기에 구시가 방어의 목적으로 덧붙여졌단다.
이 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고 노란 동판에는
2차세계대전중 희생된 유대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e),
즉 "발부리 돌"이라 불리는
이 독일 예술가의 프로젝트는
다른 길에도 있긴 한데,
난 이 길에서 제일 많이 본 것 같다.
유대인을 학살했던 예전의 그라츠와 달리,
현재 그라츠엔
다른 서유럽, 북유럽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종, 타민족, 타종교에 대한 똘레랑스가
공적, 사회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사람들 속이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래 보인다.
한국어 블로그의 그라츠에 관한 글을 보면,
그라츠에 가니,
그 주변 다른 도시들보다
인종이 다양하더라는 평이 있었다.
다른 오스트리아 도시보다 어떤진 모르겠는데,
확실히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보다는
다양한 인종의 현지인이 보이고,
덕분에 눈에 보이는 외모의 다양성뿐 아니라,
식문화의 다양성도 경험할 수 있다.
이건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영국 신문 The Telegraf의 그라츠 소개 기사엔
다음과 같이 “foodie destination”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Graz is also a growing foodie destination, with a wide choice of restaurants, excellent wines from Styria’s nearby vineyards and the freshest of produce at the farmers’ markets on Kaiser Josef Platz and Lendplatz.
그라츠는 물가도 별로 비싸지 않아서,
밥 한 끼는 10유로 내외,
(6-8유로 짜리도 있다)
커피는 2-3유로 정도,
생수 1.5리터에 0.6 유로였다.
그라츠 곳곳에서 볼 수 있던,
5-10시에 남녀가 돌아다니는 게 금지되는 게
아님은 분명한 이 표지는
나중에 독일어를 찾아보니,
사람만 통행 가능하고
교통수단은 금지라는 뜻인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저런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계속 저게 무슨 뜻일까 궁금했었다.
곳곳에 보이는 하수구 뚜껑에는
그라츠 문장이 새겨 있는데,
사자인가 했더니, 표범이란다.
하수구 뚜껑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이 표범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잘 보면,
왕관 있는 표범과 왕관 없는 표범이 있고,
왕관 있는 표범은 그라츠 시 문장,
왕관 없는 표범은 스티리아 주 문장이다.
무어(Mur) 강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지역에서 시작해서,
오스트리아 여러 도시를 지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를 거치는
무라(Mura) 강이 되었다가
결국 헝가리 다뉴브 강으로 합류된다.
그라츠를 지나는 무어 강은
아마도 상류인지,
강폭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른데,
예상과 달리 물이 맑기보다는 탁하다.
실제로 산업화 시절에는 강 오염이 심했고,
지금은 그래도 깨끗하게 정화되었다고 한다.
강물 색이 탁해서 강변이 썩 매력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녹지가 많아서,
강변을 걷는 건 꽤 괜찮다.
무어 강의 명물은 무엇보다도
“무어 섬”이라는 뜻의 무어인젤(Murinsel)이다.
(독일어는 어결합 사이를 끊어 읽으니,
[무린젤]이 아니라 [무어인젤]일 것 같다.)
무어인젤은 2003년 그라츠가
“유럽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가 된 걸 기념해서 세운 조개 모양 구조물로,
무어 강 양쪽 강변을 연결하는
철제 다리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다리를 지나면서
아무나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가끔 작은 공연을 하는지, 작은 원형 객석이 있고,
카페도 있다.
무어인젤은 강에 영구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고,
배처럼 정박된 상태라,
그 닻을 풀어 강을 통해
다른 도시로 옮길 수도 있었는데,
그라츠 주민들이 좋아해서 그냥 두기로 했단다.
그라츠의 대표적 현대건축으로,
그라츠의 중요한 이정표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
난 그냥 한번 가고 안 갔다.
무어 강 서쪽 강변에 위치한,
그라츠 시립 미술관인 쿤스트하우스(Kunsthaus Graz, Grazer Kunsthaus)도
2003년 유럽문화수도 때 건설된 현대건축이다.
현지인들은 영어로 Friendly Alien이라고 부른다는
그라츠 쿤스트하우스는
각진 부분이 없이 자연스레 표면이 굴곡진,
울퉁불퉁하고 특이한 해산물 모양이고,
대부분의 유럽도시와 마찬가지로
밤에는 조명이 밝지 않아
어두컴컴한 그라츠 밤 풍경 속에서
표면의 서로 다른 밝기의 픽셀들이 깜박이며,
계속해서 모습이 달라지는 쇼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게
항상 이렇게 랜덤으로 반짝이는 건 아니라서,
이 표면에 영화를 상영할 수도 있다는데,
아쉽게도 내가 간 날은 그런 날은 아니었다.
처음에 이 건물을 봤을 때는,
주변 환경이랑 하나도 안 어울리는
뭐 이런 흉물이 있나 생각했는데,
희한하게도 여러 번 보니
그 개성 있는 외모에 익숙해지고,
들어가서 전시회까지 구경하니
나중에는 이 건물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Friendly” Alien 맞는 거 같다.
밤에 쿤스트하우스 앞에서 동영상도 찍었는데,
내가 이걸 찍을 때는
이상하게도 계속 Guilt라는 글자가 반복됐다.
지나 다니면서 3일을 봤는데,
보통은 그냥 랜덤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동영상:그라츠 쿤스트하우스 야경)
그라츠 쿤스트하우스는
그 겉모습만큼 그 운영방식도 독특하다.
미술 작품을 따로 사들이거나 소장하지 않고,
상시전도 없이,
그냥 그때그때마다 동시대 미술작품을 전시한단다.
유럽의 큰 박물관들은
유명한 예술 작품을 상시 전시해서,
그 작품을 보러 일부러 그 박물관을 가기도 하는데,
한 나라의 제2도시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이런 "무소유”의 원칙을 유지한다는 게
매우 신선하고 또 그 건물만큼 현대적인 느낌이다.
(그라츠 쿤스트하우스 홈페이지)
https://www.museum-joanneum.at/en/kunsthaus-graz
그라츠 Use-it지도의 추천 명소 중 하나인
쿤스트하우스 1층 서쪽에 있는 카페도
괜찮아 보이고,
1층 매표소 앞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도
예술 관련 책이랑
예쁘고 재미있는 팬시용품이 많다.
난 이 특이한 외관의 미술관 안쪽은 어떤지
너무 궁금해서,
쿤스트하우스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가 관람한 전시의 입장료는 9.50유로였다.
홈페이지에 입장료가 안 적혀 있고,
누군가는 3.5유로를 내고 들어갔다는 걸 보니,
아마도 전시에 따라
그때그때 입장료도 달라질 것 같다.
2.5 유로를 내면
1시간 동안 진행되는
쿤스트하우스 건축 투어도 할 수 있다.
1층에서 티켓을 구매하면,
지하에 가서 짐을 맡기고,
직원에게 검표를 한 후
2층으로 올라가는
일방통행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처럼
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이제 되돌아올 수 없다는,
상황에 전혀 안 맞는 비장한 마음이 든다.
(동영상:그라츠 쿤스트하우스 에스컬레이터)
미술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방법도
일방통행 에스컬레이터다.
2층과 3층 간에는 엘리베이터도 있다.
내려오는 방법은 따로 안내문이 안 쓰여 있는데,
비상구가 보이길래,
난 그 계단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니까 올라갈 때는 일방통행 에스컬레이터,
내려올 때는 비상구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된다.
쿤스트하우스의 내부는 꽤나 근사하다.
밖에서 봤을 때의 그 자연스런 곡선 표면이,
내부에서는 약간 더 각이 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외벽처럼 울퉁불퉁 불규칙하다.
그런 울퉁불퉁한 표면은 멋내기 장식이 아니라,
이 건축의 내부에서도 관찰되는,
그냥 이 건물 그 자체인 거다.
예전에 얘기 듣기로
둥근 외벽이 각진 외벽보다
더 구현하기 어렵다던데,
이렇게 안팎이 모두 흔한 사각에서 벗어나려면,
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 있어야 하는 걸까?
그냥 "못생긴 파란 거대 괴물" 같던
쿤스트하우스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부는 어두운데,
그래서 울퉁불퉁한 벽면 안에서
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난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도시여서 그런지
관람객도 많지 않아서,
내 페이스대로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밖에서 봤을 때 문어의 빨판처럼 보이던
그 불룩한 짧은 원통은 안에서 보니,
창문이었고,
전시물뿐만 아니라,
그라츠 시내와 하늘도 볼 수 있다.
난 원래 미술관에서 사진 안 찍는데,
그 광경에 카메라를 꺼내 들었고,
결국 봉인이 풀려서,
쿤스트하우스 내부 이곳저곳을 계속 찍었다.
나는 현대미술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고전 미술도 3차원적 작품보다,
2차원적 작품 안의 선과 색에 더 열광하는 편이라,
쿤스트하우스 전시물,
특히 난해한 동영상 작품들에는
크게 감동하지 않았다.
사실 쿤스트하우스 자체와
그리고 거기서 보이는 풍경이
내 취향에 더 맞는 예술 작품이었다.
그래서 2층 동쪽의 전망대가 보여주는
그라츠 전경이
쿤스트하우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전시”였다.
이건 서쪽의 가톨릭 성당,
이건 동쪽의 구시가다.
여기서 그냥 내려가기 아쉬워서,
몇 분 앉아 있다가,
2층과 3층의 전시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서 나는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그냥 한번 보는 데는 보통 30분이면 될 거다.
쿤스트하우스 근처 동네는 관광지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생활 공간이라서
그 서쪽에 좁은 길로 들어가면
또 다른 그라츠가 펼쳐진다.
난 좀 어둑어둑해질 쯤에 갔는데,
헌책방도 있고,
좀 오래 되어 보이는 카페, 식당, 가게도 있는,
어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그냥 흔한 동네 같아 보이고,
선술집 같은 분위기의 캐주얼한 술집이나
화려하지 않은 카페 밖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어릴 때 살던 서울 주택가의 풍경 같아서
낯설지 않았다.
특별한 구경거리가 없어,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동네라서 그런지,
그런 길을 두리번두리번 걷는 나를
'쟤는 왜 여길 왔을까?'하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도 있어 좀 뻘쭘하기도 했지만,
관광객의 공간에서
현지인의 이국적 문화가 구경거리가 되듯이,
현지인의 공간에서
관광객의 이국적 외모가 구경거리가 되는 게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 더 걷다 보니,
어느 골목에선 벌거벗은 여성의 사진이 걸린
현란한 조명의 허름한 클럽도 몇 개 보였는데,
Use-it지도에서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 동네가 예전에 그라츠 홍등가였단다.
그런 건 지금 사라졌지만,
그래도 몇몇 클럽에서는 스트립쇼를 하나보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나,
그 주변 다른 가게의 분위기를 보나,
그런 게 몇 개 있다고
위험한 동네 같아 보이진 않았다.
최근에 이주민이 많아지면서
몇몇 지역은 밤에 좀 위험하다고도 하나,
그라츠는 범죄율이 매우 낮은 도시다.
여름에 밤 9시-10시까지는 행인들도 많다.
그 익숙한 동네에서 북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넓은 대로 옆에 큰 공터가 나오는데,
렌트플라츠 농산물시장(Bauernmarkt Lendplatz)이다.
수세기 동안 이곳은
수공업자와 상인이 살던 동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생긴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시장이 와인이라든가
그 밖의 신선한 그라츠산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라는데,
시장은 새벽 6시부터 낮 1시까지만 열어서,
내가 저녁에 갔을 때 시장은 없었고,
갖가지 종류의 패스트푸드를 파는
부스만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광장 한쪽엔
17세기 후반에 세워진 페스트 기둥이 서 있다.
쿤스트하우스와 농산물시장 중간쯤엔
미노리텐(Minoriten)과 마리아힐프 성당(Mariahilfkirche)이 있다.
17세기 이탈리아 건축가가
베니스식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성당과 수도원인데,
현재 수도원의 일부는 콘서트홀로 사용된다.
그라츠 다녀와서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어 선생을 만났는데,
나더러 그랬다.
그라츠는 작아서 하루면 다 보는데,
왜 3일이나 있었냐고.
근데 나에게는 2박 3일이 결코 길지 않았다.
3일 중 하루는 할슈타트(Hallstatt)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서
실제적으로는 이틀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난 사실 하루 정도 더 있고 싶었다.
비록 이렇다 할 큰 한 방은 없어도,
여기저기 작은 한 방들이 많고,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색과 양식의 건축들이 조화를 이루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슬라브, 발칸 등
여러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울려져서
관광지들도 여러모로 특별한 구석이 있고,
관광지 밖
고풍스럽거나 현대적인 골목을 걷으며
관광안내책자 이면의
"숨은 그림"을 찾는 것도 재미있어서,
보면 볼수록 정이 가고 편안한
그라츠만의 얼굴을 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두번째 날 갔던 할슈타트에서
예상보다 많은 관광객들과
지나치게 관광지스런 모습에 좀 지쳐서,
한적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좀 더 자연스럽고 수수한 그라츠에서
상대적인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워밍업을 했으니,
이제 다음 두 포스트에서는
그라츠 구시가와 외곽을 둘러보며,
나를 매혹시킨 그 작은 한 방들을 만나러 가겠다.
(다음 포스트에서 본격적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