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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oga Jan 07. 2019

다리(most)의 도시, 모스타르(Mostar)

가성비와 가심비 모두 좋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 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좋았다.


2018년 7월초 11박 12일 간 크로아티아 근처

세르비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등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여행 다녀와서,

 

사람들이 "그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사실 내가 7월 초 여행했던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적어도 내가 간 곳은)

입이 떡 벌어지는

특별히 아름다운 절경이 있는 곳도 아니고,

뭔가 특별히 유명한 이정표가 있는 곳도 아니고,

뭐 특별한 먹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라,


사실 이런 나의 선택을

다른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어렵고,

”좋은 여행지”로 강력 추천하기에도 조심스럽다.


그런 확신 없고, 딱히 매력적 이유도 없는,

내 대답을 들은 한국인 지인들은

전혀 설득되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딱히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희한하게도 크로아티아어 선생님 밀비야와

크로아티아 친구 사냐는

왜냐고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유를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이해한 거 보면,

아마 그들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가서

비슷한 걸 느꼈나보다.


그러고 보니 사냐는

내가 구 유고슬라비아 여행 떠나기 전에 이미

자기도 보스니아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발칸반도에서 보는 흔한 음식이어도

이상하게 그 주변 나라들보다 좀 더 맛있고,

여름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높아서인지 

과일도 달고,

물가도 싸고,

의도치 않게 

내가 그런 곳을 찾아가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뭐라고 딱 설명할 수 없는 활기가 있는 데다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이 유난히 착하고

진심으로 친절하다.


그리고 그런 유난히 선한 현지인들 뿐 아니라,

그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을 

그 낯선 곳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침 인간의 온기가 필요했던 내가

딱 그걸 거기서 그 때 만난 거다.




2.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속 내륙 국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보스니아어(Bosnian, Bosanski)로

Bosna i Hercegovina[보스나 이 헤르체고비나],

좀 더 흔하게 Bosna[보스나]라 불리거나,

BiH 라고 표기되고,


영어로도

Bosnia and Herzegovina로 풀어쓰기 보다는

흔히 Bosnia 혹은 B&H로 줄여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아래 지도처럼 역삼각형으로 생겼다.


남서쪽에 보면 크로아티아 영토 사이에

Neum이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긴 하지만,

약 20Km로 아주 짧고,

대체로 육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에서부터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접하고 있다.


http://ontheworldmap.com/bosnia-and-herzegovina/bosnia-and-herzegovina-political-map.html


10세기 처음 역사에 등장한 "보스니아"

보스나(Bosna)강[지도에서 남북을 관통하는 강]

에서 나왔고,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 이곳을 지배하던

코사차(Kosača) 대공의 신분인

독일어 herzog[헤어초크]에서 나왔다.


뒤의 접미사 -ov- 는 "소유"를,

-ina는 "작은 부분"을 뜻해서,

헤르체고비나는 "대공의 땅"이라는 의미다.


국명만 봐서는 크게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로 나뉠 것 같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름이 너무 기니까 이제부터는 B&H)

는 21세기 현재 행정적으로 크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cija Bosna i Hercegovina)[지도 안 쪽 진한 연두색]과

스릅스카 공화국(Respublika Srpska) [지도 바깥쪽 연한 연두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으로는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중 각 1명씩

총 3명의 대통령을 직선제로 선출하여,


4년 임기 동안

3명이 8개월씩 돌아가며 대표가 된다고 한다.


즉 대통령 한 명이 4년 임기 중 2번, 총 16개월간

전체 국가의 대표가 되는거다.


언뜻 매우 민주적으로 보이는 이 제도만큼,

B&H의 정치가 선진적이거나,

국민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정치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실업률도 45퍼센트로 지나치게 높고,

전체적으로 낮은 범죄율에 비해, 

부정부패 정도가 매우 높으며

2014년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도 있었다.


B&H의 통화단위는 마르카(marka)인데,

BAM 또는 KM으로 표기한다.


KM은 konvertibilna marka,

즉 “태환 마르카”의 약자,

BAM의 가운데 A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B,M을 봐선 "보스니아 마르카"란 의미인 것 같다.


2019년 1월 현재 1마르카는 약 650원인데,

"1유로=1.95 보스니아 마르카"의 고정환율이라,

유로가 올라가면 마르카도 올라갈거다.


보스니아 마르카 뿐 아니라

크로아티아 쿠나(kuna)[10마르카=2.5쿠나]나

유로(euro) [1마르카=0.5유로]를 받기도 한다.


환전은 은행, 우체국, 환전소에서 할 수 있는데,

은행이나 우체국이 꽤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장소마다 환율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은행과 환전소는 환전할 때 

따로 수수료를 받는 곳도 있는데,


난 필요할 때마다 5-20유로씩 조금씩 조금씩

은행이나 우체국에서 환전해서 썼고,

별도의 수수료는 내지 않았다.


B&H의 물가는 매우 저렴하다.


생수 1.5리터가 1마르카(약 650원),

카푸치노 커피는 1.8마르카(약 1,200원),

푸짐한 밥 한끼에 7-10마르카(약 5-6천원)다.


물가가 다른 데보다 비쌀 관광지인

사라예보 구시가에 있는 보스니아 음식점에서

여자 3명이 배부르게 먹었는데,

25마르카(약 16,000원) 밖에 안 나왔다.



근데 신용카드 안 받고,

현금으로만 결제해야 하는 곳이 많다.




3.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의 장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엔

바다라고 할 것이 없는 대신,

산도 많고, 강도 많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B&H는

기원전 발칸과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세를 떨치던

일리리야인들의 거주지였고,


기원 후 1세기엔 로마제국,

6세기엔 그리스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다.


비잔틴 제국 시기에 동쪽으로부터

슬라브인이 대거 유입되고,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인

보스니아공국(Banate of Bosnia, Banovina Bosna),

14-15세기엔

보스니아 왕국(Kingdom of Bosnia, Kraljevina Bosna)이 됐다.


당시 보스니아엔

보스니아 교회(Crkva bosanska, Bosnian Church)

라는 특별한 이름의

영지주의 가톨릭 분파가 형성됐는데,

가톨릭과 동방정교 모두에서 이단으로 여겨졌다.


보스니아 왕국은

1463년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무너져,

발칸반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1878년까지 수백년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대체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비 이슬람교도는 열등 시민으로 낙인찍어 차별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할 경우

사회적,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단으로 몰린

보스니아 교회 신자를 비롯한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현재 B&H 인구의 약 50%가 이슬람교도다.


오스만 제국이 물러간 이후

1878년부터 B&H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전기, 자동차 등이 도입되고

본격적으로 근대화되기 시작된다.


그리고 1914년 사라예보(Sarajevo)에서

“남쪽(jug)의 슬라브인(Slaven)의 나라”,

즉 "유고슬라비야(Jugoslavija)"를 꿈꾸던

동방정교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시도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의 암살이 성공하면서,

제1차세계대전발발된다.


사라예보에 가면

그 사건이 일어난 건물과 다리를 볼 수 있다.


1차세계대전 이후 B&H는

프린치프가 꿈꾼 유고슬라비아 왕국(Kraljevina Jugoslavija, Kingdom of Yugoslavia)의 일부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공산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된다.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에 이어

1992년 B&H도 독립을 선언하지만,


세르비아가 주축이 된

유고연방군의 공격을 시작으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 영토에서 보스니아계와 내전을 하게 되어,

보스니아 영토가 큰 피해를 입고,

많은 보스니아계 보스니아인이 사망한다.


1995년 NATO의 중재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대통령이 만나

데이턴 협정(Dayton Agreement)을 맺고,

내전은 종식되고,

B&H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 20여년 전 전쟁의 흔적이

"모스타르"와 "사라예보" 곳곳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4. 모스타르(Mostar) 가는 길 - B&H에서 만난 사람들 1


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꽉찬 3박 4일 머무르며,

헤르체고비나의 중심 "모스타르(Mostar)"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

그리고

가톨릭 성지 "메쥬고리에(Međugorje)"에 갔다.


우선 몬테네그로 코토르에서 밤 10시 출발하는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행 버스를 탔다.


코토르에서 모스타르까지는

2019년 1월 현재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대의 버스가 있는데,

낮버스는 

약 5시간 30분 걸리고, 편도 33유로,

아침버스와 밤버스는 

약 8시간 20분-9시간 걸리고, 23유로다.


아마 내가 여행했던 2018년 7월에도

비슷했을 것 같은데,

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밤 10시에 출발해서 6시 도착하는 밤버스를 탔다.


그리고 한산한 그 밤버스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만났다.


코소보 프리슈티나에서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가는

밤버스에서 내 옆에 앉았던

20대 초중반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었는데,


셋이서 프랑스어를 했다가,

스페인어를 했다가,

영어를 했다가 해서 정확하겐 모르겠지만,

스페인어가 제일 유창한 걸 보니,

스페인어 화자들인 것 같다.


포드고리차 가는 밤버스에서

그 세 명 중 여자가 내 옆 자리에 앉았는데,

국경 건널 때 내 여권을 유심히 봐서,

그 버스 안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했나보다

막연히 생각했었다.


포드고리차 버스터미널에 새벽 3시에 내려

터미널 안에서 해 뜰 때까지 앉아 있을 때

내 뒤쪽에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나는 터미널에 좀 앉아 있다가 

해가 막 뜨기 시작하자마자  

포드고리차 시내로 나갔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코토르에서 모스타르 가는 버스에서 만난거다.


포드고리차에선 못 만난 걸 보면,

아마도 내가 “볼 것 없는” 포드고리차에서

하루 머무는 동안,

그들은 ”볼 것 많은” 코토르에서

하루를 더 보냈나 보다.


그렇게 다국어를 쓰는 

남2, 여1의 조합이 특이한데다가,

역시나 이번에도 그 버스에서

난 유일한 아시아인이라

우린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포드고리차행 버스에서도

여자가 내 옆에 앉았었는데,

이번엔 곱슬머리 남자가

내 옆에 와서 앉아도 되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안 될 리 없는데다가,

이번엔 구면이라 사실 좀 반갑기도 했다.


그 곱슬머리 남자가 나한테 한국어를 한다.


내가 깜짝 놀라서,

"한국어 할 줄 알아요?"라고

또박또박 아주 느린 한국어로 물으니,

"조금"이라고 말하고,

영어로

“6개월 후에 한국에 교환학생 간다"고 말한다.


컴퓨터공학 전공인데,

한양대로 교환을 가게 되었고, 

무척 기대가 많이 된다고 했다.


나는 러시아어 선생인데,

크로아티아에서 크로아티아어 배웠고,

지금은 구유고슬라비아 여행 중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나서,

우리는 흩어져서 잠을 청했다.


밤버스인데다가, 빈 자리가 많으니,

다들 두 좌석씩 길게 차지하고

누워 자면서 갔다.


2시간 후 자정에 포드고리차에 도착했고,

새벽 1시 50분경 몬테네그로 국경에,

2시 10분 경 보스니아 국경에서 멈췄다가

곧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이전보다 훨씬 평화롭게 모스타르로 갔고,


6시 30쯤 모스타르 터미널에 도착했다.


모스타르 터미널에 도착해서 헤어진 우리는

그 날 오후 구시가에서 또 우연히 만났다.


계속해서 우연히 만나니,

괜히 더 가까운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다음에 또 만나면 내 한국 연락처를

그 교환학생에게 줘야겠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엔 한번도 못봤다.


다음 학기 우연히 서울에서 만나,

밥이라도 한 끼 사줄 수 있음 좋겠다.




5. "다리(most)"의 도시 모스타르(Mostar)"


mostar[모스타르]에서 most[모스트]는 '다리',

'-ar[아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접미사로,

모스타르는

"다리(most)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란 의미다.


모스타르에 가기 전

그 이름만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다리(Most)가 무지 많은 도시인가보다',


다른 하나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에 나온 그 다리가 있나보다.'

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 다 틀렸다.


우선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에 나온 다리는

소설 제목 그대로 드리나(Drina)강 위에,

비셰그라드(Višegrad)라는 동쪽 도시에 있다.


예전에 "드리나 강의 다리"를 한국어로 읽었는데도, 

이건 보스니아 다녀오고 나서 한참 후, 

2018년 10월 SPAF로 내한한 세르비아 극단의 

"드리나 강의 다리"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네레트바 강의 스타리 모스트"도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해준 이야기와

비슷한 역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리고

도시 중심을 네레트바(Neretva) 강이 흐르는데,

다리는 전부 합쳐서 6-7개 정도 있는 것 같다.


즉, 다리가 많아서,

도시 이름에 다리(most)가 등장하는 건 아니고,

아주 특별한 다리 하나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여기서 흔히 "그 다리"는

16세기 터키 지배기 때 건설된,

UNESCO 문화유산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모스타르가 "Mostar"로 역사에 등장한 건

스타리 모스트가 건설되기 전

15세기 후반

그 옆에 좀 더 작은 나무 다리가 있었을 때고,


"모스타르"란 이름 이전에도

"다리(Pons, ponte)"라고 언급되었다고 하니,


모스타르엔 스타리 모스트가 건설되기 오래전부터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다리가 있었나보다.

  

모스타르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파는 무역의 장소였다고 하니,


진짜 다리가 있어서 뿐 아니라,

그런 "다리" 역할을 하는 그 도시의 특성 때문에

"모스타르"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6. "모스타르"가 된 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모스타르에서 가장 중요한 관광지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의 "스타리 모스트"

그 주변의 터키식 구시가로,

아침 저녁 항상 관광객이 북적댄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동영상: 모스타르 Stari most 주변)


(2018년 7월, Stari most, Mostar, Bosnia & Herzegovina)


"스타리 모스트"는 16세기 오스만제국 지배기에

네레트바(Neretva) 강 위에

건설된 터키식 석조 다리다.


사실 이런 터키식 돌다리는

발칸반도에서 적잖이 만날 수 있는데,

이렇게 그 다리 주변으로 형성된

터키식 구시가까지 아직도 제 기능을 하는 곳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스타리 모스트의 가장 큰 특이점은 

1993년 보스니아 내전 중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파괴됐고,

11년 후인 2004년에 재건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제 이 흔한 발칸반도의 터키식 돌다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보통 보스니아어에서 “터키식 다리”는

ćuprija[추프리야]라고 불리는데,

("드리나 강의 다리"도 원어로 Na Drini ćuprija다)


스타리 모스트는

보다 보편적 명칭 most[모스트]로 불리는 걸 보면,


보스니아인들은 원래 이 다리를 단순히

오스만 제국 시절에 건설된

터키식 다리로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2005년 스타리 모스트와 그 주변 구시가가

UNESCO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이곳은 오스만제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중해 지역 등 다양한 문화가 결합되어 있는,

다양한 종교, 인종, 문화적 공존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스타리 모스트는 다이빙으로도 유명한데,

매년 7월말 공식적인 다이빙 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여름 낮에 사람들이 그냥 다이빙을 하기도 한다.


(동영상: Red Bull Cliff Diving)


(출처: 유투브)


아래 사진의, 다리 중간에도

다이빙을 준비하고 있는 다이버가 있는데,


난 이 사진 찍고 나서 다른 곳 구경하느라,

결국 다이빙을 멀리서라도 구경 못했고,

다이빙 후 사람들 환호만 뒤늦게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 2박 3일 동안 

다이빙은 아쉽게도 한번도 못 봤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스타리 모스트 상판은 이렇게 생겼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스타리 모스트 서쪽 끝,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스타리 모스트에서 바라 본,

네레트바 강의 북쪽 풍경.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동쪽 풍경.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스타리 모스트 남쪽 풍경이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스타리 모스트 서쪽 구시가 안에는

굽은 다리(Kriva ćuprija, Crooked Bridge)라

불리는,

스타리 모스트를 닮은, 작은 다리가 있는데,


16세기 중반 스타리 모스트보다 8년 일찍 세워져,

스타리 모스트를 만들기 전에

시험적으로 만들어 본 것이라고 추정되는

미니 스타리 모스트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굽은 다리에서 본 북쪽 풍경이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네레트바 강변에서 본

스타리 모스트 서쪽 구시가.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이건 네레트바 강변 동쪽 구시가.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스타리 모스트는 낮이건 밤이건 사람들로 붐비는데,

다리 위에도 물론 사람들이 많이 있고,

거기서 모스타르를 둘러보는 것도 좋긴 한데,


또다른 명당은 아래 사진에서 다리 뒤로 보이는,  

스타리 모스트 남서쪽 강변의 계단이다.


낮에는 거기서 해수욕을 하고,

밤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런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난 낮엔 못 가 보고, 

두번째날 밤에 한 번 가봤는데,

좀 어둡긴 해도 위험하진 않은 분위기고,

한낮 40도까지 올랐던 그 더위는 어디 갔나 싶게,

바람은 한 없이 시원하고,

강물 흐르는 소리도 기분 좋고,

스타리 모스트 전망도 매우 좋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Sarajevo로 떠나기 전,

새벽에 밝을 때 사진을 찍어볼까 생각도 했는데,

너무 "극성 관광객"스러운 아이디어기도 하고,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그래서 마지막인 순간 순간을 더 특별하게 여기며,

그렇게 강변에 앉아  

스타리 모스트를 보면서,

밤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참 좋다.


거기가 그리 좋은 걸 첫날 알았으면,

아마 아침 저녁으로 매일 갔을 거다.


그리고 난 낮엔 다른 데서 이미 커피를 마셔서, 

늦은 밤엔 잠을 못 잘까봐 시도하지 못했는데,

스타리 모스트 근처의 카페에서 

다리와 강을 보며 앉아,

보스니아화된 터키식 커피와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 것도 좋을 것 같다.




7. 친절한 현지인들 - B&H에서 만난 사람들 2



(1) 모스타르 현지인의 아파트


난 2박 3일 모스타르에 있으면서 

현지인의 아파트에 묵었다.


모스타르 숙소 검색하는데 

apartment라고 된 곳이 많았고,

그 중에 한 곳이 버스터미널과 구시가와 가깝고,

평점도 만점이었다.


숙박이 끝나고 나도 만점을 줬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는데,

유일한 문제는 그 아파트를 찾는 거였다.


내가 무지 길을 헤맨 코소보, 몬테네그로처럼 

건물에 번호가 잘 안 쓰여 있거나,

그 번호가 이상하게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 

현지인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는 데다가, 


그냥 그렇게 사적으로 하는 숙박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숙소 예약할 땐 있었던 그 숙박업소명을 

창문에건 초인종 옆에건 밖에 전혀 써놓질 않아,

그 숙박업소 이름을 이야기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러다 겨우겨우 아파트 건물을 찾았는데, 

어떤 이름의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1층에 있는 카페에 가서 물어봤더니,

주인이 다른 곳에 있으니, 

커피 마시며 기다리란다.


내가 환전 안해서 마르카(Marka)가 없다고 했더니,

커피 값은 주인이 낼거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기다리고 있자니, 

잠시 후 꽃무늬 원피스에 

진주목걸이를 한 선한 인상의 

50대 후반-60대 초반 여자분이 나타나셨다.


카페 주인이 내가 보스니아어, 

즉 크로아티아어 하는 걸 알려줘서, 

처음부터 나에게 보스니아어로 말씀하셨다.


그 여자분을 따라 들어간 곳은 

모스타르 시내가 한 눈에 다 보이는 

전망이 매우 좋은 아파트였는데,

방이 4개인가 5개, 

욕실이 2개에, 

거실도 꽤 컸다.


지금 그 아주머니는 근처 블라가이(Blagaj)에 살고, 

그 집은 아들이 숙박업을 하도록 내주었다고 하며,

1992-1995년 전쟁 때 얘기를 하고,

당시 폐허가 되었던 모스타르 사진도 보여줬다.


그리고 거실 발코니로 나를 부르더니,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며,

이게 저기 저 건물이라고,

이제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전쟁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한다.


아, 정말 현지인에게서밖에 들을 수 없는 

값진 경험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분이 그런 이야기해줄 때마다

녹음을 해두었어야 했던 것 같다.


한참 전쟁 얘기 하시더니, 

배고프지 않냐고 물으신다.


그리고는 블라가이의 농장에서 직접 만든 잼이라며,

그 수재 잼과 버터,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운 빵을 주며, 

그거라도 먹으란다.


숙박사이트에서 예약할 때 

식사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냥 집에 놀러 온 아는 사람 대하듯 하신다.


그리고 블라가이에서 직접 만든 쥬스라며,

(한국 가정에서 자주 보는 

"매실액" 같은 달달한 농축액이었다)

달달한 쥬스도 한 컵 주셨다.


그러면서 또 블라가이 이야기를 한참 하신다.

그리고 아들이 시간이 되면, 

아들 차 타고 블라가이에 가자신다.


예전에도 그런 적 있는데, 

다른 투숙객이랑 같이 

기름 값만 나눠 내면 된다고.


얼마 후 아들이 등장했는데, 

30대 초중반 정도의 아들도 인상이 선하다.


하지만 아들이 바빠서인지 

블라가이 얘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2) 보스니아어 프리미엄


구시가에 나갔는데, 

사람들 매우 친절하다.


내가 보스니아어 하는 걸 신기하게 여기고,

또 그래서 잘 해준다.


언어 프리미엄이 있었다.


과일 사러 시장에 갔을 때도 

보스니아어 잘 한다고 칭찬하며,

(사실 "이거 얼마예요?" 묻는거니, 

잘하고 말고도 없는데 말이다)

과일도 조금 더 얹어 주고,


어떤 카페에서 커피랑 케잌을 먹었는데, 

거기서도 내가 보스니아어 하는 것에 놀라워하더니,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커피 값도 몇 마르카 깎아줬다.


아마도 몇 십년 전 한국 사람들이  

한국어 하는 외국인에게 그렇게 대했을 것 같다.




(3) 박물관보다 생생한 모스타르 속이야기


구시가를 구경하고 돌아다니다,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오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마침 아주머니와 아들이 

수박이랑 무화과를 먹고 있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와서 먹으라고 해서,

가서 먹어 봤는데, 

수박이랑 무화과랑 당도가 매우 높다.


내가 갔던 7월초에도 그랬는데, 

원래 모스타르가 여름에 고온 건조하고, 

보통 최고기온 40도까지 올라간단다.


그래서 아주머니 말로는 3모작도 하는 곳이란다.


그렇게 여름에 햇볕을 듬뿍 받아서인지,

과일이 매우 달고 맛있다.


그러다 아들은 어디론가 나갔는데,

아주머니 또 전쟁 경험담 얘기하신다.


이번에는 전쟁 때 아들 딸과 

어떻게 자기 친언니가 사는 

크로아티아 이스트라 반도로 갔는지에 

대한 무용담이다.


원래 그 다음 내 계획은 

구시가의 모스타르 박물관에 갈 생각이었는데, 

아주머니 이야기가 길어지길래, 

들으면서 중간에 포기했다.


그런 이야기가 박물관보다 더 생생한

모스타르 역사니까.




(4) 아무런 계산 없는 순수한 선의


두번째날 가톨릭 성지 

메쥬고리예(Međugorje)에 다녀 왔는데, 

시내 버스처럼 생긴 버스가 

버스터미널이 아닌 북쪽 어딘가에 섰고, 

종점이라고 해서 다들 내렸다.


난 사실 지도도 가지고 있었던데다가,


그 전날 낮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모스타르 시내를 두 번이나 돌아서,

어디로 가야할 지 대충 알 것 같았는데,


메쥬고리예에서 나랑 같이 버스를 기다렸던

어떤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영어로 "어디 가는지" 묻는다.


그냥 걸어다니며 모스타르 시내 구경할 생각이었던

내가 터미널에 간다고 대답했더니,


그 여자분 "그건 복잡"하다면서,

나더러 따라오라며 

어떻게 가야하는지 말로 설명하더니,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길에 서서 나름 약도도 그려준다.


거의 직선 하나 그어놓고 점 하나 찍어놓은 수준의

지극히 단순한 약도였지만,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그 착한 마음이 느껴졌다.


설명을 듣던 내가 

"티토 다리"를 건너면 되지 않냐

영어로 대꾸했더니, 


놀란 얼굴로

"It is not your first time in Mostar?

(모스타르 처음 아니에요?)" 

라고 묻는다.


내가 모스타르 처음인데, 

티토 다리는 어제 봤다고 말했더니, 


이제는 '내가 혼자 갈 수 있을 거'라 안심했는지,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갔다.


중간에 그냥 보스니아어를 해서 

내가 "모르면 물어볼 수 있다"는 걸 

보여줄까 생각도 했는데,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도움의 손길로 내민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냥 웃으면서 

그녀의 그 아름다운 마음을 지켜봤다.


정말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하긴 했는데, 

사실 그 말이 

내 맘 속의 고마움을 다 담지는 못했다.




(5) 조금 많이 늦은 아침

 

그렇게 무사히 숙소에 갔는데, 

다 늦은 저녁에

아주머니가 나더러 점심을 먹으란다.


내가 아침 일찍 메쥬고리에로 떠날 때,

아주머니가 아침 먹고 가라고 하셔서,

늦어서 안 된다고 했더니, 

그럼 이따가 점심으로 먹으라고 하셨는데,

그걸 나 먹으라고 남겨두신거다.


내가 약간 감동하며, 

그러겠다고 고맙다고 했더니,

고기와 야채를 볶은 밥에 

호박 볶음, 생오이, 생토마토를 가져다 주셨다. 


마침 거실에 다른 투숙객 중 한 명인 

20대 중후반의 프랑스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보스니아어로 그 여자분에게도 

와서 밥을 먹으란다.


너무 자연스럽게 얘길 하셔서,

난 당연히 그 프랑스인이 보스니아어를 하거나,

아주머니가 영어를 할 줄 알았는데,

그 프랑스인이 이해를 못한다.


내가 영어로 무슨 얘기였는지 말해주니, 

그 프랑스인도 같이 식탁에 앉았다. 


그 프랑스인은 직장 다니다가 

Gap year 내서

터키부터 시작하는 발칸반도 여행중이라고 했는데, 


우리 둘이 앉아서 보스니아 집밥을 먹으며,  

"모스타르 너무 좋다"고, 

"이 집 주인들 너무 친절하다"

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6) 별빛 아래 공짜 콘서트


그리고는 구시가에 갔다가 

10시반쯤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려는데,

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샤워끝내고

발코니에서 와인 한 잔 마시라고 하신다.


그 와인은 블라가이나 농장에서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거란다.


그 역시 어찌 거절하겠는가?


그 아파트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보스니아 음악을 크게 연주하는데,

"공짜 콘서트"니 얼마나 좋냐며 나를 부른거다.


한국 같았으면 시끄러운 소음이라고 했을텐데,

그 아주머니는 매주 주말마다 반복된다는 

그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 이걸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뭔가 대단한 인생의 고수를 만난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아주머니 말대로 생각하니,

카페에서 들려오는 그 낯선 음악이  

더구나 나같은 여행자가 

보스니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귀하디 귀한 기회 같고,

 

아파트의 발코니에서 보이는 

모스타르 시내의 밤풍경도 너무 소중하다.


(동영상 3: "공짜 콘서트")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그렇게 아주머니와 와인을 마시며,

모스타르 전경을 보면서,

자정까지 보스니아 음악을 감상했는데,


직접 담근 와인 탓인지, 강행군 여행 탓인지, 

너무 졸려서 곯아 떨어졌다.




(7) 보스니아식 환대


그리고 마지막 날 아침.


아침 9시 버스를 타고 사라예보에 갈 계획이었는데,


그 전날 와인 마실 때 아주머니가

아침에 커피 마시고 가라고 하시길래,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그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이번에는 아주머니와 

보스니아식 커피를 마셨다.


혹시 몰라 8시 30분에 알람 맞춰 뒀는데,

역시나 모르타르 서쪽에 있는 산에 

아직도 남아 있는 지뢰 이야기랑 

불라가이나 기념비 세운 이야기 듣다가,

알람 아니었음 시간 깜박할 뻔 했다. 


그렇게 그 집에서 나오려는데,

아주머니도 이제 곧 블라가이나 가신다면서

배웅해주시며, 

보스니아 전통 다과라며 

알록달록한 걸 손에 쥐어주신다.

(2018년 7월, Mostar, Bosnia & Herzegovina)


아주머니는 내가 자기 딸 같았다며,

나중에 또 오라고 했고,


난 나중에 꼭 또 오겠다고, 

그때는 블라가이나도 가야겠다고,  

내 진심을 말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8. 다리의 도시에서 따뜻한 세상과 만나다.


그 숙소 주인 아주머니가 

원래 모든 손님에게 그렇게 대하는지,

아님 정말 보스니아어를 하는 손님인 

내가 자기 자식 같아서 

그렇게 잘 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몇달 동안 잊고 있던 가족의 온기를  

모스타르에서 오랫만에 느꼈다. 


그리고 그 집 밖 그냥 낯선 거리에서도

언어 프리미엄 때문에 혹은

그냥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보여서 베푸는 

낯선 사람의 호의를 얼떨결에 받았다.


그리고 메쥬고리에에 가서는 

크로아티아어 같이 공부하고,

자다르(Zadar)랑 플리트비체(Plitvice)

여행도 같이 갔던 

헝가리 친구 라우라(Laura)를 정말 우연히 

그것도 성모상 앞에서 만났고, 


사라예보에서는,

맨날 같이 여행가자 이야기만 하고, 

한번도 같이 여행하지 못했던 

자그레브 아파트의 룸메이트 

키아라와 멜렉을 만나,

짧지만 또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거의 열흘만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도,

며칠동안 불릴 일 없었던 내 이름이 불리는 걸  

이국적인 억양으로 오랫만에 듣는 것도 좋았다.


믿는 구석도 없이

그냥 호기 좋게 한학기 일을 쉬겠다고 선언하고,

작년 1월 그 좋다는 크로아티아로 떠난 나를 

다들 부러워했고, 


나도 그 6개월이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사실 일부러 먼 나라로 가서

알파벳부터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5-6개월을 지내는 그 생활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선택의 연속이었고,

그 때문에 계속 긴장하고,

또 계속 긍정적, 부정적 스트레스 속에 살았다.


이제 그나마

"범생의 소심한 일탈"의 시간도 끝이 보여,

몇개월간 잠시 빠져나왔던,

퍽퍽한 한국의 일상으로 되돌아 갈 날을

얼마 안 남겨두고 있는 상태에서,


결국 내 인생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으리란 걸 느끼면서,


그래서 그런 현실을 잊기라도 하려는 듯,

아님 그런 현실에서 고생할 나에게

마지막 선물이라도 주듯,


'지금 아니면 다시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좀 고생스러워도 나중에 다 추억이다',

'다시 오는 것보다 여기서 가는 게 그래도 더 싸다'

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크로아티아 체류 막판에 몰아서

크로아티아 국내 지역들,

크로아티아 주변 국가들과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먼 나라까지, 

가끔씩은 밤기차, 밤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치열하게", "빡빡하게",

혹시 모를 위험을 경계하며

바짝 긴장한 상태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 "팔자 좋은" 내가 

잊고 있던 혹은 잊은 척 하고 살던 

심리적 피로감을 조금 덜어주는 

사심 없는 따뜻한 호의를,

구 유고슬라비아 여행 끝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만났고,


마치 B&H 첫 도시인 모스타르의 다리가 

나를 세상과 이어주기라도 한듯,

거기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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