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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oga Jan 15. 2021

새롭지도 않은데 “뉴”스라고 해야 하나?

 사진 출처:


1. 새로워서 “new”s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불문과 선생님이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가 외국어의 전부인 양”,

“미국이 외국의 전부인 양”

인식하는 세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다.


“난 사람들이 말하는 것 중에 또 웃긴 게,

news의 어원이

동서남북에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그게

지극히 영어적 발상이라 생각한 적이 있어서,


그 선생님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영어가 외국어의 모든 것인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그 기발한 학설(?)을 비웃었다.




예전에 “뭘 잘 모를 때”,

그 “동서남북 기원설”을 들었을 때는,


North, East, West, South의 앞 글자를 따서,

동서남북에서 온 것들”이라는 의미로

NEWS가 되었다는 그 학설(?)에 감탄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유럽어들을 배우고 보니,


다른 유럽어에서는 우리처럼

“news”를 [뉴스]라는 외래어로 부르지 않고,

각자 고유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른 유럽어의 “뉴스”

거의 다 “new 한 것들”,

즉 “새로운 것”의 복수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영어 단어 News도 그 대세를 따른 것이 분명하다.




영어를 잘하면,

해외자료의 정보를 좀 더 빨리 많이 습득할 수 있어,

일과 학업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에 영어 구사능력 자체는

“일을 잘하는 능력”이나

“공부를 잘하는 능력”과

(심지어 “제2외국어를 공부하는 능력”과도)

딱히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똑똑하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도 많고,

영어는 잘 하지만 똑똑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한국의 학업과 사회적 성공에서

필요 이상으로 영어가 과대평가된 감이 있다.


영어가 20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국제어”가 된 데다가,


한국은 아주 작은 숫자 차이도 의미가 있는

경쟁이 지독하게 치열한 사회이다 보니,


공인된 영어 점수는 중요한 “스펙”이 되었고,


“영어”가 우리 사회에서 대표 외국어일 뿐 아니라,

마치 세상 모든 언어의 표준인 듯 인식되며,


수십 년간 전무후무한 “제1외국어” 자리를

굳건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영어는 “제1외국어”나 “외국어”로

불리지도 않은 채,

그냥 짧게 “영어”라고 불리며,

국영수의 한 꼭짓점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사실 영어는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20세기 여러 공산주의 국가에서 러시아어가 했던


lingua communis (공통어) 역할을 수행하는,


그냥 여러 외국어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 “영어”가 단순한 외국어를 넘어서,

“기본 능력”이면서 “막강한 스펙”이 된 상황에서,


흔히 우리가 “제2외국어”라 부르는,

전반적으로 구조와 어휘가 영어와 유사해서,

‘이제 좀 쉽게 배워보나’ 했던

“영어보다 하찮은” 다른 유럽어들이

어느 순간 영어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한국인들은 그 “제2외국어”인 유럽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흔히 하듯이,

“비정상적”이라고 낙인찍어버리고,

“이상하니 열등”하다고 가치 절하하며,


“말이 안 된다”, “이해를 못하겠다”며,


영어를 배울 때는 한 번도 취해본 적 없을,

배타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너무나 당당하게 그 “제2유럽어”에 취한다.


그리고 사실 예전에 러시아어 처음 배울 땐

나도 그랬다.


하지만,

유럽 변방에 위치한 영국의 지리적 위치만큼이나,


언어의 구조적 특징으로 봤을 때,

오히려 영어는 

다른 유럽어와 다른 예외적인 특징도 많은

“변방 유럽어”다.


즉, 다른 유럽어가 영어와 다를 때,

“영어가 이상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물론 이상한 게 나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런 “변방의” 영어가 독보적인 “국제어”가 된 것도

20세기 중후반을 지나서,

즉, 비교적 최근이라서,


언어 구조뿐만 아니라

어휘에서도

유럽어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의 시작점이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같은 영어권인

영어 표현은 사실 별로 많지 않다.


“새로운 것들”이 news가 된 것도

역시나 “새로운”을 뜻하는 형용사의 복수가

“뉴스”를 의미하는

라틴어 nova, 프랑스어 nouvelles의 조어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동서남북”의 첫 글자를 합쳤을 때

NEWS가 되는 건 그냥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유럽어는 영어밖에 몰랐다면,

뭔가 더 복잡한 인지과정이 개입된 이 학설(?)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 순서가 굳이 “북동서남”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좀 더 본질적으로

뉴스에서 보다 중요한 게,


새로움”인지,

“(동서남북에서 온) 소식 모음”인지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2. 슬라브어의 “뉴스”들


다른 대부분의 유럽어들과 마찬가지로

슬라브어에서도 “뉴스”는 

대체로 “새로운 것들”이라는 구조다.


하지만 유럽 서북쪽의 영국만큼이나

동쪽 변방이었던 슬라브 사회 구조 안에

“뉴스”라는 개념이 들어온 게,


슬라브인의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남부 유럽에 등장한 7세기 후,

슬라브어가 조금씩 달라진 이후인지,


“새로운”을 의미하는 n(o)v-가 들어있는 건 같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는 좀 다르다.


러시아어 новости[노보스티]

폴란드어 nowości [노보시치]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어 novosti[노보스티]

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 новини [노비니], новости[노보스티]

체코어 noviny[노비니]

우크라이나어 новини[노비니]
벨라루스어 наві́ны [나비니]

슬로바키아어 novinky [노빈키]

슬로베니아어 novice[노비체]


뭐 이런 식이다.




여러 슬라브어에서

“새로운 것들”이라는 개념이 “뉴스”가 된 게,


슬라브어가 여러 개로 분화되고 난 이후,

다른 유럽어의 영향으로

뒤늦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것들” 말고

다른 형태의 슬라브어 고유 어간에 바탕한

“뉴스”, “소식” 단어가 존재한다는 거다.




우선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어에서

“새로운 것들” novosti [노보스티]

무언가 새로운 물건이나

일상적인 소식이라는 의미에서의 뉴스이고,


티비나 신문에서 보는 뉴스

vesti / vijesti [비에스티]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폴란드어에서도

뉴스나 일상적 새 소식뿐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걸 가리키는

“새로운 것들” nowości [노보시치] 보다는


wiadomości[비아도모시치]라는 단어가

“뉴스”라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된다.


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 러시아어 вести[베스티], 우크라이나어 ві́сті [비스티]

TV나 신문의 뉴스를 가리킬 때

부차적으로 사용된다.




여러 현대슬라브어에서 이렇게
“새로운 것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면서

뉴스를 의미하는 단어들은


모두

“(듣거나 보고서) 명제적 사실을 알다”라는 의미의

고대슬라브어 вѣдѣти[베데티]에서 나온 거다.


고대슬라브어에서 “알다”라는 의미의 동사는 

크게 두 가지가 있어서,


вѣдѣти[베데티]

“단편적 명제적 사실을 알다”로,

대체로 영어 접속사 that절에 해당하는

종속접속사절에

알게 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문장을 담는다.


예를 들어,


나는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수도라는 것을 안다.”

같은 문장을 말할 때 쓴다.


반면에 또 다른 “알다” знати[즈나티]

“(오랜) 직간접 경험을 통해 특정 대상을 알다”로,

뒤에 명사 사람이나 장소, 지식 같은 것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나는 모스크바를 안다.”

같은 문장을 말할 때 쓴다.




아마 이쯤에서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이상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영어 말고 다른 유럽어의 “알다”도

많은 경우 이렇게 두 개씩 있다.


명사로 표현되는 사람이나 장소를 아는 경우

프랑스어 connaître,

독일어 kennen,

스페인어 conocer,


문장으로 표현되는 단편적인 특정 사실을 아는 경우

프랑스어 savoir,

독일어 wissen,

스페인어 saber로 표현한다.


그리고 괜히 번거롭게 대부분의 유럽어에서 

“알다”를 별개의 두 동사로 표현하는 게 아니어서,


사실 두 개의 “앎”은 좀 다르다.


“나는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수도라는 걸 안다.”

“나는 모스크바가 12세기에 세워졌다는 걸 안다.”

“나는 모스크바에 붉은 광장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2018년 모스크바에서 월드컵 경기가 열렸다는 걸 안다.”


등등의


여러 단편적 savoir, wissen, saber가 모여서,


“나는 모스크바를 안다.”


라는 connaître, kennen, conocer 가 되는 거다.



물론 이 두 종류의 앎의 구별엔

통사적 차이가 좀 더 중요하고,

이런 의미적 차이가 절대적인 건 아니라서,


모든 단편적 명제적 앎 savoir, wissen, saber가

지식이나 익숙함의 앎

connaître, kennen, conocer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 영화의 제목을 안다”처럼

지식이나 익숙함의 켜를 쌓아서 만들어지지 않은,

매우 단편적인

connaître, kennen, conocer도 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역시나 “알다” 동사가 그냥 know 하나뿐인

서북 변방의 유럽어인 영어가,

유럽어의 기준에서는 좀 “이상한” 거다.


다른 게르만어에는 다들 두 개씩 있는 거 보면,

영어에도 원래 두 개였는데,

“단편적인 특정 사실을 알다”형 동사가

사라진 것 같다.


동북 변방의 유럽어인 슬라브어에서도,

현대어에서는

“단편적인 특정 사실을 알다”형 동사가

대체로 사라져서,


서슬라브어에서만

체코어 vědět [베데트],

슬로바키아어 vedieť [베디에트],

폴란드어 wiedzieć[비에지에치]로 남아 있다.


현대 슬라브어에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처럼,

“알다”동사가 두 개씩이고,


슬라브어, 슬라브어에서는

영어처럼 그리고 한국어처럼

 “알다” 동사가 하나씩이다.


그리고 남슬라브어와 동슬라브어에서

“(보거나 들어서) 특정 사실을 알다”라는 동사는

사라졌지만,


명사는 남아서,


듣거나 보고 알게 된 단편적 명제적 사실”

뉴스”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뉴스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들어서 알게 되는 단편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지식”이나 “익숙해짐” 같은

보다 반복적이고 깊이 있는 종합적 인지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단편적인 사실의 한 켜를 쌓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뉴스”를 수용한다.


지식을 알거나,

누군가를 알거나,

어떤 장소를 알거나 하는 것과


뉴스를 통해 어떤 사건을 듣거나 보고 아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슬라브어에서

“(듣거나 보고서) 단편적 명제적 사실을 알게 되다”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가

뉴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건 매우 논리적이다.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뉴스는 최소한 어떤 “사실”을 

독자나 시청자가 “  있게하는 거니까.



물론 좀 더 좋은 “뉴스”

단편적인 사실들을 평면적으로 아는 단계를 넘어서


다른 차원의 앎인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익숙한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뉴스를 만난 기억이 많지 않다.


그런 게 원래 어려운 건지,

한국에서 어려운 건지,

21세기 한국에서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3. 슬라브어의 “신문”들


한국어의 “뉴스”는

“새로운 것들”이라는 의미의 영어 news를

그 발음대로 음차해서 사용하지만,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한국어 한자어 “신문(新聞)”이 가리키는 물건도

뉴스의 중요한 전달 매체로

 “뉴스”와 관련되어 있다.


한자어 “신문(新聞)”은

새롭게 들어서 알게 되다”라는

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적 구조만 놓고 보면,

“신문”이라는 단어는

newspaper 보다

오히려 news의 번역으로 더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사실 종이 신문 시대 때도 그랬고,

인터넷 신문 시대인 현재도 그렇고,


우리가 가장 쉽게, 가장 빨리 뉴스를 접하는 매체가

신문이므로,


“신문”이라는 단어의 내적 구조가

News라는 단어의 내적 구조와 동일한 게

많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슬라브어에서 “신문”을 가리키는 단어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뉴스”를 가리키는 단어와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신문”

noviny [노비니],


“뉴스”를 가리키는 표현과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어 “신문”

novine[노비네]가 그 첫 번째 그룹이고,


(2)


 “(듣거나 보고) 명제적 사실을 알다라는 뜻의

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

вестник, весник[베스닉]이 두 번째 그룹이다.




(3)


세 번째 그룹은

아마도 오랫동안 독일어가 사용된 지역이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신문”을 의미하는 독일어 Zeitung [차이퉁],

“잡지”를 의미하는 Zeitschrift[차이트슈리프트]의

Zeit [차이트]처럼 “시간”이라는 의미의

čas [차스]가 들어 있는


슬로베니아어

časopis[차소피스], časnik [차스닉]으로,


각각

시간의 기록”, “시간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미다.


신문은

“특정한 시점”의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니,

꽤 설득력 있는 작명이다.


다른 슬라브어에도 “시간”이 들어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의미가 약간 다르다.


역시나 독일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어 časopis[차소피스], 폴란드어 czasopismo[차소피스모] 같은


시간의 기록”이라는 내적 구조의 단어는,


독일어 Zeitschrift [차이트슈리프트]와 똑같이

“잡지, 저널”을 가리킨다.


하긴 시사적인 걸 다루는 “신문 “잡지

여러모로 매우 비슷하니까.


이것과 비슷하게

“잡지, 신문”을 통칭하면서,

잡지”로 더 많이 쓰이는 영어 단어 journal이

프랑스어에서는 “신문”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프랑스어로 jour [주르]가 “하루, 일”이라는 의미니,

journal은 “신문”인 게 더 논리적이다.


이렇게 프랑스어가 바다 건너 영국에 가서

의미가 조금씩 변형된 예는 무지 많고,


그래서 영어 혼자만 다른 경우도 역시나 적지 않다.



(4)


슬라브어 “신문”의 마지막 그룹은

이탈리아어에서 기원

폴란드어 gazeta, 러시아어 газета[가제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газета[하제타]이다.


그런데 현대 이탈리아에서

보통의 “신문”은

프랑스어 journal과 비슷하게 giornale이고,


gazzetta [가제타]는 현대어에서

“기관의 신문”,

즉 “관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탈리아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한

프랑스어, 영어 gazette라는 단어도 같은 의미다.


이탈리아어 gazzetta는

16세기 중반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에서 발행한

최초의 월간 필사 종이 신문

“La Gazeta dele novita”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어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우선 gazeta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동전 단위였고,

신문의 값이 1가제타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novita [노비타]는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

즉 뉴스이니,

한 푼짜리 뉴스”라는 의미인 셈이다.


다른 설에 따르면,

gazzetta는 “(소문을 퍼트리는) 작은 까치”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둘 중에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한 첫 종이 신문이라는

거창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개체 치고는

그 어원이 너무 경박스럽다.


하루 지나면 버려지는,

아니 이제는 1분만 읽으면 버려지는 

신문은

원래 그렇게 가벼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gazeta라는 베네치아 동전 이름 자체는

보물”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와 라틴어 gaza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신문을 접하는 창구일 여러 포털에서

보물 같은 기사는

“유니콘”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4. “뉴”스 유감


(1)


예전에 러시아에서 언어 연수할 때,

“시사 러시아어(Актуальный русский язык)”

수업 시간에

한 유럽 친구가 그랬다.


러시아 뉴스엔 해외 뉴스 너무 적고,

러시아 국내 뉴스 많다라고.


그 말에 다른 유럽 친구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고,

러시아 선생님도 인정했는데,


난 그때 의아했다.


러시아 뉴스에서 해외 소식

신문이든 TV든

한국보다 훨씬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뉴스의 20-30퍼센트는 외국 뉴스였고,

그리고 외국 뉴스가 헤드라인이 되는 비중도

한국보다 높았다.


그때 알았다.


한국 뉴스는

너무 지나치게 우리 자신만 거울에 비춰보고,

너무 지나치게 우리 자신 이야기만 한다는 걸.


그 수업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고,

한국은 여러 모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지나치게 시야가 좁은 뉴스는

아직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나라 뉴스에 비해

우리나라 뉴스엔

정치 뉴스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


어릴 때 종이 신문을 볼 때는,

내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게 많아서,

몇날 며칠 계속해서 쟁점화되는 “중요한”

정치뉴스를 정확하게 이해 못하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도,

배울만큼 배우고 난 다음에도 이해 못하겠다.


왜 포털과 TV 뉴스에서

그렇게나 정치 뉴스의 비중이 높아야 하는지.


왜 잘잘못이 비교적 분명해 보이는 이슈마저도

중요한 정쟁으로 만들어서,

며칠씩, 몇 달씩 소모적으로 우려먹어야 하는지.


난 정치 분야라면 그냥 어떤 좋은 정책이 있고,

어떤 나쁜 정책이 있는지를 알면 좋겠는데,


특정한 정책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의 사실 전달 부분은 기사마다 똑같고,

뒤의 평가 부분은 

신문사 이름만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개별 신문사의 기본 스탠스에 따라 

사안에 상관없이 거의 똑같다.


그렇게 그들의 뉴스에 새로움이란 없다.


그나마 그런 기사라도 볼 수 있으면 다행이고,

실제 정책이 아닌 

그냥 정치인들의 사사로운 말이나 행동

주요 뉴스인 경우가 너무 많다.


점심에 먹은 메뉴나

그냥 무시가 정답인 어그로성 막말 같은 것도

그들이 하면 “뉴스”라고 불리며

새롭게 가공되거나 재생산되어

며칠 동안 TV와 포털의 뉴스 공간을 떠돈다.


심지어는

사회 뉴스도 정치적인 대결구도로 마감이 되고,


도대체 내가 “팔로우하지 않기로 선택한”

그들의 편협하고 허섭한 멘션을

내가 왜 알아야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관련 분야 비전문가의 소셜미디어도

정치적인 대결적 메시지가 있으면 뉴스가 되어,

포털 메인에 치렁치렁 걸린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제곧내”,

즉 “제목이 곧 내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국내 뉴스만 주야장천 보도하는 데다가,

그중에서 정치 뉴스가 또 심각하게 높은 비중이니,


그 “좁디 좁은 바닥”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다 보니,


그렇게 TV 뉴스와 포털에서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고,

가끔은 이게 왜 필요하나 싶은 쓸데없는 얘기나,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거짓 정보도

속보로 내보내며,

없는 쟁점도 새로 만들어내는 수고를 하나보다.


그래서 명색이 “new”라면서 전혀 새롭지 않다.


그래서 이제 난 한국 포털의

정치 뉴스와 정치적 제목의 뉴스는 읽지 않는다.


장사가 안 되면,

안 팔겠지


하는 마음으로 소심하게 “불매”중이다.



(2)


2012년 겨울방학 동안

프라하로 5주 체코어 연수를 떠나면서,


론니 플래닛 “프라하” 책을 샀다.


그 책의 장점은

어디가 맛집인지,

어디가 핫한 여행지인가뿐 아니라,


체코와 프라하의 역사, 문화 등도 소개한다는 건데,


거기에 체코 잡지, 신문을 소개하는 섹션에,


오랜 공산치하의 언론 자유의 압박 상황 때문인지,

저널리즘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거 읽으면서 생각했다.


한국의 저널리즘이 이렇게 신뢰도가 낮은 것도

“독재 치하의 언론자유 제한” 때문에,

제대로 된 저널리즘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저널리즘 비전문가 독자인 내가 보기에,


21세기 현재 한국의 저널리즘이

“제대로 쓰지 않음”의 문제는 아무리 봐도

외부 검열보다는 “상업성” 때문인 것 같다.


정치 뉴스가 “팔아먹기 위해”

심하게 편가르기를 하며,

상대편에 대한 증오를 조장할 뿐 아니라,


사회, 문화 기사는 필요 이상으로 선정적이거나,

노골적으로 사람들의 욕망과 불안을 들쑤신다.


그리고 많은 뉴스가

내용과 형식 모두 저급하다.


체코에 저널리즘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해도,

러시아에 오랫동안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어 왔다고 해도,


나 같은 외국인은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수준 있는 체코어, 러시아어 

어휘와 문장을 공부했고,

어떤 사안이나 논점에 대한 체계적 배경 설명에서

그 나라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배웠다.


그 나라들의 신문들은,

특히 사람들이 많이 보는 괜찮은 신문들은

최소한 그 정도의 가치는 있는 글을 싣는다.


하지만, 만약 내 주위의 외국인이

중고급 수준의 한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신문을 읽겠다고 했을 때,


과연 내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들을

추천해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 다른 “저널리즘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들의

 뉴스가 속시원하게

“제대로, 끝까지 쓰지 않더라도”,


이렇게 정보가 적고 분석이 없는

평면적인 기사를 대량 생산하지도 않는다.


“황색 언론”이나 속보성 기사가 아니라면,

당연히 기본적인 사실 전달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분석이 덧붙여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제대로 된 모국어”로 된 정상적인 문장이 담긴다.


대학 강사인 내가 요즘 포털의 뉴스를 

기말리포트처럼 채점한다면

다들 최하점을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러 슬라브어 “뉴스”의 어원에 담긴

“단편적 사실의 앎”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담은 경우도 많고,


도대체 이걸 왜 썼나 싶게 다 아는 내용을 반복해서

새로운 정보가 없거나,


다른 기사랑 거의 비슷한 경우도 많아서

표절” 아니면 “자기 표절”이고,


뉴스 밑에 달린 작성자 이름이 무색하게,

남의 이야기만 모아놓을 뿐,

자기 분석이 없고,


갑자기 논리적 비약을 해서,

기사 내용과 관계없이,

원래 자기가 말하고 싶었거나,

그 신문사가 자주 말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거나,


비문이나 오타도 매우 자주 발견된다.


한국 포털에서 차려주는

그런 “뉴스 아닌 뉴스”를 읽으면서 짜증내기 지쳐서,


실종된 “뉴스”와 “저널리즘”

나라 밖 다른 곳에서 찾기로 했다.



(3)


나라 밖 소식에 대해,

뭔가 보다 깊고 넓게 알고 싶을 때는

해외의 신문이나 논문을 찾아보지만,


“세상” 소식을 가볍게 쓰윽 훑어보고 싶을 때는

BBC World News를 가끔 본다.


(비록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미국 국내 얘기가 많은 CNN에 비해,

World News라서 그런지,

BBC World News는 영국 밖 얘기가 많다.


영국 국내 정치 이슈는 자주 나오지 않고,

주제도 다양해서 재미있고,


리포터는 “단편적인 앎”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고,


(영국인들이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방송사니,

그 내용의 정확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잠시 후 화상 연결된

세계 각지의 다양한 전문가들

그 내용에 대해 평론을 한다.


(우리처럼 전문성이 의심되는 “전문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내용도 깊이가 있고 유익하다.


그렇게 시야가 넓어지는 장점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BBC World News를 보게 만드는

가장 큰 장점은

뉴스가 유쾌하기도 하다는 거다.


뉴스를 전하는 앵커들이

좀 덜 경직되어 있기도 하고,


긍정적인 뉴스

그냥 웃으며 볼 수 있는 가벼운 뉴스도 비교적 많다.


작년 봄 팬데믹이 시작되어 유럽 봉쇄했을 때는

(당시 한국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을 때였다)

한국의 고양시 명지병원 로비에서

바이올린 연주하시는 한국분이 화상연결되어서,

BBC에서 실시간 라이브 연주를 했다.


그분이 긴장하셔서인지

아니면 연결 상태가 안 좋아서였는지,

연주가 아주 많이 좋았던 건 아닌데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소한 뉴스였고,


나도 그렇고 BBC 앵커도 그렇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주 전인가는

“인공 손”을 좀 더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는 영국 국내 뉴스가 나왔는데,


오른손이 없는 5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매우 환한 얼굴로

그 신기술로 만든 새 인공손으로 놀이하는 장면,

아이 엄마가 웃는 얼굴로 하는 긍정적 멘트,

개발자가 나와서 하는 신기술 관련 멘트

뭐 그런 컷들이 이어졌다.


장면이 바뀌면서

앵커의 웃는 얼굴이 화면에 등장한 순간,

나도 계속 웃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마음이 가볍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착한”뉴스가, 많진 않지만 그래도 거기엔 있다.


영국 내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뉴스 자체가

한국에 비해

수적으로 절대적 우세이진 않을거다.


뉴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가치관과

그에 따른 선택의 차이다.


한국 뉴스에는

독자와 시청자의 공분과 증오를 자극하는

“나쁜 놈들”, “나쁜 일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뉴스만 보면,

이렇게 살기 흉흉한 나라가 세상에 또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한국은 범죄율이 매우 높은 나라인 줄 알았다.


그 이후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뉴스 속 한국은

실제 한국보다 훨씬  부정적인 곳이고,

미래는 항상 걱정 투성이다.




새롭지도 않은 지겨운 내용에,

편 가르기를 위한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들은 대로 뱉어내는,

우울하고 암울한 얘기만 가득한 포털의 뉴스,


그리고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은

지긋지긋한 댓글에 물려서,


몇년 전 뉴스 읽는 포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몇 주전부터는 거기도 짜증이 나서,


아예 포털의 뉴스를 거의  읽기 시작했는데,


정신적 소음이 줄어드니,

머리가 더 맑아지고,


그런 거 읽느라 허비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도 하지 않게 되어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아주 많이 향상되었다.


앞으로도

포털이 차려놓은

“아는 맛이라 잘 팔리는”,

내용과 논조, 세계관이 전혀 New하지 않은 

뉴스는 클릭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동안 너무 자주

포털 메인에 차려놓은 뉴스만 읽어서 그렇지,


필요한 정보가 생길 때마다 적극적으로 검색하면,

한국 포털이 선택하지 않은

“잘 안 팔리는” 뉴스 중에,


새롭디 새로우면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고,

제대로 된 증거와 분석을 제시하며,

편 가르기 하지 않고,

적절한 비판뿐 아니라

가끔은 작은 희망도 줄 수 있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제 이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라”고

세차게 사람들의 등을 떠미는

그런 매우 new한 

뉴스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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