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oga Nov 20. 2020

생명의 물 = 작고, 불타고, 달콤한 진실의 물

(사진 출처:www.shutterstock.com)



1. “보드카”의 어원


예전에 대학원 사람들이 만든

러시아어 스터디 카페 같은 게 Daum에 있었는데,

다들 졸업하고,

유학 가고,

취업하고 하면서,

나중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난 단체 행동을 원래 별로 안 좋아해서,

스터디에도 참여하지 않고,

그 카페가 활발하게 굴러갈 때는

카페에도 거의 방문하지 않다가,


어느 날 뒤늦게 그 “폐허”를 우연히 방문했는데,


나의 그 간만의 방문보다 꽤 오래전에

어떤 외부 방문자가 남긴,

아직 답글이 달리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TV에서 봤더니,
보드카가 “생명의 물”이란 뜻이라고 하던데,
그게 맞는 건가요?


뭐 그런 질문이었다.




난 질문 강박이 있어서,

어떤 질문이든지,

어떤 식으로든 답변을 하는 편이지만,


그때 내가 그 오래된 질문에 답변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당시 водка[보드카]의 어원은

나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대답을 했어도 아마 제대로 못했을 거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티비에서 우연히 “CSI 라스베이거스”

옛날에 했던 거 재방영하는 걸 보게 됐는데,

사건 현장에 남은 보드카를 보면서,

반장 그리썸이 딱 그렇게 말했다.


“보드카”라는 단어가 “생명의 물”이란 의미라고.


아마 그 익명의 질문자가 그거 보고 질문했나 보다.


그렇게 시작한 그 CSI 에피소드가 어떤 내용인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보드카”의 뜻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CSI 시리즈 중 최고는

그리썸이 반장일 때의 “CSI 라스베이거스”이고,


가장 지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자 캐릭터는

CSI 라스베이거스의 그리썸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그의 그 말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던 게,


러시아어 водка[보드카]가

왜 “생명의 물”이라는 의미가 되는지,

아무리 단어를 쪼개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 вода[vada]는 “물”이고,

거기에 지소형 접미사 -к-가 붙어서

водка[vodka]가 되었는데,


“지소형”은 러시아어에서

주로 무언가 작은 것 혹은 사랑스러운 걸 

표현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


그래서 말 자체로는

“작은 물”, “사랑스러운 물”이라는 의미일 뿐,


그 짧은 단어 어디에도

“생명”이라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얼마 전,

제임스 빌링턴

“The Icon and the Axe”라는 책을 읽다가,

“보드카”와 “생명의 물”의 연결고리

드디어 이해했다.




2. “생명의 물”들


알고 보니,

러시아어 водка[보드카]가

“생명의 물”과 연관이 있는 건 맞지만,


엄밀히 말해서,

“생명의 물”이

“보드카(водка)”의 뜻이라 할 수는 없다.


라틴어로 aqua vitae [아쿠아 비타이/비태],

(-ae-는 초기라틴어와 후기라틴어 발음이 다름)

즉, “생명의 물”이라는 의미의 증류주,

증류를 거쳐 만들어진 높은 도수의 술


15세기에 러시아에서 토착화되면서,

водка[보드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니,


서유럽의 “생명의 물”이라는 이름의 술을

러시아식으로 만들면서,


그중에 “물”만 번역해서,

러시아어에서 “보드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하다.


위스키도 “생명의 물”이라는 의미의

아일랜드어 Uisce beatha[이시커 버허],

스코틀랜드어 Uisge-beatha에서,

“물”이라는 의미의 Uisce

영어화된 표현이라고 한다.


마치 발효주를 증류해서 증류주만 남은 것처럼,

그렇게 명칭에서도 “생명”은 “기화”되고,

“물”만 남은 거다.




그리고 영어 Whiskey가

이웃한 아일랜드어 또는 스코틀랜드어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어 “водка(보드카)”도 사실

이웃나라 폴란드어에서 시작됐다.


주로 와인을 베이스로 썼던 증류주

“생명의 물” 대신


자기 땅에서 많이 나는 귀리, 감자 등으로 만든

증류주 보드카는

러시아가 아니라 폴란드의 발명품이고,


폴란드어 wódka [부드카]의

작은 물”이라는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러시아어에서 водка[보드카]가 되었다.




모든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폴란드보다 러시아가 먼저 보드카를 만들었다는

반대 주장도 있다.


주로 러시아 쪽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데,

문헌이나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 때,

폴란드가 보드카 종주국일 가능성이 더 높다.


러시아보다 지리적으로 서유럽에 더 가까운

폴란드가 당시에 여러모로 러시아보다 더 진보된,

서구의 새 문화나 언어를 먼저 받아들여 

러시아에 전달했던

좀 더 “서구적인” 이웃나라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고

그래서인지 첫 비 이탈리아인 교황도 배출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당시에도 사람들이 말은 폴란드어로 하더라도

읽고 쓰는 건 주로 라틴어로 하면서,

당시 서유럽의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동방정교 국가여서,

라틴어나 로마, 그리고 서유럽과는

아직 별로 친하지 않았다.


18세기 표트르 대제 이후 서구화가 본격화된다.


그래서 서유럽의 “생명의 물”을

자기 토양에서 많이 나는 작물로 재료로 해서

더 먼저 토착화한 나라가

폴란드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다들 러시아식 “보드카”라고만 부르고,

러시아 술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말이다.




양옆의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였던 역사를 가진,


그리고 일찍이 좀 더 진보된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를 전해줬던 이웃나라에게

나중에는 국력에서 역전당해 식민지배를 당하고만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비슷한 역사를 경험한 폴란드라는 나라에

아무래도 자꾸 나는 마음이 간다.


사람들이 내가 머물렀던 여러 슬라브 국가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냐고 물으면,

나는 “폴란드”라고 대답한다.


물론 다른 슬라브 국가들도 무지 좋지만,


내가 러시아어를 뺀 슬라브어 중에서는

폴란드어를 그래도 젤 잘하기도 하는 데다가,


억울함이 많은 역사나,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 내는 국민 성향도 그렇고,

뭔가 비슷해서,


폴란드에 있을 때 젤 마음이 편하다.


아무튼 그래서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난 보드카 얘기 나올 때마다,

보드카의 원조가 러시아가 아니라,


적어도 그 발명 당시에는

여러모로 러시아보다 우위였던

폴란드란 나라에서 처음 나온 거라는 걸 말하는데,


한국인이든 유럽인이든

자기 나라 일이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어해서,

다들 그냥 한 귀로 흘러 듣는다.


하긴 보드카의 종주국이 폴란드든 러시아든,

위스키의 종주국이 아일랜드든 스코틀랜드든,

술 마시는 데,

그런 게 뭐가 또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아무튼 그럼 왜 그 “부드카”에 영감을 준,

그 “생명의 물”은

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걸까?


유럽에서 증류주는

뭐든지 증류시켜보던 중세의 연금술 실험 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처음엔 주로 수도원에서 이루어져,

종교적인 것과 관련되었고,

그런 “성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유럽어에서 그렇게 증류해서 얻어진

도수가 높은 알코올을 Spirit,

즉, “영(靈)”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중세적 관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생명의 물”은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잊게 하는 역할을 해,

일종의 의학적 치유제로 간주되기도 해서,


그런 거창한 이름이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생명”이라는 의미는 없는

러시아어, 폴란드어 지소형 어미 -k-도,


“생명의 물”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보드카”라는

그 특별한 “물”에 대한 호감을 담고 있다.


지소형 어미 자체가 지시하는

“작은 것”이,

슬라브어에서는 많은 경우

내 안에 또는 내 생활영역 안에 있는,

간직하고 보호해야 되는 소중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영어의 baby나 한국어 “애기”도

그런 의미적 관계에서 애칭이 되었을 것이다.




“보드카”의 대략적 역사를 모르던 때 나는,


“보드카”가 워낙 유명하고,


어느 슬라브어든지 물은 voda [보다]여서,


다른 슬라브어에서도 “쎈 증류주”는 다

“보드카”라고 부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체코 마트의 주류 코너에는 보드카 섹션이나

보드카처럼 쎈 증류수 판매 섹션에

“보드카”나 그밖에 특별한 이름이 없고,


불가리아, 크로아티아에서도 보드카는 없고,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든,

쎈 증류수를 통칭하는 말이

생전 처음 들어본,

완전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보드카인 술이,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위치한

벨라루스에서는 гарэлка [하렐카], 

우크라이나에서는 горілка [호릴카]라 불리는데,


러시아어 гореть [가레츠]와 마찬가지로

“불타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나왔고,


영어의 brandy도 burn에서 나왔다고 한다.


슬로바키아에서는

과일로 만든, 높은 도수의 증류주를 통칭하여,

pálenka [팔렌카]라고 하고,


체코에서도 같은 단어가 있는데,


이 또한 “불타다”란 의미의

páliť [팔리트]에서 나왔다.


가열하여 증류를 해서 만들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편 발칸반도의 슬라브인이 주로 마시는

증류된 “쎈 술”은 또 다른 이름이다.


불가리아 ракия,

마케도니아 ракија,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 rakija가 그것인데,    


모두 [라키야]라고 발음된다.


달콤한” 혹은 “와인”이라는 뜻의

아랍어  عَرَق‎ [아라크]가 터키어 raki를 거쳐 들어온 거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발칸반도의 많은 나라가 터키의 식민지였어서

[불가리아는 500년이나 터키 땅이었다]

언어나 문화에 터키적인 것들이 많이 있다.


러시아나 폴란드보다는 훨씬 위도가 낮아,

한국만큼 또는 한국보다 따뜻하고,

먹을 게 더 풍부한 발칸반도에서

라키야는 주로 과일을 베이스로 만들고,

그래서 영어로 fruit brandy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통칭해서 “라키야”라고 하긴 하지만,

과일 각각에 따라 다양한 별개의 서브이름이 있다.


예를 들어, 자두로 만든 건  šljivovica[슐리보비차],

포도로 만든 건 grozdova[그로즈도바],

배로 만든 건 kruškovača[크루슈코바차]

뭐 그런 식으로 수십 종류가 존재한다.


라키야는 40-50도라서

마시는 순간 목에서 불이 나면서,

몸 전체에 열기가 올라오는 건 보드카와 같은데,


그 재료와 그 어원에 걸맞게

은은한 과일향이랑 단 맛이 좀 있다.


마치 친구인 듯 웃으며 다가오는

강한 놈과 대면하는 느낌이라,

정신 차리지 않으면 훅 갈 것 같다.


다행히 난 한두 잔 선에서 기분 좋게 마시고,

안전하게 그 대결을 마무리했다.




슬로베니아체코에도

40도 내외의 도수가 높은 증류주가 있고,

각각의 재료나 지역에 따른 명칭이

여러 개 있긴 하지만,


라키야”나 “보드카” 같은,

그런 증류주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

딱히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뭔가 중요한 것들에 총칭적 명칭과

다양한 세분된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명칭으로만 보면,

그런 증류주가 그들의 삶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


아마도 발효주들이 더 우세하기 때문인 것 같다.


체코는 뭐니 뭐니 해도 맥주이고,


겨울에는 Svařák [스바르쟉]이라 불리는

뱅쇼(vin chaud) 또는 글뤼바인(Glühwein),

즉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마시며 몸을 녹인다.


슬로베니아도 맥주나 와인을 더 즐겨마신다고 한다.




3. “마실 것”들


한번 끓이는 과정이 개입하는 증류주보다

발효주가 덜 기술이 필요한 거라,

와인이나 맥주 같은 발효주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라키야 같은 증류주보다

더 오래전부터 인류와 함께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오랜 역사는

슬라브어 자체에도 드러난다.


맥주는 пиво, піва, pivo, powo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긴 하지만,


동슬라브어(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

서슬라브어(체코어, 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

남슬라브어(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어)


모두

[피보] 혹은 [피바]로 대동 단결했고,


고대 슬라브어 동사 пити[피티],

즉, “마시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어원으로만 보면,

마실 것”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맥주”라는 의미의 여러 슬라브어 단어가

매우 유사한 것으로 판단컨대,


슬라브인들의 일부가

본격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언어가 달라지기 시작했을 7세기 이전에 

이미 슬라브어에 [피보]가 있었고,

슬라브인들의 삶에 “맥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마시는 것”이라는 의미로,

여러 음료의 대표성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음료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

러시아어로 пить пиво[피츠 피보](맥주를 마시다]라는 표현은

пить водку[피츠 보드쿠] (보드카를 마시다),

пить вино[피츠 비노](와인을 마시다)와 달리,


그 발음 자체만으로도

그냥 그 자체로 운율이 느껴져서,

그걸 말할 때마다

뭔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막 들이켠 것 같은,

살짝 들뜬 기분이 되게 한다.




슬라브어 내의 이러한 형태적 공통성은

또 다른 발효주인 와인도 마찬가지다.


vino, wino, вино, віно로

표기만 달라질 뿐,

모든 슬라브어에서 와인은 [비노]다.


난 예전에 슬라브어 [비노]가

라틴어와 같아서 라틴어에서 온 줄 알았는데,


슬라브어에 라틴어가 영향을 미친 건,

슬라브인들이 라틴어를 처음 만났을

7세기를 넘어서,


그리고 가톨릭 국가가 아닌 러시아의 언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건

17-18세기가 넘어서니,


슬라브인들이 이미 흩어진 상태였던

7세기 이전부터 동일했던 것 같은 이 단어가

슬라브인이 7세기 이후에나 접했을

라틴어에서 왔을 리 없어 보인다.


러시아어 вино[비노]는

알코올음료를 통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어서,

러시아 마트에 가면  

вино[비노]라고 쓰인 독립된 섹션이 있고,

거기에선 와인뿐 아니라

온갖 술을 판매한다.


그걸 처음 봤을 때도

와인을 특별히 많이 마시지도 않는 러시아인들이

괜히 뭔가 있어 보이려고,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를 쓰는 거거니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그러고 보니,

“와인”을 지시하는 단어는 슬라브어뿐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유럽어에서도

비슷하게 다들 v/w와 n가 들어 있다.


유럽에서 포도를 발효시킨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게,

아마도 유럽어가 

게르만어, 로망스어, 슬라브어 등으로

분화하기도 이전,


즉, 기원전 3000년 이전,

유럽인들이 원시 인도-유럽어로 이름 붙여진

공통 언어를 쓸 때인가 보다.


어렸을 때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포도주가 자주 나오는 게 매우 낯설었는데,


이제 보니,

지중해 연안뿐 아니라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오래전부터 자주 와인을 마셨던 것 같다.




한국어 “술”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이고,


그 형태적 유사성으로 봤을 때,

“물”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아서,


꽤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삶 속에

술이 있었을 것 같다.




한국어 “한잔 하다”,

영어 drunken

“술”이라는 말이 없어도,

술 한 잔이고, 술 취했다는 말인 것처럼,


슬라브어에서도 “마시다”는 말이

술을 마시다”라는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 “마신”이라는 의미의

пьянный는 “취한”이란 의미고,

Он выпил.(그가 마셨다)란 문장은

그가 술 많이 마셨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것을 마시기 전과 마신 후의 차이가 심하고,

많이 마신 것이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마실 거리라서,

아마도 여러 언어에서 그렇게 줄여서 사용하고,


“술”이라는 말이 없어도

“술 마신다”란 의미인 걸

그렇게 다들 찰떡 같이 알아듣나 보다.




4. 진실의 물


내가 아는 선생님 중에

In vino veritas [인 비노 베리타스]

즉 “와인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라틴어 문구를 즐겨 말하시는 분이 있었다.


그분이 아는 라틴어가 그거 하나인 건지,


아님 정말

“술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여기에서 굳이 vino, 즉 “와인”이라 표현한 것도,

와인이 가장 오래된 술로서,

술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인 거 같다.


아무튼 난 흔한 라틴어 문구 속

“술 속에 진실이 있다”는

그 명제의 진실성이 항상 의심스럽다.


개인적으로

취중진담의 진실성을 믿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배설한,

솔직함을 가장한 상대방의 불편한 말에

기분 나빴던 적이 여러 번 있었기도 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술 마셨을 때 한 말을

나중에 술 깨고 나서 뒤집는 경우도 많이 봤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 나는,

그런 걸 볼 때마다

술 먹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오히려 술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포함한

진짜 아무 말이나 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실된 말”의 화자나 청자,

즉 당사자가 아닌 그냥 관찰자로만 봐도,

술이 취한 사람의 몸짓이나 행동, 눈빛이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낀 적이 없다.


오히려 술로 인해 약해진 이성 때문에,

술에 의해 지배되는,

더 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술 취한 말은

그냥 흘려듣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술 속에 담긴 진실이라는 게

눈에, 귀에 그리고 마음에 안 들어온다.


그냥 술꾼들이 만들어낸,

“술을 마시는 백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라틴어라는 난해하고 럭셔리한 옷을 입고,

오랜 세월의 후광을 입어,


지적 열등감이나 허세를 가진 이들에게 잘 팔리는

“빈티지 명품 격언”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봐도 난 술 속에서 진실은 못 찾겠고,


그게 정말 진실이고, 진심이라면

진실은 술이 없어도 진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In omni veritas est.


즉 진실은 어떤 것 안에나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오렌지”라는 독일어에는 “사과”가 들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