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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oga Nov 09. 2020

왜 “오렌지”라는 독일어에는 “사과”가 들어 있나요?

(사진 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



1. “오렌지(Apfelsine) 속 사과(Apfel)


오렌지는 러시아어로 апельсин[아펠신]이다.


알파벳부터 배우는 초급러시아어 수업에서

그 단어가 나왔는데,


어떤 독문학 전공 신입생이,

그런 “하찮은” 질문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궁금했던 거라고,


독일어에서도 오렌지를

Apfelsine [압펠지너] 라고 하는데,


왜 오렌지라는 단어에

사과 Apfel[압펠]이 들어있냐고 물었다.




어, 정말?


그 친구 입장에서는 “하찮을”지 모를 그 질문이

난 너무 재밌었다.


난 오래전에 방학 인텐시브 독일어 특강 한달 듣고,

지금은 가끔 가다,

몇 달에 한 번씩

Duolingo에서 독일어를 해보곤 하는데,


그 Duolingo 독일어 문장에

오렌지가 Orange(n)이라고 나오길래,


오렌지는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다 orange인 줄 알았다.


아마 독일어엔 Apfelsine [압펠지너]도 있지만,

일상에서는 Orange[오랑쥐]를 더 많이 쓰나보다.




독일어에도 러시아어 апельсин[아펠신]과

비슷한 단어가 있다는 건,


유럽어들이 워낙 서로 비슷하기도 하고,


독일어 자체에서 오거나,


아님 서유럽에서 오다가 중간에 독일어를 거쳐

독일식 발음이나 조어의 영향을 받은 단어들이


러시아어에 워낙 많아서,


크게 놀랍진 않았는데,


“‘오렌지’라는 말 안에 ‘사과’라는 말이 들어있다”


라는 정보는 나도 신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궁금했던 걸

드디어 조심스럽게 나한테 물어본 게,


뭔가 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 같다는

주관적 느낌 때문에

좀 괜히 으쓱하기도 했다.


암튼 그래서 얼른 인터넷에서

러시아어 апельсин의 어원을 검색했다.




2. 어떤 오렌지는 “중국 사과”


러시아어 апельсин[아펠신]은

독일어와 지리적, 언어적으로 매우 가까운

네덜란드어 appelsien[아펠신]에서 나왔단다.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가

네덜란드에 좀 머물기도 했고,


그즈음 많은 네덜란드어가

러시아어에 유입되기도 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러시아에 오렌지가

Апельсин[아펠신]이라는 말과 함께

그 쯤 네덜란드에서 들어왔나 보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는

러시아와 네덜란드 사이에 눈에 띄는 교류가 없다.


네덜란드어에서

appelsien[아펠신]은 이제 옛날 표현이 됐고,


현대 네덜란드어에서는

sinaasappel[시나스아펠]이라고 하는데,


둘 다 -sien, sina-가 “중국”이라는 의미라,

중국 사과”라는 의미란다.




엉? 중국 사과?


오렌지는 서양 과일 아닌가?


그런데 찾아보니,

중국이 오렌지의 원산지 중 하나다.


중국에서 온 거면

왜 우리 조상들은 오렌지를 먹지 않았고, 


한국어에는 오렌지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나 한자어가 없는 걸까?




좀 더 생각해보면,


우선은 오렌지는 중국 중에서도 중국 남부에서

기원전에 첫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니,


전체적으로 그보다 위도가 높은 한국은

오렌지 재배에 적절한 기후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당시 수입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조상들은 오렌지를 먹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또 다른 하나,


중국어로 오렌지는 橙子[chéngzi]인데,

귤을 의미하는 橘子 [júzi]라는 단어로

불리기도 한다는 걸 보면,


오렌지를 재배하기 적절하지 않은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귤과 포멜로(pomelo)의 하이브리드로 만들어진

오렌지를

아마도 귤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어에서도

오렌지와 귤을 따로 구분하지 않아,


 “오렌지”란 단어가

한국 고유어는 물론이고 한자어로도

딱히 없는 것 같다.




3. “오렌지”의 다양한 이름들


중국 사과라는 의미의 

네덜란드어 appelsien[아펠신]을,

같은 게르만어족

독일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등이 공유하고,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

동슬라브어

20세기 구소련에 포함되었던 지역의 언어들에서

가져다 써서,


그 동네에는 “중국 사과”라는 의미의

[아펠신] 또는

그와 유사한 발음의 단어가 통용되는데,


다른 슬라브어에서는

전혀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고,


그 오렌지 유입 루트가

“오렌지”라는 단어 안에 들어 있다.




우선 유럽에 가장 먼저

오렌지를 들여온 나라 중 하나가

포르투갈이기 때문에,


남슬라브어 불가리아어, 마케도니아어에서는

인근 그리스어처럼

портокал[포르토칼]이라고 하고,




프랑스어 pomme (d’)orange[폼 오랑쥐]라는

표현을 음차하여 받아들인


서슬라브어 체코어 pomeranč[포메란치],

슬로바키아어 pomaranč[포마란치],

폴란드어 pomarańcza[포마란차],


남슬라브어

슬로베니아어 pomaranča[포마란차]에는


pom-과 -ran-이 들어 있고,




터키어를 통해

아랍어 표현 نارنج[nāranj]를 받아들인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어에서는

naranča[나란차]라고 부른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의 orange라는 말도

그 아랍어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하고,


스페인어에서도 naranja[나랑하]라고 부른다.




즉, 언어학적인 증거로만 본다면,


한국에서 뿐 아니라

대체로 위도가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슬라브 지역에서도


오렌지는 비교적 늦게,

슬라브어가 이미 서로 많이 달라진 이후에

서로 다른 루트로 받아들인거다.




덕분에

불가리아, 체코, 폴란드, 크로아티아 시장에 가서

오렌지를 사고 싶을 땐,


“오렌지가 뭐였지?”를 잠시 생각하거나,


오렌지 위에 적힌 글자를 살짝 커닝해야 한다.



사과”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면,

그냥 러시아어로 말해도

다 알아듣을텐데 말이다.




4. 과일 대표, 사과


“중국 사과”라는 의미의

네덜란드어 appelsien[아펠신]에서


“중국”은 그 원산지이고,


그럼 “사과”는 왜 들어가 있을까?


오렌지랑 사과 둘 다 새콤달콤하긴 하지만

맛이 전혀 다른데 말이다.


심지어 영어에서

apples and oranges

서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정도로

보통 사람들은 사과랑 오렌지를 다르다고 느낀다.




어떤 오렌지를 굳이 “사과”라는 단어로 표현한 건,

그 존재적 유사성과 무관하게,

사과라는 과일이 갖는 대표성 때문인 것 같다.


사과가 가진 그 대표성은

유럽어 곳곳에서 발견된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오렌지는

영어와 마차가지로 orange[오랑쥐]지만,

예전에는 pomme d’orange[폼 도랑쥐]

즉 “오렌지의 사과”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표현이

오렌지를 지칭하는

서슬라브어 단어들의 음차 대상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배웠던 프랑스어에서 신기했던 게,

프랑스어에서 감자

pomme de terre[폼 드 테르],

즉 “땅에서 나는 사과”라고 했던 거였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pomme은

“사과”뿐 아니라 “열매”이기도 하니,


pomme d’orange와 pomme de terre는

오렌지 열매”, “땅에서 나온 열매”라고

해석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보다 추상적 개념의 상위어(hypernym)가

보다 구체적 개념의 하위어(hyponym)가 되는 걸

언어학에서는

의미의 특수화(Specialization)라 하는데,


라틴어 pomun이 “열매”라는 의미였다는 걸 보면,


프랑스어 pomme

사과가 가진 열매로서의 대표성 때문에,

“열매”라는 상위 의미에서

“사과”라는 하위 의미로 특수화되어,


현대 프랑스어에서는

“사과”와 “열매”라는 의미가 공존하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영어에서는 스티비 원더의 노래 가사

You are the apple of my eyes”에서

“소중한 사람”을 의미하는 apple of one’s eyes

원래 “눈동자”라는 의미이고,


눈동자가 둥글기 때문에

appl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들었다.


러시아어를 비롯한 많은 슬라브어에서도

같은 이유로

안구”를 “눈 사과”라고 지칭한다.




둥근 게 많고 많은데,

그리고 열매가 많고 많은데,

굳이 왜 그걸 “사과”라고 불렀을까?


사과의 전 세계 산지를 찾아보니,

사과는 전 세계적으로 골고루,

매우 더운 곳과 매우 추운 곳을 빼면,

꽤 다양한 위도에서 재배된다.


즉, 사과는 매우 흔하고 보편적인 과일인 거다.


출처: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apple_production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여러 게르만어에서도 사과를 가리키는 단어가

영어 apple과 매우 유사하고,

슬라브어에서도 서로 매우 비슷하다.


즉, 이 언어들이 분화하기 전부터,

사과”를 의미하는 단어가,

그리고 사과 자체가

그 언어 사용자들의 삶 속에 존재했다는 의미다.




슬라브어에서는


러시아어 яблоко[야블로코],

벨라루스어 яблык[야블르익]

우크라이나어 яблуко[야블루코],

불가리아어 ябълка[야벌카],

폴란드어 jabłko [야브우코]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jablko[야블코]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어 jabuka[야부카],

마케도니아어 јаболко[야볼코]

슬로베니아어 jabolko[야볼코]로,


조금씩 다르지만,

jab l, 그리고 k

“사과”라는 표현 안에 들어있다.


아마 이 중 한 언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처음 보는 다른 슬라브어에서도

“사과”라는 단어는 단번에 알아차릴 거다.




슬라브어가 자신의 문자로 기록된 건 

9세기 후반부터이고,


슬라브인들은 우크라이나 부근에 거주하다가

그 일부가 좀 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7세기부터 유럽 역사에 조금씩 등장하였으니,


적어도 7세기 이전부터

슬라브인의 삶에 사과가 있었던 거다.




오랫동안 생활 속에 있었으니,

“사과”라는 단어가 들어간 표현도 많고,

속담도 꽤 있다.


러시아어만 해도


яблоку негде упасть(사과 하나 떨어질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яблоко от яблони недалеко падает (사과가 사과나무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를 많이 닮는다)


같은 표현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다른 슬라브어나 유럽어에서도

사과가 들어간 표현이 꽤 있다.




그와 달리 한국어 “사과[沙果]”는 한자어고,


능금”이라는 고유어가 있지만,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진 않는 데다가,


“사과”라는 단어가 들어간 표현 생각나는 게

딱히 없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아침 사과 금사과”,


어릴 때도

왜 하필 예쁜 게 사과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사과 같은 내 얼굴”이란 동요 가사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거고,


“남의 제사상에  놔라  놔라 한다.”

“감나무 밑에서  떨어지길 기다린다.”


같이

다른 과일 들어간 표현은 있는데 말이다.


목젖을 의미하는 “아담의 사과”나,

눈동자, 안구를 의미하는 “ 사과” 같이,


슬라브어를 비롯한 여러 유럽어에서 흔한,

사과가 들어간 어결합도

한국어에서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이런 걸로만 봐도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 사과는 오래된 과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사과가 본격적으로 널리 재배가 시작된 게 19-20세기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도 있다.)


그래도 과일 하면

계절에 상관 없이 무엇보다도 사과가 떠 오르니, 


그 대표성이라는 게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했는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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