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어 배우며 보낸 1달 체류기
난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다.
비록 물질적 보상을 받는 “일”은 아니지만,
러시아어와 슬라브어족의 언어들을 연구하는
언어학 전공자이기도 하다.
내가 단순히 러시아어 전공자가 아니라,
슬라브어를 연구한다고 말하는 건,
예전에 러시아어 말고
폴란드어, 체코어, 불가리아어를 배워서,
러시아어뿐 아니라
여러 슬라브어에서 나타나는 언어학적 현상들을
비교하는 학술연구도 하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은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또다른 슬라브어인 크로아티아어를 배우고 있고,
크로아티아에 온 지는 한달이 좀 넘었다.
내가 없는 능력을 억지로 짜내서
잘하지도 못하는 걸 마지못해 하는 건 아니고,
워낙 외국어 배우는 걸 좋아하고
또 좀 빨리 배우는 편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뭐
나에게 남다른 "특별한"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서
이렇게 여러 슬라브어를 배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영어 배운 후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등을 배운 사람은
다 느끼겠지만,
유럽어들은 서로 매우 비슷하다.
발생학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워낙 기본어휘와
문법 같은 언어구조가 비슷하기도 하고
수세기동안 같은 종교의 영향하에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엎치락뒤치락
서로 지배와 피지배적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왕가간의 정략 결혼으로 연대하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라틴어를 바탕으로 새 단어를 만들던 전통이 있어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이고 공식적인 어휘는
더더욱 비슷하기도 하다.
그 중에서 가장 비슷한 건
영어를 제외한
다른 게르만어족의 언어들인 것 같지만,
슬라브어족은 매우 늦게 분화가 되어서
그래도 유럽어 중에서도 매우 많이 비슷한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러시아어를 할 줄 알면
따로 안 배워도 자연스럽게
체코어를 이해하는 식으로
그렇게까지 비슷한 건 아니다.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는 그렇다.)
한 슬라브어를 아는 상태에서
다른 슬라브어를 배울 때도,
비슬라브어를 배울 때보다는 좀 적긴 하지만
그래도 따로 배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몇년 한국에서
바쁘고 고되지만 결실 없는 학기들을 보내다가,
나름 용기를 내어
자체적으로 한 학기 수업을 쉬기로 하고,
(비정규직이라 이건 매우 간단했다.)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좀 더 내가 더 좋아하고,
좀 더 내가 “진짜 나”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나의 두번째 직업적 정체성,
즉 좀 더 나은 내 현재와 미래 학술연구를 위해,
(어쩌면 이건 나중에 자연스럽게 첫번째 정체성, 즉
보다 좋은 선생이 되는 것에도 보탬이 될 지 모른다)
5번째 슬라브어를 배우러 크로아티아에 왔고,
이제 한달이 지났다.
나의 이런 평범하진 않은,
뭔가 있어보이는 행보가
이 바닥에서 뭐 특별히 무슨 스펙이 되거나
이력이나 경력이 되거나 하는건 아니다.
아마 내가 여기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실적이나 만들지
쓸데없이 허송세월 한다고 생각할
그 바닥 사람들이 아마 좀 있을거다.
그냥 좀 인생의 변화가 필요하고,
익숙한 것들에 지치고 영혼이 피폐해져서,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해서,
어차피 얼마 되진 않지만,
손에 쥔 거, 등에 짊어진 거 다 놓고 잠깐 떠나왔다.
크로아티아에 오래 머물게 된 이유를
얘기하려다 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크로아티아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는
다른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여기가 그냥 예쁜 휴양지이기만 한 줄 알았다.
여기 와서 크로아티아어도 배우면서
덤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도 좀 하면서 쉬는
“휴양”도 좀 해야겠다는 계산이 있었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가
예전에 “세르보크로아티아어”라 불리던,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보다 비슷한
방언에 가까운 언어들을 쓰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는 것만 고려한다면
나의 선택지는 그 4개 국가 모두여야했지만,
다른 나라들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그냥
크로아티아로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그거였다.
근데 그냥 관광할 때 겉모습만 보는 크로아티아와
오래 거주하게 되면서 속내를 알게 된
크로아티아가 좀 다르다.
물론 자연이건 인공물이건
겉모습이 예쁜 건
첫눈에도 소문에 듣던 그대로고,
좀 오래 있어봐도 역시 첫인상 그대로인데,
최근의 한국보다 공기도 훨씬 맑고,
물도 좋고,
치안도 안전하고,
살기도 편하고,
사람들도 대체로 친절하고,
물가는 예상보다 비싸지만,
그래도 한국보다 비싼 것 같진 않고,
그래서 여기 생활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고,
여기 있는게 좋고,
크로아티아가 아주 맘에 드는데,
이 안에 좀 살면서 보게 된 또 다른 모습인
행정시스템과 전반적인 공공 업무는
예상보다 더 딱딱하고 더 형식적이고
가끔은 이상하기까지도 하다.
뭔가 공식적 행정 시스템이 복잡하고,
계속 “서류”로, “종이”로 증명을 요구한다.
내가 여기서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오래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했던 “서류”는
Temporary Stay Permit(임시 거주 허가)로
번역되는 Privremeni boravak 이었다.
크로아티아는 쉥겐 가입국이 아니고,
한국인은 3개월간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다.
쉥겐국은 체류기간이 전부 합쳐서 계산되지만,
비쉥겐국은 입국일부터 계산되기 때문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예전에는 크로아티아에 3개월 머물고나서
다른 나라에 갔다가 다시 입국하면
다시 3개월 체류를 시작할 수 있어서
장기 체류 한국인들이 그렇게들 많이 했나보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그럴까 했었는데,
요새는 그렇게 나갔다 국경에서 잡혀서
재입국을 못하는 경우가 있단다.
이건 Kotra 국가 정보에도 나와 있다.
아마도 최근 유럽 난민 문제 때문에
크로아티아도 출입국 관리가 좀 더 엄격해졌나보다.
그건 원래 3개월만 허용하는 건데,
사람들이 다른 식으로 변용한 거니까,
크로아티아 정부가 그렇게 하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다른 EU 유럽 국가엔 거의 없는,
선뜻 이해 안가는 출입국 규정도 있다.
우선, 크로아티아에 입국한 비 EU 국적 외국인은
이틀 즉
48시간 내에 경찰서에 신고해야한다.
단기 거주 등록(SHORT-TERM STAY REGISTRATION)이라 불리는 제도다.
(크로아티아 외무부 관련 사이트)
일종의 외국인 거주 등록제도인데,
이런 식으로 국가가
모든 외국인의 거취를 관리감독하는거다.
아니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건 불가능하니,
관리감독하는 척 하는거다.
보통 크로아티아에 관광하러 온 외국인들은
그들이 머무는 호텔에서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이 부분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서,
크로아티아에서만 짧게 관광만 했다면
아마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거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거취가 크로아티아 경찰서에 신고된거다.
단기 관광객으로 호텔에 머무는 게 아니라,
만약 크로아티아 친구 집에 머물거나,
1-3개월 있을 예정으로 아파트를 빌렸다면,
거주 시작 후 이틀 안에
집주인과 함께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야한다.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 걸로 아는데,
러시아야 원래 폐쇄적이니까 그렇다치고,
EU 가입국이자
한국인에겐 알려진지 얼마 안 된 신생 관광지지만,
유럽인들에겐 오래전부터 유명한 관광지라,
예전부터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들어 온
그래서 보다 외부인에게 오픈된
유럽 전통의 관광지 크로아티아에
이런 제도가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더군다나 러시아도 거주 등록 기한이 7일인데,
크로아티아는 2일밖에 안 된다.
물론 그 절차나 필요한 서류는
크로아티아가 러시아보다 훨씬 더 간소하긴 하다.
크로아티아에선 그냥 여권과 여권 사본 들고
집주인이랑 가까운 경찰서에 가면 된다.
그리고 그 이상, 즉,
3개월 이상 1년 이하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려면
임시 거주 허가증(Temporary Stay Permit/Privremeni boravak)이 필요하다.
이건 일종의 학생비자, 상용비자 같은 거다.
내가 3개월 이상 거주했던 다른 나라가
러시아밖에 없어서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러시아에 무비자 기간 이상 머물기 위해
학생비자나 상용비자가 필요한 경우
러시아 입국전
한국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했다.
근데 그 비자발급 세부 적용 사항이 계속 바뀌어서
러시아어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에게
비자는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것에 비해 크로아티아 임시 거주 허가증(Temporary Stay Permit)은 발급받기 좀 더 편하다.
관련 서류만 있으면
크로아티아에 입국한 후 신청해서 받을 수 있다.
2018년 10월전
한국엔 크로아티아 대사관이 없어서,
만약 크로아티아 입국전에 발급받아야 했으면,
한국인들은 크로아티아 대사관이 있는
“가까운” 일본까지 갔어야 했을거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크로아티아 대사관이 거기다.
그런데 2018년 10월
주한 크로아티아 대사관이 생겼다)
크로아티아 외교부 홈페이지에 보면
EU 가입국 국민은
자국의 크로아티아 대사관/영사관에서
받을 수 있다고 써 있는데,
여기 온 다른 유럽 애들도
거의 크로아티아 와서 발급받는다.
하지만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크로아티아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들 자기나라에서 준비해온다.
크로아티아 외무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구비서류는 이렇게 5가지이고,
실제로 필요했던 것도 이렇게 다섯개였다.
인터넷에 보면 "가족관계증명서"나
"범죄경력증명서"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2018년 현재는 그건 필요 없다.
1. a colour 35x45 mm photo
2. a copy of a valid passport
3. evidence of health insurance
4. evidence of sufficient means of subsistence
5. evidence of the reason for temporary stay (e.g. marriage certificate, university enrolment confirmation or other proof based on purpose of intended stay).
3번 건강보험 증명은
한국에서 “유학생/장기여행자 보험” 들고
발급받은 영문 보험증서 제출하면 된다.
4번 충분한 물적 자원 증명은
한국의 은행에서 발급받은
영문 은행잔고증명서 제출하면 된다.
한국블로그에서
1달 2000쿠나(약 40만원 정도)로
6달이면 12000쿠나(약 240만원 정도)가
잔고로 들어있으면 된다고 쓴 걸 본적 있는데,
전작 크로아티아에서 나온 자료에선
그런 얘길 못봤다.
하지만 은행잔고증명서가 문제가 됐다는 글은
본적이 없으니,
은행잔고에 엄청난 액수가 필요한 건 아닌 것 같다.
5번 임시거주 이유 증명서는
취업, 학업, 결혼 등
3개월 이상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서류를 가지고 가면 된다.
2,3,4,5번 서류 모두 사본을 제출하지만,
대조를 위해 필요하니 원본도 준비는 해야한다.
그리고 이런 5개의 준비서류와 더불어
경찰서에 비치된 신청서에 빈칸을 채워
그것도 제출해야 한다.
영어와 크로아티아가 다 쓰여 있으니,
영어로 읽고 관련 내용을 영어로 쓰면 된다.
이제 이 서류들을 제출하고 접수하면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며칠 후에 전화하라고 일러준다.
난 셰어메이트 프랑스 애랑 같이 갔는데,
나에게는 10일 후에, 그 애에게는 2주일 후에
전화하라고 했다.
왜 그러는지 무슨 원칙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그레브 같은 경우는 시내에
자그레브 경찰청(Policijska uprava Zagrebačka)에 가서 이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
거긴 외국인 관련 업무 말고
자국인 관련 업무도 하는지,
외국인말고 크로아티아인들도 많고,
그들도 역시
사진이랑 서류사본을 제출할 일이 많은지
그 앞에는 사진 찍고, 복사하는 가게가 많이 있다.
근데 크로아티아 어느 도시에서건 흔히 만나는
“친절한 크로아티아인”은
이 경찰서 창구엔 거의 없어서,
(있긴 하지만 흔치는 않다)
외국인 혼자 가서 일처리 하긴 힘들기 때문에,
어차피 이틀안에 단기거주등록도 해야 하는 거,
보통 집주인이 도착 첫날, 혹은 둘째날
같이 이 곳에 가서
단기 거주 등록(Short-term stay registration)과
임시 거주 허가(Temporary Stay Permit)
신청을 함께 한다.
근데 “단기 거주 등록”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해주고,
“임시 거주 허가”는 10일~2주 후에
다시 연락해야 하는거다.
나는 10일후 전화해서 어디어디로 오라길래
거길 부랴부랴 갔더니 5번 서류가 불충분하다했다.
난 여기 대학교에서 크로아티아어를 배우기 때문에
그 등록증을 5번 서류로 제출했는데,
그 기간이 3개월보다 짧아서 문제가 됐다.
내가 첨 등록한 코스는 겨울 3주 인텐시브코스였고,
그 다음에 하는 4개월짜리 코스도
계속 등록할 생각이었는데,
그때는 아직 시작전이라 등록을 우선 3주만 한거다.
학교 등록을 좀 더 오래 해서
“3개월 이상 체류해야하는 이유”가 되면 된다고,
그거 증명하는 서류만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다시 와서 제출하면 된다고 해서,
그날 오후 은행에 다음 어학 코스 등록금 입금하고,
담날 학교에 등록하고 그 증명서 받아 “복사”하고,
다담날 아침 일찍 담당자를 만나러 갔다.
아침 8시부터 오후1시까지
외국인 면담 가능하다 써 있길래
크로아티어 수업 시작 전 8시에 갔는데,
담당자가 아직 안 왔다.
30-40분을 기다렸는데도 담당자가 안 온다.
내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게 불편했는지
동료가 장부에서 내 이름 확인하더니,
오후에 담당자가 전화할거란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 내 전화번호를 모르고,
수업 시작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아무래도 담당자 “직접” 만나서
이제 된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좀 더 앉아서 기다렸는데,
아마도 담당자가 많이 늦는지
이번에는 그 동료가 이제는
다음주에 전화하라며 어서 가란다.
성급한 내가 그날 2-3시간후 다시 전화하니,
드디어 통화가 된 담당자 왈,
아직 준비가 안됐으니
2주 후에 전화 다시 하란다.
그래서 2주후에 다시 전화했더니
역시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2-3일 후에 다시 전화하란다.
그리고 전화했더니
1주후에 다시 전화하란다.
뭐가 준비가 안된건지,
서류 하나만 내면 된다더니
그거 하는 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나 오래 걸리는지는 알 수 없다.
전화 걸 때마다 고압적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해서
허겁지겁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게 되는데다가,
왠지 그런 건 내부 원칙이라
그들이 외부에 설명해 줘야할 사항이
아닌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뭔가 갑자기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것 같다.
물론 러시아는
“직접”가서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는 분위기라
(아침 9시부터 오후 4-5시까지
두 명이 교대로 줄선 기록도 있다)
전화로 연락이 된다는 점에서
그래도 러시아보다는 낫긴하다.
아무래도 관료주의와 그 행정적 불편함에서
러시아를 이길 나라는 유럽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그것 때문에 계속 전화를 하다가,
어느날 결국 “준비가 됐다”고 해서,
670쿠나(약 12만원) 내고
증명사진도 제출하고
이제는 받나보다 했더니
그 임시거주증 찾으러 “또” 3주후에 오란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얼마나 걸리는지
얘기를 안해봤는데,
예전 수업에서 크로아티아 교포인 미국애는
이것땜에 8번을 경찰서에 가야했다고 하고,
나는 그거 받는데 2달이 걸리는거다.
그동안 나의 크로아티아어는 일취월장해서,
첨엔 영어로만 전화해야했던 내가
마지막엔 크로아티아어로만 담당자와
이야기하는 게 가능해졌다.
1달 있던 것치곤 크로아티아어 잘한다고 놀라길래,
“덕분이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괜히 심기 건드렸다가
“임시 거주 허가증” 못 받을까봐 참았다.
이런 관료주의가
20세기 공산주의 체제의 잔재인지,
그 이전 합스부르그 제국의 잔재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뿌리가 매우 깊어 보이고,
세상이 바뀌어도 이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내가 겪은
임시 거주 허가(Temporary Stay Permit)
발급 문제는 모든 외국인이 겪는 건 아니고,
아마 나도 5번 서류가 제대로 구비됐으면
큰 문제 없이 좀 더 일찍 진행되었을거다.
그리고 비자는 어떤 나라건 엄격하게 관리하니까,
또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리고 크로아티아는 1990년대 초반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전쟁을 했던,
최근의 국제적 갈등의 역사가 있기도 해서,
그러는 게 이해가 되긴 하는데,
다군다나 난 개인적으로
러시아에서 더 심한 것도 겪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가볍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데,
이걸 겪고 나서 가만히 보아하니,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유난히
“서류”를,
“종이”를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
그 경찰서 말고 다른 관공서나 은행 직원들과
크로아티아어 수업하는 학교 직원들은
하나같이 다 친절했고 일처리도 빠른 편인데,
이들도 그 친절한 표정과 응대,
빠른 손놀림과 함께 서류를 많이 요구하고,
또 증명서류를 많이 주기도 한다.
여기 크로아티아어 코스는 학기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학기마다” 새로 여권을 복사해서 제출해야한다.
여권은 신분확인을 위해 필요한 걸텐데,
이미 신분을 확인한 사람의 여권을
매번 그렇게 복사해서 제출해야 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고,
복사 말고 그냥 스캔해서 저장하는 게 여러모로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은데 말이다.
러시아도 서류를 좋아하지만 ,
매학기 여권을 복사해서 제출하라고 하지 않고
담당자가 직접 원본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직접 복사하는데,
크로아티아에선 여기저기서 사본을 요구해서
여권을 여러번 복사해서 제출해야한다.
한국에서 여권 사본을 두 개 가지고 왔는데,
한달 동안 그거 말고 2번을 추가로 더 복사했다.
즉 한달간 여권 사본을 서로 다른 기관에
4번이나 제출했다.
혹시나 또 필요할까봐
여권 복사 하나 해서 가지고 다니고 있다.
다른 EU가입 슬라브국가
폴란드, 체코, 불가리아에 몇주씩 있는 동안
여권을 따로 복사해서 제출한 기억이 없다.
여기서 오래 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관세청에서 발급하는 OIB라고
개인 확인 번호(Osobni Identifikacjiski Broj)가
필요한데,
어떤 곳에선 또 그걸 요구하기도 한다.
OIB를 발급받는 건 아주 간단하다.
자그레브에서는
두브로브니크 대로(Avenija Dubrovnik) 32번지에 있는 세무소(Porezna uprava)에 가서
구비된 신청서의 빈칸을 채우고
여권 사본을 내면
바로 그자리에서 바로 번호를 발급해서
그 번호가 적힌 A4종이를 준다.
아무나 가서 신청할 수 있고,
발급에 5분도 안 걸린다.
만약 그 번호를 잃어버리면 재발급도 가능하다.
근데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다들 주민등록번호 같은 고유번호가 있고,
외국인은 여권번호가 있는데,
왜 그런 번호를 따로 발급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발급받은 번호를 기억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번호를 확인할 때는 또
세무소에서 출력해준 형태로
“서류” 원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원본은 단지 이름과 OIB번호만 적혀있는
그냥 흔한 A4 용지 한 장일 뿐이다.
여기서 좀 더 살다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잉여적인 관료주의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 어학코스에 등록하면 학생증을 주고,
학교 도장이 찍힌 신청서를 하나 적어주는데,
그걸 가지고
ZET 즉 Zagrevačni Električni Tramwaj (자그레브 전기 트램) 사무소에 가면
사진이 들어간 할인 교통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그걸 매달 충전해서 쓰면 되는데,
그게 충전한 날부터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충전을 예를 들어 2월 20일날 해도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즉 특정한 달의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유효하다.
힌국의 대학처럼
그냥 학생증을 교통카드 겸용으로 만들면 될텐데,
그리고 체코 프라하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처럼
교통카드를 아무 날이나 충전한 날부터
한달간 쓸 수 있게 하면 될텐데,
그리고 사진은 어차피 스캔해서 저장하고
플라스틱 카드에 출력하니까,
폴란드 바르샤바처럼
스캔하고나서 다시 돌려주면 서로 편할텐데,
그 사진을 또 접수한 신청서에 붙여서
따로 보관한다.
아무튼 그래서 여기서 지낸 한달간
서로다른 기관에 증명사진도 4개나 제출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거 이제 1개 남았는데,
여기서 또 찍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아직 난 기차는 안 타봤는데,
시외버스를 탈 때 인터넷으로 티켓을 예매하면
그걸 또 출력해서 종이로 들고 가서 제출해야한다.
보통 시외버스 티켓의 인터넷 예매는
Get by bus나 Croatia bus 라는 인터넷 사이트나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에서 하는데
거기에 eco-ticket이라고 쓰인 티켓은
QR 코드가 찍혀 있어서
그냥 스맛폰에 저장한 pdf 파일만 보여줘도 되지만,
그게 아니면
보통은 종이로 출력해서 제출해야 한다.
인터넷 보면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누군가는 그냥 스마트폰만 보여줘도 됐고,
누군가는 결국 “버스에서 내려”
표를 종이로 출력했어야했다고 하던데,
아마 버스 검표원의 성향 차이도 있을거고,
그게 eco-ticket이 되는 버스인지 아닌지의
차이도 있었을거다.
한국에서는 고속버스 어플리케이션에서 결제하면,
그냥 승차하면서
그 바코드인지 QR코드인지를 찍으면 된다.
폴란드에선 기차는 그냥 결제하고나서
이메일로 받는 pdf의 QR코드만 있으면 됐었고,
시외버스는 그냥 접수 번호만 적어가면 됐다.
그렇다고 크로아티아가 인터넷 상황이 안 좋거나
WiFi가 잘 안터지는 것도 아니다.
어디가나 잘 된다.
심지어 통신사 가입하지 않아도 사용가능하다.
즉 돈 안 내도 스마트폰만 있음 쓸 수 있다.
그리고 시외버스, 극장, 휴대폰 요금 등
어디나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결제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결제 이후 “증명서”는 종이여야 하는거다.
극장은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고,
매표소에서 그 파일만 보여주면
입장권으로 바꿔주는데,
크로아티아 국립 극장 매표소 입구에
나처럼 스마트폰을 내미는 사람은 거의 없고,
관객의 나이가 많든 적든간에
거의 대부분 출력한 종이를 손에 들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왜 아직까지 이렇게 번거롭게
종이를 주고 받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지,
여기는 서류 파일을
손에 들고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또 신기한 건
집 앞 쓰레기통이 하나 있으면 그냥 “일반쓰레기”,
두 개 있으면 “일반쓰레기”와 “재활용 종이” 용이다.
그리고 도시 중간중간에,
“종이”, “유리”, “플라스틱”를 버리는
재활용 쓰레기통이 있는데,
거기서 가장 큰 게 “종이” 담는 통인 경우도 있다.
물론 종이가 가장 쉽게 모을 수 있고,
가장 쉽게 재활용되는 특성이 있긴 하지만,
커다란 종이 재활용통을 볼 때마다 난
사람들이 서류를 많이 요구하고,
서류를 많이 들고 다니기만 하는 게 아니고
서류를 버리기도 많이 하나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냥 종이뿐 아니라
돈도 “플라스틱 돈” 보다 “종이 돈”을 선호한다.
내가 몇 주 머물렀던 체코, 폴란드, 불가리아 모두
쉽게 카드로 결제가 가능하고,
러시아도 요새는 거의다
신용카드로 결제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크로아티아는
오프라인에서는 신용카드 별로 안 좋아하고
신용카드는 안 받는 곳도 많다.
그래도 자그레브에선 50쿠나(약 10000원)정도도
많은 곳에서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데,
(50쿠나 정도 될 때도
카드로 할 건지 현금으로 할 건지 묻는 편이다.)
관광지인 스플리트나 두브로브니크에선
카드로 결제 안되는 곳도 많고,
거기는 관광지라 물가 자체가 비싼데,
카드로 결제하면 카드사의 수수료와 별도로
자체적으로 수수료를 10프로 정도 더 얹어서
더 비싼 금액을 지불해야한다.
영수증에 보면 세금(porez)
즉 부가가치세가 25퍼센트라고 쓰여 있던데,
그것 땜에 그런가보다.
25퍼센트면 한국보다는 높은 수준이지만,
그래도 다른 EU 가입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그렇게 높은 수준이 아닐텐데,
세금에 그렇게 큰 거부감이 있다면
아마도 그돈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리라는,
정부가 그 돈을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데
쓸거라는 믿음이 없어서인 거 같다.
등록금과 집세 때문에
은행에서 송금을 여러번 했는데,
어떤 오래된 은행은 현금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또 어떤 생긴지 얼마 안된 후발 은행은
신용카드로도 송금액을 결제할 수 있다.
한국에서라면
아마 신용카드로 송금하진 못할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서 좀 유연하기도 하니,
어쩜 공공기관의 신용카드 사용은
더 확대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장소에선
종이 증명서와 종이돈이 요구된다.
왜들 이런건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형식을 이렇게 따져서 그런지,
한국처럼 사람들이 외모에도 신경 많이 쓰고
뭔가 “보여지는” 걸 중시하는 것 같다.
길거리 다니다보면 구석구석
“디자이너 패션 숍”이 많이 보이고,
사람들이 대체로 옷을 잘 입고 다닌다.
남자건 여자건 유행에 맞게
자기 몸에 적절히 피트되게 깔끔하게 입는 편이다.
그냥 편하게 헐렁한 트레이닝복만 입고
머리 헝클어져 다니는 사람은 거의 못봤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풀메이컵한 여자들도 많고
남자들도 옷매무새와 헤어스타일이 단정하다.
그리고 이건 얼마전 수업에서 들은건데,
여기는 Špica(슈피차)라는
흥미로운 문화적 현상이 있다.
Špica(슈피차)는
출퇴근 러시아워를 뜻하기도 하는데,
토요일 오전 10시에서 14시 쯤
사람들이 옷을 빼입고 치장하고
멋진 모습으로
중심가의 카페에 나와 앉아 있는단다.
그러면 또 파파라치 같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진을 찍는단다.
“러시아워”라는 의미의
“슈피차”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그런 걸 하는 사람이 많나보다.
구글에 zagreb spica를 검색하면
출퇴근 “러시아워” 사진은 없고
거의다 멋지게 빼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사진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고
내용도 철학도 없는건데,
책도 많이 읽고,
크로아티아 밖 세상에도 관심많고
또 많이 알기도 하는,
꽤나 지적인 것 같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그런 “겉보기뿐인” 문화적 현상이 있다는 게,
그리고 그걸 굳이
시간과 장소를 정해두고 하다는게
너무 신기하다.
그 얘기하면서 나랑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혹시 사진 찍히고 싶으면
그 시간에 멋지게 차려입고
중심가로 나가라고 했는데,
나는 관심도 없고 가능성도 없어보이니,
혹시라도 패션에 관심이 많고
남다른 외모의 소유자라면
멋지게 차려 입고 토요일 슈피차 시간에
자그레브 중심가에 가보길 바란다.
그게 그렇게 쉬울까 싶긴 하지만,
또 혹시 알겠는가,
특이한 것 좋아하는 파파라치에게 찍힐지.
물론 남의 눈에 신경 많이 쓰는
여기 사람들은 한국인들처럼
이러쿵저러쿵 남 이야기도
많이 하는 편인 것 같기 때문에,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는
너무 강한 인상을 남기진 않는 게 좋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