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멘탈을 다잡기 위해 떠난 퇴사자의 여행
"아 이제 정말 퇴사해야겠다."
2010년 여름, 운 좋게 대기업 통신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했던 나는 4년 여를 그 속에서 열심히, 게으름 부리다가, 또 열심히 일해오고 있던 터였다.
그토록 간절했던 취업이었지만, 역시 사람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 다르다 했던가.
사람, 일, 사람, 정치, 억울함, 스트레스, 나는 앞으로 계속 이렇게 일하며 살아야 할까,
오만가지 감정이 생겨나는 직장인 사춘기라던 3년 차를 힘겹게 넘겼는데.
퇴근했다가 밤 10시를 넘긴 시간에 급한 정산업무라며 회계팀으로 다시 불려 갔던 나는 결심했다.
언제나 싱글거리던 팀 막내였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기 내서 이제 다른 업무를 맡아서 해보고 싶다고 작은 저항을 해보았지만 조용히 묵살되었던 해였다.
쉬자, 그냥, 잠시 다른 거 해보자. 하기 싫은 일 하며 몸 아프고 스트레스받을 바에야.
다음 거취는 대학원. 몸도 마음도 상해 가고 있던 나의 도피처로는
싱그러운 학교가 최선일 것 같았다.
대학원 가서 MBA 하려고 해요. Full time MBA라서 부득이하게 퇴사해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웠어요, 안녕히-
대학원 입시는 10월부터. 나의 퇴사는 7월.
그동안 수없이 자주 들락거렸던 항공권 사이트에서 스페인행 티켓을 예약한 건 6월.
싫다는 말 거절하는 말 잘 못하는 나, 되는대로 일단 해보라-는 식으로 주어지는 일들, 여기선 다들 그렇게 살아 너만 힘든 줄 알아? 좀 참아봐.
아니요, 이제 나는 더 이상 참기 싫었다. 퇴사 생각을 스멀스멀할 때쯤 이미 내 마음은 여기를 떠나 있었다.
목적지는 스페인. 왜냐고? 그동안 너무나 동경해왔던 정열, 꿈, 자유 같은 스페인의 이미지 때문에. 스페인을 다녀오면 다시 열정이 생길 것만 같았다.
핀에어를 타고 춥디 추운 핀란드 헬싱키를 거쳐 마드리드에 도착.
마드리드는 세련된 슈트를 빼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잘 쓸어 넘긴 190cm짜리 모델의 느낌.
하지만 길게 정이 가지 않는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의 도시니까! 그렇다, 나는 이렇게 속이 좁은 바르샤 팬이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스페인 여행기를 열심히 써봐야지. 지금은 기억을 더듬은 포인트만 꺼내보는 거니까.
홀로 떠나려 했던 여행은, 다행히도(?) 대학교 방학을 맞이한 여동생과 함께 떠나게 되었다.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이 때는 심신이 지쳐있기도 했고, 누군가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느꼈기에
반짝거리는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기죽지 않고 둘이 다닐 수 있었지.
그중 톨레도는 뭐랄까, 화려하지 않지만 오랜 전통이 느껴지는, 온전한 중세의 느낌을 주는 그런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온 우리를 '자자 놀라지 말고, 이제 너네 스페인 왔잖아~ 적응해야지?' 하고 말 걸어주는 듯한.
베이지 색 지붕, 아기자기한 골목길. '그래도 우리 과거에 한가닥 했던 유럽이야!' 하며 위엄을 뽐내던 톨레도 대성당까지. 성당이 어찌나 넓고 엄숙하던지, 종교가 없는 나조차도 경외심을 품고 계속 천장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이후 스페인 크고 작은 도시들을 다니면서 성당 건물도 많이 보았지만, 톨레도 대성당만큼 인상 깊은 곳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 조우한 유럽 성당이어서 그런가-
차들이 제대로 다니기 힘들어 보이던 좁은 골목길들에서, 서울보다 훨씬 덜 압박적인 공기와 바닥에 닿아 눈부시게 산란하는 빛을 느끼면서, 이곳에 한 달 정도 진득이 머물면 참 예쁜 글이 탄생하겠다 싶었다.
하나씩 스페인을 드러내 보여주는 톨레도에서 내 마음은 완전히 적응.
회사에서 전화가 올까, 카톡이 오지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보고,
모바일 그룹웨어에 접속하며 메일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조금씩 나를 편안하게 해 주기 시작했다.
렌페를 타고 세비야역에 내리던 순간 공기를 후웁하고 들이마셨다. 으아, 숨이 쉬어지지가 않는다!!!
6월이라 그렇게 까지 덥지 않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던 우리는 세비야에 당도한 순간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에 완전히 압도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열의 안달루시아라더니, 여긴 사람들 체온도 40도 되나 싶을 정도.
해가 밤 9시 넘어서야 겨우 뉘엿뉘엿해지는 곳, 강철체력이라 자부하던 나도 오후 2시쯤 되면 흐물흐물 녹아
노천에 있는 바에서 샹그리아나 맥주로 목을 축여줘야 저녁까지 겨우 활동이 가능했다.
세비야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 플라멩코 공연장의 홍보물을 받았다.
때 마침 곧 시작이길래 망설임 없이 입장.
아름답고 팬시 하게 변형된 플라멩코의 이미지가 널리 보급된 터라
플라멩코 하면 굉장히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 꽃도 꽂은 섹시한 여자를 많이들 떠올리지만,
사실 플라멩코의 핵심 정서는 한(恨)이라고 한다. 집시의 한.
한인민박 아저씨가 설명해준 바를 예로 들어 말해보자면.
집시들이 떠돌다 한 마을에 정착해, 할머니와 손녀가 하루하루를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보내고 있을 때.
종교재판의 광기에 휩쓸려있던 당시 스페인의 군에 손녀가 붙잡혀 이단으로 몰리고 화형을 당하게 되는 장면을
할머니가 두 눈으로 목격한 그 순간, 그 순간의 분노와 슬픔, 한. 이게 플라멩코를 이루는 정서라나.
그래서 그런지 세비야와 그라나다에서 본 플라멩코는 그랬다.
수수한 옷차림의 여자와 남자 댄서의 비장함이 감도는 몸짓과 눈물을 흘리는 얼굴,
슬픔과 한이 느껴지는 노랫자락,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추면서 점차 감정이 격해지는 연주까지.
미디어의 이미지와 실제는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또 깨달았다.
플라멩코의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민족은 우리 한국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렇게 정리된 세비야의 기억? 강렬한 햇빛, 세비야 광장, 플라멩코.
안달루시아의 본색을 보여주는 뜨거운 도시.
말라가의 첫인상은 뭐랄까, 처음으로 스페인의 휴양지 왔다는 느낌.
초록, 파랑, 눈에 좋은 노골적인 자연의 원색을 보여주는 도시.
같은 남부지만 세비야보다 더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건, 아무래도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바다 낀 도시를 좋아한다.
서울보다 부산이 좋고, LA보다 샌프란시스코가 좋고, 토론토보다 밴쿠버가 좋은 그런 느낌이랄까.
말라가에서 코스타델솔을 따라 한두 시간 버스를 타고 가면
네르하, 프리힐리아나라는 아름다운 도시를 만날 수 있다.
코스타델솔(Costa del sol). 이름도 멋들어진다, 태양의 바다라니!
이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네르하의 발콘 데 에우로파(Balcon de Europa)에 당도하게 된다.
유럽의 발코니라니, 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이름인지!
하늘도 파랑, 바다도 파랑, 파랑파랑.
나직이 파랑 거리고 있다 보면
정말로 그 발음도 푸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발코니에서 만난 노부부는 손을 꼭 잡고
저 아래 바다를 한참을 내려다보신다.
언젠가 나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저렇게 손을 잡고
이 곳에 다시 오고 싶구나.
스페인에서 느꼈던 또 한 가지,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랑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공공장소에서 주위 시선 아랑곳 않고 뽀뽀하고 포옹하는 커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있다.
보고 있자면 뭐랄까, 꼴불견이라는 생각보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느낌?
나도 저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차마 수영복을 챙기지 못한 당일치기 나들이였던 탓에, 그저 멀찍이 서서 부러운 듯 바라만 볼뿐.
그런데 정말 행복이라는 감정은 전염성이 있나 보다,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나도 기분이 좋아지다니!
이건 파랑파랑 바다의 힘인가, 퇴사의 힘인가..
조금씩 사회생활로 다쳤던 멘탈이 완전히 회복되기 시작한 건 유럽의 발코니에 섰던 이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서울에서 힘겨웠던 그 순간에 스페인을 떠올렸던 건 순전히 FC바르셀로나, 메시 때문이었다.
비록 당시 월드컵 기간이라 선수들은 각자 흩어져 있고 경기도 없었던 터지만,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나서는 종교인 마냥 당연한 듯 캄프누로 향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 대부분 그랬겠지만) 나는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뭐 하나에 꽂히면 정신없이 빠지는 성격 탓에 해외축구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리그들 경기를 취미 삼아 봤지만, 그중에서도 메시의 플레이를 본 순간 그 충격이란!!
혹자는 말한다, 라리가는 바르샤와 레알이 독식하고 있어서 재미없다고, 반전이 없다고.
요즘은 아틀라티코 마드리드도 있고, 세비야, 비야레알, 빌바오, 말라가 등 잘하는 팀 많은데, 흠흠 아무튼.
스페인 마지막 도시는 바르셀로나로 정했고 나와 내 지갑은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더랬다.
스페인 남부 쪽으로 내려오면서 심심찮게 스페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르사와 메시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게 스페인 사람들과 나의 심리적 거리를 확 좁혀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캄프누에서 산 메시 유니폼을 너무 좋아서 시내에서도 입고 다녔더니,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친절함이 100배 더해지는 느낌?
바르셀로나에서 바르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서로 쳐다보며 느끼는 그 짜릿한 동질감이란!
현지에서 느낀 축구클럽 바르사는 단순한 축구팀이 아닌 카탈루냐의 자부심이었고 카탈루냐 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적인 존재였다.
그런 상황에서 메시는 메시아가 되고 메신이 된다, 메신-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또 다른 존재. 가우디.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19세기 사람이었음에도 그의 건축은 설계부터 친환경적이고 영리하다.
건물의 곡선을 용의 모습에서 따오고 뼈를 본떠 창을 설계하는 등 기괴하게도 보이고,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멀리서 보면 조화롭다.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등 그의 건축은 도심에서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던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다.
그렇게 가우디는 여전히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경제수단이 되고 있다.
내 머릿속에서는 뭐랄까, 가우디야말로 미학, 과학, 수학 모든 분야를 통달한 천재라는 느낌?
바르셀로나는 나중에 엘 클라시코 보러 다시 올 것이기에 약간의 아쉬움을 마음속에 남겨놓은 채,
그렇게 가뿐하게 여행을 마무리했다.
아쉬움 없이 사뿐히 떠나왔던 스페인.
서울로 돌아오니 아침마다 졸린 눈 비비며 일어나 출근할 필요도 없고,
머리 쥐어뜯어가며 고민해야 할 업무도 없었다.
안정적인 밥벌이를 떠나왔다는 불안감, 그래도 아직 젊으니 새로운 도전도 괜찮다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
조금 더 나 자신을 믿어보고 다른 세계를 겪어보자는 다짐.
이 모든 감정은, 스페인에서 보낸 나날들 속에서 나도 모르는 새 다잡아진 것 같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맞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