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가일 때 더욱 매력적인 후쿠오카
아주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곧 크리스마스고, 나는 어딘가로 너무 떠나고 싶었고, 마침 연차 하나가 남아 있었다.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겨우 2박 3일 정도. 가까운 곳, 한국보다 더 따뜻한 곳, 너무 낯설지는 않은 곳을 고르자. 자연스레 후쿠오카를 떠올렸고, 12/23~12/25 초 성수기에 운 좋게 저가 항공 티켓과 텐진 호텔을 건졌다. 크리스마스니까 오랜 친구와 가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고향에 있는 친구와 후쿠오카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훌쩍 나섰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도심은 정말로 가깝다. 국제선 터미널에서 국내선 터미널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 공항선을 타고서 2 정거장이면 하카타역이다. 텐진에 있는 우리 숙소에서 후쿠오카 공항까지 넉넉잡아 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짧은 일정의 여행자에게 후쿠오카는 정말 좋은 여행지다. 친구와 함께한 2박 3일 여행, 두고두고 이야기할 만한 좋은 추억이 또 하나 생겼다.
도착한 첫날, 바로 텐진의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서, 다자이후에 있는 텐만구로 갔다. 일본 여행하면서 신사를 굳이 들렀던 적은 없지만, 연말이기도 하고 후쿠오카에서 가장 유명한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라고 해서 가보고 싶었다. 우리는 교통 패스를 끊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숙소 근처의 니시테츠 후쿠오카 역에서 니시테츠 후츠카이치역으로 간 다음 거기서 다자이후로 가는 열차로 환승했다. 생각보다 간단. 지하철 요금이 성인 400엔이었던가, 텐진역에서 대략 30분 정도 걸린 듯하다.
다자이후역에만 내려도 일본 특유의 건물들과 가게 간판에서 그 분위기가 바로 느껴진다. 다자이후의 매화는 다른 지역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려, 이 곳은 매화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하철 안에도, 역 간판에도 매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사소한 디테일에 계속 감탄하게 된다.
역에서 조금 걸어 나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텐만구로 가는 골목이 있다. 텐만구는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입시철마다 합격을 기원하는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수능 철이 되면 절이며 교회에서 부모님들이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듯. 내가 방문했을 때도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는 모르나, 학생과 그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신에게 비는 의식(?)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연말이고 해서 내년도 운을 점쳐보고자 신사 안에 있는 오미쿠지도 뽑아 보았다. 결과는 ‘소길’. 일본 사람들은 신사에 가면 왕왕 운을 점치는 오미쿠지를 뽑아보는데, 운이 좋으면 가지고 나쁜 내용이 나오면 신사에 묶어놓고 흉을 떨쳐 버린다고 한다. 나는 ‘소길’로 만족하고 뽑은 종이를 고이 지갑에 넣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신사였다. 입시철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텐만구의 조용한 기운이 느껴져서 좋았다. 학문의 신께 인사드렸으니 조금은 총명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돌아서 나왔다.
텐만구 들어가는 골목 양쪽에 음식점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어,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하지만 일본 공산품 과자를 여기서 구매하는 건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관광지 특성상 그런 건지 몰라도 시내보다도 가격이 비쌌다.
다자이후로 향한 또 다른 이유는 콘셉트 스타벅스 때문이다. 나는 스타벅스를 정말 좋아하는데, 다자이후에는 일본 유명 건축가인 쿠마 겐고가 설계한 ‘자연소재를 이용한 전통과 현대의 융합’ 콘셉트의 스타벅스가 있다. 다자이후 역에서 텐만구로 가는 골목에 있는데 독특한 짜임의 목재 양식으로 되어있는 입구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입구에서 매장 내부까지 전통적인 목조 구조를 따른 인테리어를 보여주는데, 과연 그 느낌이 새로웠다.
또한, 일본 스타벅스라 하면, 계절 한정 메뉴를 빼놓을 수가 없다. 말차 화이트 초콜릿이라는 메뉴가 있었는데, 달달하고 쌉싸름한 것이 추운 날씨에 몸 녹이기 제격이었다. 기존 스타벅스의 녹차라테와는 차원이 다른 깊고 진한 맛이었다. 녹차 비린내가 날까 봐 일부러 에스프레소 샷 추가를 한 것도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참고로, 텐진 시내 스타벅스에서는 말차 화이트 초콜릿 프라푸치노를 마셨는데, 이것도 정말 맛있었다! 발이 너무 아파 들어간 스벅이었지만 이걸 마시고 나니 급속 당 충전이 되어 3시간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존 녹차라테와 다른 비결이 뭘까, 말차 드리즐을 뿌리던데, 이게 깊은 말차 맛을 내는 비장의 무기인가! 아무튼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열도 전체에 8개밖에 안 된다는 콘셉트 스타벅스를 찾아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다.
후쿠오카 시내에 쇼핑하기 좋은 지역은 텐진과 하카타, 두 역을 기준으로 펼쳐진다. 텐진에서 지하철 3 정거장만 가면 하카타. 그래서 짧은 일정에도 양쪽에 쇼핑하러 돌아다니는데 부담이 없다. 위 두 지역 위주로 하루 일정을 잡았다면 지하철 일일권(성인 620엔)을 추천. 교통비가 부담스러운 일본에서 맘껏 지하철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나는 쇼핑을 돈키호테 나카스 점과 텐진의 무인양품에서 몰아서 했다. 일본에는 드럭스토어가 골목마다 정말 많고 품목별로 약간씩 더 싼 곳들이 있으나, 나는 여행기간이 짧았으므로 의약품과 식료품은 돈키호테에서 한 번에 샀고, 무인양품에서도 구경하다 몇몇 먹을거리(?)를 샀다. (무인양품에 이렇게 먹을게 많은 줄 몰랐다!! 완전 신세계!)
텐진과 하카타 역 사이에 있는 나카스 카와바타 역에서 내려 바로 연결된 Gate’s7 건물의 2층으로 가면 돈키호테가 나온다. 세안제로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하게 판매되고 있는 퍼펙트 휩, 속 안 좋거나 술 먹어 숙취가 있을 때 먹으면 직빵인 카베진, 여드름 연고로 유명한 페어 아크네, 장미향이 솔솔 나는 장미 캔디, 말린 딸기를 화이트 초콜릿으로 감싼 과자, 과즙 가득 식감이 너무 좋은 코로로 젤리, 우유맛이 진한 녹차라테 분말, 동생이 좋아하는 구데타마 볼펜 등 이것저것 담다 보니 5400엔을 훌쩍 넘기고, 자연스레 면세 데스크로 가서 택스 프리 신청을 했다.
돈키호테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한글로도 면세 안내가 잘 나와있다. 구매 금액이 5400엔을 넘으면 면세 혜택을 볼 수 있으니, 꼭 여권/영수증을 챙겨서 가기를 추천! 단, 면세 혜택 받은 품목들은 일본 내에서 소비하지 않는 것이 규정이다. 지하철 일일권 찬스를 활용, 하카타에서 쇼핑한 것들은 텐진에 있는 숙소로 옮겨다 놓고 텐진 시내로 다시 구경을 하러 나갔다.
텐진에는 5층짜리 무인양품이 있다. 규모가 큰 만큼, 식사를 할 수 있는 무지 카페도 있고 층마다 여성복, 가구, 식료품, 문구, 화장품 등 무인양품이 자랑하는 심플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상품들로 꽉꽉 채워져 있다. 구경만 하러 들어갔다가, 버터 치킨 카레 누들, 얼그레이 티, 유자음료 분말, 딸기 화이트 초콜릿 과자 등 먹을걸 한 가득 집어왔다. 얼그레이 티는 지금도 마시고 있는데, 가격 대비 꽤나 훌륭한 맛이다. 의류, 화장품, 인테리어, 식재료 등 다양한 품목을 커버하고 있으니 한 번쯤 들러 구경해보기를 추천한다.
그 외 후쿠오카 라인 프렌즈 카페, 빅 카메라, 요도바시 카메라(전자제품, 사무용품, 장난감을 비롯 이것저것 다 파는데, 왜 가게 타이틀이 카메라인지는 아직도 의문)를 방문했었는데 여기 구경만 해도 시간이 훅훅 갔다. 짧은 기간 후쿠오카를 여행한다면, 텐진과 하카타를 집중 공략! 이 중에서도 반드시 방문할 쇼핑몰들을 미리 정하기를 추천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다른 나라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2박 3일 일정, 첫째 날 밤은 텐진 크리스마스 마켓, 둘째 날 밤에는 하카타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기로 생각을 해둔 터였다. 텐진역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멀리서도 텐진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는 사인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전구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12월 중순이 넘도록 크리스마스 느낌이 안 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는데, 그 오렌지 빛으로 반짝이는 풍경을 보는 순간 연말임이 실감이 나면서 마음이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광장 여기저기에 산타 동상과 크리스마스트리, 그리고 조그만 가게들이 있었고 따뜻한 와인과 맥주, 큐브 스테이크, 소시지, 커피 등 먹을거리를 팔고 있었다. 무대도 설치되어 가수가 노래를 불러주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와인을 마시고 있자니 날씨는 조금 추웠을지언정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사람들 모두 멋져 보이고 그랬다. 마치 크리스마스의 마법처럼. 처음 보는 다른 나라의 여행객들과도 함께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고, 여행 이야기를 묻고, 남은 기간도 좋은 여행 하기를 빌어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달까. 친구와 기분 좋게 재잘거리며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와,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야. 우리 정말 여기 오길 잘했어- 하며.
둘째 날 밤 갔던 하카타 크리스마스 마켓은 약간 분위기가 달랐다. 하카타 시티 앞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장식된 일루미네이션과 바글거리는 사람들. (어찌 보면 영등포 타임스퀘어 같은) 잘 꾸며진 도시의 전형적인 쇼핑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진 마켓처럼 사람들이 하하호호 모여 북적거리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크리스마스 시즌 대형 백화점에 사람들이 붐비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좀 더 크고 많은 가게가 있는 하카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나는 오히려 실망감을 느꼈다.
내가 맘 속에 그리고 있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조금 더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적어도 발 디딜틈은 있는, 누구와 어울려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그런 친근한 곳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레 우리는 하카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숙소 근처 야타이에서 라멘이라도 먹으려 했으나, 동네 야타이조차 줄을 서 있어 편의점 간식거리로 만족해야 했다!
2박 3일 일정 동안, 하도 많이 걸어 다녀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발이 욱신욱신 아팠다. 노천 온천에서 족욕이라도 할까 했지만,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그냥 러쉬에서 산 입욕제를 호텔 욕조에 풀어 족욕하는 것으로 만족. 친구와 잠옷 바지를 돌돌 걷어 올려 발을 담그고 오늘 먹은 것, 산 것, 본 것에 대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게 좋았다. 길게 줄을 늘어선 소문난 맛집 보다, 지나가다 그냥 들른 지하철 역 상가 식당의 스테이크 덮밥과 함바그 스테이크에 감동했고, 이런 사소한 것에 더 즐거웠다.
굳이 아주 낯선 곳을 찾지 않아도, 연말의 방방 뜨는 마음에는 가까운 여행지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후쿠오카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갈 때는 스타벅스에서 한정메뉴를 실컷 먹고, 유후인 료칸에 묵으며 온천도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