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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30. 2020

새벽의 택시운전사

나의 잃어버린 오지랖을 찾아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화장실 간다고 일어난 순간 명치와 가슴 부분에 통증이 느껴졌다. 뻐근하게 담이 걸린 듯한 불편한 느낌은 한두 시간 기다려도 지속되었고, 나는 결국 구부정한 자세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하필 동생도 부모님 댁에 가있는 상황이라 혼자 의사와 간호사의 문진에 답하는 것도, 응급실의 눈이 시리도록 하얀 시트 위에 누워있는 것도 너무 서글펐다.


 당연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나는 병원이 싫다. 그중에서도 공기가 묘하게 뜨거운 응급실은 더더욱 무섭다. 아픈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아픈 것 같고, 슬픈 말들을 내뱉는 환자와 보호자를 보고 있는 것도 괴롭다. 가만히 누워 하얀 천장을 보면서 시간이 어서 흐르고 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심전도, 피검사, 소변검사, 엑스레이. 검사가 이어졌고 링거를 연결해둔 굵은 주삿바늘에 팔이 뻐근하게 아프고, 보호자도 없어 한참 동안 담요도 받지 못한 이 상황이 너무도 슬퍼졌다. 담요는 없다며 추우면 이걸 덮으라고 간호사가 건네준 시트는 방금 건조를 끝낸 듯 아직도 뜨끈한 김이 남아 있었고, 그 온기는 묘하게 나는 조금 안심시켰다.


 여러 검사와 문진을 거친 결과, 다행히 내 몸에는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생리통 때문에 먹은 진통제 때문에 가슴 부위가 아픈 거였을 수 있다며 위염약을 처방받았다. 링거를 맞으며 두어 시간을 누워있다 보니 욱신거리던 가슴 통증도 조금씩 줄어들어 내 발로 어깨를 펴고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새벽녘에 대로에서 택시를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병원 앞으로 택시를 불렀다. 내 앞으로 배차되었다던 메시지를 받은 지 몇 분이 흘렀지만 눈 앞에 택시는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병원 밖을 향하는데 마침 내가 부른 택시가 딱 도착해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더 걷지 않고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빨려 들 듯 택시 문을 열고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퇴근하고 오시나 봐요?


 택시 기사님은 내가 야간 교대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간호사인 줄 아셨나 보다. 대답할 힘이 없어서 그렇다고 고개만 끄덕일까 하다가 왠지 말을 잇고 싶어 응급실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니, 어쩌다가 응급실을 갔어요. 이 새벽에.”


“위염이래요. 자려다가 너무 아파서 병원 왔어요.”


 뒷좌석에 앉아 10시 2시 방향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둔 채 운전대를 꼭 잡은 택시 기사님을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아빠 생각이 났다. 응급실에서 의사, 간호사와 병의 증상에 대한 이야기만 심각하고 건조하게 나누다 와서 그런지, 피곤했지만 나도 모르게 택시기사님에게 말을 걸고 싶어 졌다.


“일찍부터 일하시네요. 몇 시에 일어나셨어요?”


“허허, 나는 어제저녁 7시부터 일했어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들어갈 거요. 아침에 일어나서 운전대 잡고 저녁까지 일하면 나는 너무 졸리더라고. 그래서 그냥 저녁에 나와서 새벽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가서 한 4시간 자요. 점심 먹고 공원 같은데 좀 걷다가 또 조금 자고 저녁에 나오지.”


“안 피곤하세요?”


“피곤하면 이 일 못해요. 택시 모는 건 피곤하면 못하지. 서민들은 계속 일해야지요. 간밤에 계속 차 몰고 25만 원 벌었네.”


 택시 기사님의 목소리에서 생활의 고단함이 묻어났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곧은 에너지가 들어차 있는 듯했다. 기사님도 사람이 별로 없는 새벽 시간대에 줄곧 운전하면서 말을 나눌 상대가 없어 심심하셨던 걸까. 병원을 다녀와 축 쳐진 딸 벌 되는 여자애가 불쌍했던 건지 이야기를 이어 나가 주셨다.


 나는 요즘 택시를 타도 택시 기사님과 말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미 만사에 지쳐있기도 하고 낯선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싫었고, 내가 관심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피곤했다. 하지만 혼자 병원에서 느꼈던 차가운 외로움은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품은 생활의 에너지가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언어에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몇 번 동네에서 마주쳐 눈인사를 나눈 정도의 사이인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의 말에서는 주황빛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택시 운전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던 아저씨는 내 위염으로 화제를 돌리셨다.


“위가 안 좋을 때는 양배추를 먹는 게 좋아요. 즙으로 먹든지, 아니면 삶거나 전자레인지 돌려서 먹어도 좋지. 우리 딸도 위가 안 좋아서 내가 자주 그렇게 해주거든. 그리고 알로에도 좋아요. 알로에 이만큼 하면 3만 원이면 산단 말이지. 그리고 택배로도 배송이 되니까 얼마나 편해. 알로에를 사 가지고 잘 다듬어서 갈아서 마셔도 좋고. 그냥 먹어도 좋고. 암튼 알로에도 많이 좀 먹어봐요. 그러면 위 안 좋은 거는 많이 좋아지지. 염증이 있거나 하면 약을 먹어야 되겠지마는 민간요법으로도 많이 괜찮아질 수가 있거든.”


 어느새 아저씨는 본인이 아는 위에 좋은 온갖 민간요법을 나한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뭐였을까, 그 기분 좋은 오지랖은. 요즘의 나였으면 성의 없이 대충 네네 하다 택시 운전사가 말이 없어지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새벽의 택시 안에서 나는 어느새 아저씨가 말하는 민간요법 재료를 다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조금씩 새벽을 밝히는 빛이 트여오는 것을 보고, 택시에서도 조잘조잘 잘만 떠들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곧잘 인사하고, 아는 체를 하고, 발랄하게 말을 붙이던 나였는데 언제부턴가 혼자 고립되길 먼저 선택했다. 낯선 사람의 세계를 덥석 받아들이면서 얻을 수 있었던 몰랐던 이야기와 때때로 풍겨오는 경계심, 그리고 의외의 친절함들은 나를 생기 있고 용감하고 다정하게 만들어줬었다. 이른 새벽, 말하길 좋아하는 택시 운전사 아저씨를 만나 내가 나다웠을 때의 모습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다소 촐싹대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다시 그 모습을 찾아야겠다. 때로는 무례한 사람을 만나 상처 받을지도 모르지만, 다가와주길 바라는 누군가와 둥근 이야기를 나누고 에너지를 쌓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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