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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06. 2020

히가시노 게이고 따라 하다 망한 사연

어설퍼도 내 글을 쓰자

 나는 일본 대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 있는 그의 작품은 모조리 빌려 읽었다. 심지어 맘에 드는 작품은 두 번, 세 번도 읽었다. 책 읽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매년 여름이면 셜록홈스나 에르퀼 푸아로를 찾을 정도로 오락성 있는 추리소설을 특히 좋아했다. 히가시노의 작품은 살인사건을 다루는 추리소설들이 대부분이지만 범행의 선정성보다는 그 범행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사연이나 관계성에 집중하기 때문에, 기분 좋게 술술 읽혔고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히가시노는 다작하는 작가이고 호평받는 작품들이 많은데, 나는 특히 가가 형사 시리즈 팬이라 그가 등장하는 '졸업'부터 '기도의 막이 내릴 때'까지 모두 읽어 치웠다. 히가시노의 작품 속 그의 전매특허인 밀실 트릭을 보면서 어쩜 이런 창의적인 방식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고, 등장인물들을 촘촘히 연결하는 그의 스토리텔링 능력에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문예과를 전공한 문학가가 아니라, 공대를 졸업한 회사원이었다는 사실이다. 회사원이 이런 놀라운 작품들을 내다니! 그 감탄은 묘하게 내 맘속의 도전의식을 스멀스멀 불러일으켰다. 그래, 나도 추리 소설을 써보는 거야!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묘사는 차마 보지 못하는 나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고, 디즈니와 지브리 스튜디오, 슈퍼히어로물에 환장하는 어린이 감성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상상력 때문에 꽤나 하드보일드 한 누와르 장르의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책이나 영화, TV에서 본 작지만 충격적이었던 장면의 파편이 내 머릿속에서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재탄생하는 거다. 가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생각이 튀어 버리기도 한다. 그날도 그랬다. 혼자 끄적끄적 글을 써 본 지 몇 년이 되었으니, 이제 소설을 완성시켜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는 클수록 좋으니까 신춘문예를 목표로 해보는 거다! 회사 생활 이외의 목표가 생긴 것 만으로 내 심장은 쿵쾅거렸다. 1월 1일 신문에서 신춘문예 등단 작가로 내 이름이 오르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이런 의욕이면 좋은 소재만 찾으면 글이 술술 써 내려가질 것만 같았다. 공대생 히가시노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람!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영화나 책 속의 장면이 나에게 그런 힌트를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자고 일어났더니 간밤의 꿈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마치 영화 '부산행'의 좀비와 영화 '감기'에 나왔던 전염성 질병의 공포, 그리고 미국 시트콤 ‘프렌즈’가 버무려진 독특한 느낌이랄까. 꿈에서 본 공포감을 소재로 나는 글을 기획해서 써나갔다. 문제는 쓰다 보니 자꾸 히가시노에 얽매이게 되었다는 거다. 히가시노 게이고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히가시노였다면 주인공이 어느 지점에서 배신하도록 했을까. 그리고 그 계기는? 트릭은? 반전은? 글은 점점 내 생각의 선로에서 탈주해 히가시노에 집착하고 있었다. 사건이 이어지고 반전과 함께 얽히다 실타래가 한순간 탁 풀리는 그 카타르시스를 녹여내고 싶어서 글에 꾸밈과 수식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 설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만 신이 났다. 심지어 나는 히가시노 작품의 대부분을 다 읽은 후였으니, 제출일이 가까워진 날 완성된 내 글은 온갖 설정을 다 때려 넣은 잡탕 스튜 같았달까. 하지만 이미 지독한 히가시노 열병에 걸린 나에게 그런 게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중편 소설을 소중히 출력해 우체국에서 신문사로 보냈다. 인생 첫 신춘문예 도전이었다. 쓰다 멈추길 수십 번, 그래도 소설 하나를 완성해냈다는 뿌듯함도 잠시, 제출 후 안심이 되었기 때문인지 점점 글에 대한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차분히 앉아 여분으로 출력해 둔 응모작을 꺼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이 글을 위해 진한 다크 초콜릿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면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니 입맛도 마음도 씁쓸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평소 내 글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써서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도이자 매력인데, 내 응모작은 여러 가지 추리소설의 플롯이 섞인 블록버스터 쇼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내 글에는 공감할 여지도 탄성이 나올만한 창의력도 없었다. 그럴싸한 기성 작품을 모방한 습작으로 남았을 뿐. 이 글을 조금이나마 읽었을 심사위원들을 생각하니 창피해서 숨고 싶어 졌다. 나다운 것을 잃어버리고 엄한 걸 쫓다 보기 좋게 실패한 셈이다.


 신춘문예 웹사이트에 올라온 과거 당선작들을 모조리 읽어봤다. 이 글들은 천 번의 고민을 거쳐 한 단어 한 단어 자기 이야기를 꾹꾹 담아 눌러쓴 글이겠지. 히가시노 베끼기 급급했던 내 글과 다르게, 저마다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들을 읽으면서 결심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어야지, 따라 하지 말아야지, 유명한 작가의 설정이 탐나도 욕심내지 말아야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글은 이제 쓰지 말아야지. 조금은 어설퍼도 내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그런 소박하고 풋내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꾸준히 글을 쓰고, 내 글을 읽는 이와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경험이자 훌륭한 도약이니까.


내 어설펐던 첫 시도. 내 글들아, 올해는 더 힘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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