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8일 경기 관람)
발단은 노래 한 구절 때문이었다. ‘呼吸を止めて1秒、あなた真剣な目をしたから(호흡을 멈추고 1초, 당신은 진지한 눈을 했으니까)‘. 일본 야구 소재 애니메이션 ‘터치’의 주제가 ‘터치’. 투수가 숨을 참고 공을 던지는 순간을 묘사한 듯한 이 노래의 도입부에 이끌렸다.
롯데 자이언츠의 팬인 나는 올해 초, 웬일로 봄데(’ 봄‘에만 잘하는 롯’데‘) 이미지를 깨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나의 팀에 잔뜩 기대했다가, 아니나 다를까 원래 있던 순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현실이 시궁창이니 대신 찾게 되는 것은 야구 소재의 드라마, 애니메이션. 얼마 전에는 유튜브에서 전국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통칭 ’고시엔‘)을 보고 고교야구의 로망에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고시엔을 보러 갈까?‘ 싶었지만, 8월 중순에 효고현의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진행되는 고시엔의 살인적인 더위와 피 터지는 티켓 전쟁에 뛰어들 힘은 없었다. 노래 ‘터치‘를 들을때마다 야구장은 너무 가고 싶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일본 프로야구 직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장 빠르고 비용적으로도 부담이 덜한 방법을 찾다 보니 후쿠오카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경기를 보기로 했다.
왜 후쿠오카로 정했냐 하면. 인천에서 후쿠오카까지 가는 비행시간이 짧다는 점과 함께 후쿠오카 공항에서 시내인 하카타로 빠져나가는 시간이 짧다는 점(나리타 공항-도쿄시내까지 넥스를 타고 1시간 15분 걸리는데, 후쿠오카 공항-후쿠오카 시내까지는 고작 지하철 두 정거장이다), 하카타에서 야구장(페이페이 돔)까지도 가깝다는 점, 그리고 경기 티켓을 한국에서 미리 사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거기다 페이페이 돔이 돔구장이라서 한여름 더위에서 조금이나마 안전하다는 것도 중요했다. 이렇게 나는 7월 21일에 7월 27일 출발하는 후쿠오카 비행기 및 호텔, 경기 예매까지 완료하게 된다. 이렇게 급하게 정하는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7월 28일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이하 ‘소뱅’)’는 ‘치바 롯데 마린즈(이하 ‘롯데’)’와 3연전을 펼쳤다. 나는 7월 28일 오후 1시에 소뱅의 홈구장인 ‘페이페이 돔’ 투어를 하고, 오후 6시부터 진행되는 경기를 보는 계획을 세웠다. 소뱅 경기 표와 돔 투어 표는 한국에서도 대행업체를 통해서 미리 구매해 갈 수 있다. 특히나 내가 관람한 날을 포함, 소뱅-롯데 3연전은 ‘매의 제전’이라 불리는 특별한 경기였다(소뱅의 마스코트가 구단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매’다). 인기 있는 경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스페셜 이벤트를 마련하는 모양이었다. 특별한 것은 경기 관람하는 모든 팬들에게 에메랄드색 소뱅 유니폼을 나눠줬다는 것. 나는 뒤늦게 예약해서 외야석이었는데도 차별 없이 유니폼을 받을 수 있었다.
페이페이 돔 투어
경기 당일, 돔투어를 먼저 하기 위해 페이페이 돔으로 향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하고, 숙소를 나서 하카타역으로 향했다. 공항선을 타고 하카타역에서 6 정거장만 가면 토진마치역이다. 페이페이 돔에 가기 위해서는 여기서 내려서 900m가량을 걸어야 한다. 이 땡볕 더위에 900m… (가급적이면 택시를 타거나, 정거장이 더 가까운 버스 이동을 추천한다.) 정말이지 7월 후쿠오카의 강렬한 태양을 견디기 위해서는 양산이 필수고, 나 또한 양산을 준비해서 쓰고 다녔다. 그런데 여긴 바다 근처라 그런지,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양산을 잡고 서있기 힘들 지경. 하지만 덕분에 또 시원하기도 해서 그나마 버틸만했다. 한국에서 대행업체로부터 돔투어 바우처를 받아서 저장해 갔고, 실물 티켓은 페이페이 돔 바로 앞의 ‘보스 이조 후쿠오카’ 건물의 인포메이션에서 교환받을 수 있다. 바우처를 보여주니 바로 확인하고 투어 확인증과 선물을 주셨다. 선물은 뜯어보니 소뱅 부채와 비닐 백. (경기 보면서 둘 다 굉장히 유용하게 썼다.)
페이페이 돔 4번 출구 앞 코카콜라 동상 앞에서 대기했다. 시간에 맞춰서 가이드가 와서 우리를 돔 안으로 데려가 주시는데, 에어컨의 냉기가 확 느껴지면서 땀이 식었다. 돔구장 최고!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본인 절반, 한국인, 대만인, 중국인 같은 외국인 절반이었던 것 같다. 가이드 분이 우리를 인솔해 그라운드로 향했는데, 잔디가 깔려있다 보니 잔디를 해칠 수 있는 구두 같은 신발을 신으면 안 된다. 이건 바우처에도 사전 안내되어 있는 부분이라 그런지 우리 그룹에서 이슈 되는 부분은 없었다. 투어는 일본어로 진행되는데, 안내 브로슈어는 한국어판도 있고, 사실 설명보다는 눈으로 보는 게 더 중요한 투어라 일본어를 몰라도 크게 상관은 없을 듯하다. 다만 일본어를 할 줄 알면 이것저것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다.
돔 투어에 최대 장점은 바로 경기 전 몸 푸는 선수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선수들이 연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을 걸거나 플래시를 터뜨리는 등의 행동은 해서는 안된다. 프로 야구 선수들의 웜업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사진이나 영상 촬영은 괜찮다고 한다. 조용한 구장에서 보니 공이 배트에 ‘깡’하고 맞는 소리도, 빠르게 날아가는 공의 궤적도 놀라웠다.
영상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영상이 그 놀라움의 반도 못 담아내서 슬펐음. 선수들끼리 서로 북돋아주거나, 코치가 지도하는 소리도 생생하게 다 들렸다. 서로 ‘うまい!(잘한다)’ 해가면서 연습하는 거, 넘 멋졌음. 특히 포수 코치가 잡기 어려운 볼을 던지며 연습시키면서 포수들이 툴툴대니까 ‘できるじゃん、この野郎(할 수 있잖냐 이 자식아)!!’ 하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려서 다들 웃었다. 선수 웜업 관람 외에도 벤치에도 앉아 볼 수 있었고, 불펜도 들어가 봤다. ‘일본 야구 불펜들은 여기서 몸 풀고 대기한다는 거군’ 하고 한층 더 야구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벅찼다. 전략 유출을 막기 위해 창문도 없고, 감독이 불펜 중 컨디션 좋은 선수를 물색해 내기 위해 카메라가 달려있다고 하는 가이드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오늘 경기가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에서 사진도 맘껏 찍을 수 있게 해 주고, 무엇보다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투어였다.
투어를 마친 시각은 오후 2시. 원래는 근처에 있다는 모모치 해변이라도 들러볼까 했는데, 벌써부터 구장 앞에서 표를 구매하고 유니폼이며 굿즈를 사는 사람들의 열기에 휩쓸려 나도 미리 표를 찾고 경기 관람 준비를 하기로 했다. 경기 시작 3시간 30분 전부터 표를 찾을 수 있어서,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간 바우처를 들고 티켓 카운터 5로 향했다. 카운터에 대행업체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보고, 핸드폰에 저장한 바우처를 보여드리니 표를 내주셨다. 매의 제전 유니폼은 뒤쪽 천막에서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해 주셨음. 아니나 다를까, 천막 쪽에 유니폼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경기는 3시간도 더 남았는데. 심지어 평일이고(금요일이었음), 이렇게나 날이 더운데. 이곳 사람들의 야구 열정이란..
나도 10분 정도 기다려서 표를 보여주고 유니폼을 받았다. 매의 제전 유니폼은 매번 바뀌는데 이번에는 에메랄드 빛 유니폼이다. S, L, XL, XXL 사이즈가 있어서 고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상기된 얼굴로 유니폼을 받아가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너무도 다양했다. 어린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기분 좋게 웃고 떠들며 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오랜만에 야구장 직관을 하게 된 나도 점점 흥분되기 시작했다. 선수부터 모든 팬들이 민트색 유니폼을 입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일체감이 느껴지고. 역시 나는 어쩔 수 없는 팀 스포츠 팬이다.
경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근처를 찾아보다가 ‘마크 이즈 후쿠오카 모모치’라는 대형 쇼핑몰이 바로 지척에 있기에 그쪽으로 향했다. 너무 더워서 그늘과 에어컨이 필요했음. 유니폼을 차려입은 팬들이 연결통로를 통해 몰로 가길래 나도 그 틈에 섞였다. 몰을 찾은 고객들에다 야구팬들이 합류해서 그런지 쇼핑몰은 굉장히 붐볐다.
날이 더워서 입맛을 잃었지만 지금 뭐라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으로 푸드코트에 앉아 가라아게 정식을 먹었다. 푸드코트에도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지만 잠깐 앉아 있으면서 기운을 차리고 몰 구경을 했다. 나름 큰 쇼핑몰이어서 니코앤드, 디젤, GU 등 브랜드 매장들은 물론, 츠타야도 있었고, 스타벅스, 쟈니스 숍까지 있었다! 츠타야 안의 스타벅스에서 여름 한정이라는 복숭아 프라푸치노를 마셨다. 상큼 달달한 복숭아 과육이 느껴지고, 올려진 생크림도 복숭아 크림인 듯 상큼한 느낌. 당충전을 하고서 5시 즈음 다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vs 치바 롯데 마린즈
페이페이 돔은 수용 인원이 4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모스버거, 추로스 등 먹을거리가 굉장히 많았다. 나는 배가 부르기도 해서 물 한 병만 사다가 외야에 있는 좌석으로 향했다. 게이트 안내가 잘 되어있어서 찾기 어렵지 않았고, 게이트마다 직원분이 배치되어 있어서 뭐든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화장실도 꽤 널찍했고.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외야석은 등받이가 없다는 것! 등받이가 없고 좌석 간의 간격이 촘촘했다. 옆사람과 친밀감이 막 느껴짐 ㅋㅋㅋ 하지만 우리나라 유일한 돔 구장인 고척돔에 비하면, 좌석들의 경사도가 무난해서 괜찮았다. 그리고 돔 구장이라 에어컨이 나왔겠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이니 조금 더워진 감은 있었다. 그렇지만 야외에 비하면 훨씬 시원함. 맥주나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 시원한 걸 파는 직원분들이 계속 지나다니는데, 소위 말하는 '비어걸'들은 그 무거운 맥주통을 짊어지고 더운 날씨에 생글생글 웃으시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경기 관람 중 음식은 안 먹더라도, 물 한 통 정도는 반드시 챙겨갈 것!
신기했던 것은 한국에서는 원정팀에게도 응원단상을 주고, 3루 쪽은 자연스레 원정팀 팬들이 앉는데 이곳은 원정팀 팬 좌석이 현저히 적었다. 한 블록만 내어준 것 같았는데, 대충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전체 좌석의 60분의 1 정도. 그 좁은 한 구석에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는 치바 롯데 마린즈 팬들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치바-후쿠오카면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경남 같은 느낌이지 않나. 물론 후쿠오카에 사는 롯데 팬일 수도 있지만. 검은 유니폼을 맞춰 입고 전열을 정비하는 저들의 모습에서 의연함마저 느껴졌다. (당시 퍼시픽 리그 2위가 롯데, 3위가 소뱅이었다)
곧이어 6시가 다가오고 오프닝 준비를 하는데, 뭔가 요란하다. 조명이 암전 되더니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거기에 맞춰서 그라운드에서 도열을 하더니 레이저 조명이 난리가 나고 폭죽까지 터졌다. 아니, 패넌트레이스 경기 오프닝을 이렇게 하는 구단이 어딨나.. 과도한 팬서비스에 오타쿠인 나는 심장이 더 두근두근. 소뱅 구단이 돈이 많고,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더니 역시 돈 많은 구단 팬을 해야 좋은 거 많이 볼 수 있구나 싶었다.
곧이어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1회 초부터 롯데가 엄청나게 몰아붙였다. 1회만 해도 안타로만 5점 획득. 그에 비해 소뱅은 다소 답답한 경기운영을 했다. 최근 소뱅의 경기 성적이 좋지 않다더니, 소뱅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가 나온 것 같았는데 불안 불안했고(한국 롯데 팬의 트라우마..), 타선도 좀처럼 힘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소뱅이 시간이 지날수록 한 점, 두 점 따라잡았고 홈런까지 쳤다! 그리고 롯데가 다시 점수를 내서 도망가는 형국. 롯데에서도 홈런이 나왔다. 주고받는 공격 속에 행복해진 나. 아직 특별히 더 응원하는 일본 팀이 없어서 그런지 양 팀의 경기 내용 모두 흥미로웠다. 근데 치바 롯데 응원가가 한국 롯데 응원가와 유사해서, 약간 따라 부를 뻔했다. 가만히 롯데 응원단들을 지켜보는데, 저러다 탈진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질서 정연하고 격하게 움직이는 게 아닌가. 어디서 응원 단장들만 뽑아왔나, 끔찍한 응원 살육 머신(?)들만 모인 듯했다. 절대 기죽지 않고 선수들 못지않게 애쓰는 모습을 보니 ‘좀 내 스타일인걸’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어째서 나는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한국 롯데 자이언츠 영광의 시대를 겹쳐본 것일까 ㅋㅋㅋ 더 이상 롯데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경기는 결국 5:8로 소뱅의 패배로 끝났다. 소뱅이 이긴 날에는 날씨 요건이 괜찮으면 돔의 뚜껑을 열어서 불꽃놀이도 해준다던데, 아쉽게도 이 날은 승리의 여신이 롯데로 향했다.(경기 시작 전, 아이들의 응원 메시지가 전광판에 나왔는데 ‘오늘 불꽃놀이를 꼭 보고 싶습니다!’ 했던 꼬마야, 괜찮니?) 놀라웠던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팬들을 위해서 구단이 버스를 마련해 준다는 것. 하카타역과 텐진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마련해서 팬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도록 돕고 있었다. 물론 무료는 아니고 승차 비용은 내야 하지만, 여기서 역까지 또 어떻게 걸어가나 싶었는데. 팬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버스에 차례차례 올라탔다. 나 또한 하카타역 행 버스를 타야 했는데, 대형 버스들이 계속 공급(?) 되어서 팬들 줄이 쑥쑥 빠졌다. 시원한 버스에 타서 15분 정도 달렸을까, 하카타역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올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데리고 야구를 볼 수 있는 곳. 여기서 야구를 보는 사람들은 열정적인 서포터들은 물론, 직장인도 학생도 주부도 여행객들도 모두 함께 있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섞여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일본 야구는 저변이 넓다더니 그것은 야구를 하는 아이들도 많고, 야구장도 많고, 야구를 지원하는 자본도 많음은 물론,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는 의미인 듯하다.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연인끼리, 직장 동료끼리 혹은 나처럼 혼자 와서 모두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페이페이 돔에서 본 에메랄드 빛 물결은 아마도 오래도록 못 잊을 것 같다. 후쿠오카에서 시작을 열었으니, 일본 전국 돔투어를 해봐야겠다는 꿈이 생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