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을 머리에 떠올렸을 때 가장 크게 자리하는 것은 로마에 대한 동경이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얼마를 머물러도 모자랄 것 같은 그 유서 깊고 아름다운 도시. 조금이나마 더 로마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로마 워킹투어를 신청해두었다.
내가 신청한 것은 아침 8시에 스페인 광장에 모여서 트레비 분수, 판테온 신전 같은 로마의 가장 유명한 명소들을 걸어서 보는 워킹투어 코스. 전날 했던 바티칸 투어가 워낙 만족스러웠던지라, 이 날도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서며 기대감에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더랬다.
스페인 광장에 도착하니 투어에 참가하는 한국분들이 이미 많이 보였다. 약 20명가량이 한 조를 이루어 스페인 광장 계단에 옹기종기 앉아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이번 투어를 책임져주실 가이드분 또한 열정이 보통이 아닌 분이셨다. 때는 한창 날이 뜨거운 7월 후반, 정오만 넘어가도 길바닥이 태양빛에 득실득실 끓는 날들이었다. 오늘 2만 보만 걸으면 된다며 여러분 안심하세요, 하며 수신기를 나눠주시는데 오늘 하루 날 잡고 정말 많은 것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와 함께 체력 관리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불끈 들었다.
이 광장 어딘가에 오드리 헵번이 밟았던 계단, 기대었던 벽이 있겠지. 이른 아침부터 그녀 생각을 하며 흔적을 열심히 좇아본다. 휴대폰 사진 앨범 즐겨찾기 폴더에 꽤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는, 스페인 광장에서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나란히 마주 서 있는 사진을 보니 괜스레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인파가 많아도 정말 낭만적인 곳이야, 하고.
스페인 광장 일대는 과거, 유럽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유학 와서 많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미팅 장소였던 바빙턴 티룸 또한 그때 영국에서 유학 온 귀족 자제가 영국식 차문화를 즐기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발전한 곳으로 자식을 유학 보내고, 좋은 학군(?)이 생기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유서 있는 한 가문의 자제가 가져온 짐들이 마차 가득 광장을 메웠다 하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간다. 스페인 광장을 마주하고 명품거리도 지척에 있다. 여기가 바로 아이비리그요, 어퍼 이스트 사이드였겠구나.
좁은 골목들을 줄지어 걸어가며, 처음으로 도달한 곳은 산티냐시오 디 로욜라(Sant'Ignazio di loyola) 성당, 발을 내딛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천장화. 이 성당의 천장화는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의 커머셜에 나왔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푸른빛의 천장화를 물끄러미 올려보고 있는데, 성당 가운데 큰 거울이 놓여있다. 이 거울로 천장을 비춰서 천장화를 감상할 수도 있는데, 정말 이런 센스와 배려심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사실 이 성당의 이름 자체가 내겐 너무 낯설었는데, 이런 낯선 곳 조차 너무나도 아름다운 금빛 섬세한 풍경을 눈 앞 가득 선사해 주시니, 정말이지 로마 이 도시에는 감사의 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이다.
아직 이른 오전 시간이라, 트레비 분수에 당도했을 때는 비교적 여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실 트레비 분수는 바티칸 투어를 마쳤던 어제저녁에도 왔었는데, 찬란한 빛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트레비 분수는 과연 그 아름다움이 밤의 풍경과는 달랐다.
분수 가운데 대양의 신 오케아누스가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쪽 동상이 들고 있는 포도는 번영을, 오른쪽 동상이 들고 있는 뱀은 위생과 건강을, 트레비 분수 윗부분의 동상 네 개는 사계절을 상징한다. 이 곳에서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있는 법이 없는 것 같다. 다 뜻이 있어 그곳에 있는 느낌.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그 깊은 뜻들을 다 어찌 헤아리리오. 그저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감탄과 존경을 표하며 고개만 세차게 끄덕일 뿐이다.
이 곳에선 동전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던지는 자세의 정석은 트레비 분수를 등지고, 오른손에 동전을 쥔 채 왼쪽 어깨너머로 던지는 것. 한 번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두 번을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며, 세 번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세 번 던지는 것에는 또 비밀이 있는데, 과거 로마에서는 이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거의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이혼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우자와 이혼하고 싶어도 직접적인 단어를 쓰지 못했을 터, 그것을 소원이라 포장했다고. 그래서 세 번 동전을 던질 때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의 '소원'은 이혼, 즉 배우자/연인과 원만하게 헤어질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나.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이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과거 전쟁에 출전하는 남자와 그의 연인/가족들이 남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분수에 동전을 던진 것에서 기원했다고 하니, 이 동전 던지기는 아주 유서가 깊다고 하겠다.
조금 더 걸으니 눈앞에 판테온 신전이 나타난다. 로마는 이런 식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건축들이 별생각 없이 걷다 보면 슥-하고 나타난다. 대체 이 도시에는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널려있는 거야! 이 쯤되면 현실감각이 없어질 지경이다. 판테온 신전 안으로 입장하면 벽을 따라 흐르는 시선의 끝에 동그랗게 뻥 뚫린 천장이 맺힌다.
어쩜 저렇게 동~그랗게 천장을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 그 옛날에, 건축 천재들은 모두 로마에서 태어난 것일까. 비가 오는 날에도 뚫린 천장을 통해서 비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비밀은 신전 내에 촛불을 태우고 있어 바깥과 차이가 나게 따뜻한 실내 온도 때문이라고 하는데. 글쎄, 비 오는 날, 정말 비가 저 뚫린 천장으로 내려오지 않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그리고 판테온 신전은 신적인 존재들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바티칸에서 감탄해 마지않았던 천재 라파엘로도 함께 하고 있다. 안녕, 단발머리 천재 미중년 아저씨-하고 인사를 보내며 돌아서 나오는 길. 뒤 돌아보니 저 멋진 기둥들 위의 무늬들도 저마다 다르게 새겨져 있다. 아, 저 놀라운 디테일이란.
판테온 신전 인근에서는 자유시간이 조금 주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타짜도르 카페에 가서 판나를 얹은 에스프레소를 한 잔 하고. 광장 한 모퉁이에 자리한 젤라토 가게에서 쌀과 민트 맛을 골라 신나게 먹고 보니 배가 어느 정도 부르고 당 충전도 완료! 몇 천 걸음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다음 쫄래쫄래 가이드분을 쫓아간 곳은 나보나 광장. 로마에 수많은 광장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나보나 광장이 가장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강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폴로 광장이나 스페인 광장 등 다른 광장의 공기가 하늘색 같다면 나보나 광장은 레몬색 공기를 가진 것 같다는 생각. 일단 아름답다. 백번 말해 입 아프지마는. 세로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광장 가운데 위치한 분수도, 노천 레스토랑들도, 거리의 화가도, 음악가도, 벤치들, 그리고 그 벤치에 앉은 어디에서 왔을지 모를 사람들조차도 참 왜 이리 아름다운지. 나는 로마에 발 디딜 때부터 콩깍지가 씐 게 틀림없었다.
나보나 광장을 둘러보고 인근에 티셔츠, 파스타면, 올리브 오일, 과일 등을 파는 전통시장까지 살뜰히 설명해주신 가이드분은 더위에 지친 우리의 모습에, 무려 2시간의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허하였다. 몇 군데의 식당도 추천해주셨는데, 나는 아까 나보나 광장 근처의 산타루치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겠다 생각해둔 터였다. 산타루치아 식당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식사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처럼 혼자 투어에 참여한 여동생 한 명과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산타루치아 식당을 향하는데. 골목 하나하나 참 단아하고 아름답다. 내가 식사를 하러 가는 건지 꿈과 희망의 세계로 영화를 찍으러 가는 건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었다.
친구와 함께 식전주로 먼저 스프리츠를 시키고, 트뤼플 파스타와 랍스터 파스타를 주문했다. 살짝 달달하고 쌉싸름하며 시원한 스프리츠는 더운 여름날 최고의 음료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식사하면서 거의 매 끼 스프리츠를 곁들였던 것 같다. 트뤼플 파스타에는 정말 생트뤼플을 눈앞에서 아낌없이 슥삭슥삭 슬라이스 해서 얹어준다. 랍스터 파스타 또한 비리지 않고 랍스터 살이 부드럽고 맛있었다. 좋은 음식을 여유롭게, 멋진 풍경과 함께 먹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또 있나 싶다.
식사를 마치고는 다시 모여서, 캄피돌리오 광장 쪽으로 함께 이동했다. 어느덧 시간이 오후 3시를 넘어가고 땅은 지글지글 끓는데, 캄피돌리오 계단은 왜 이리도 많아 보이는지. 체력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느냐, 하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올라간다. 아니나 다를까 광장과,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다리의 아픔쯤은 또 망각되어 버리고 만다. 거의 모든 사이트마다 가이드분은 시청각 자료와 함께 정말 성심성의껏 설명을 해주시는데, 로마인 이야기 같은 책들을 좀 열심히 읽어보고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여행은 매번 여행지에 대해 더 공부하고, 알아보고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수반되는 것 같다. 지쳐서 흐물흐물 녹아버리려 하는 우리들을 위해 가이드분은 시원한 그늘 자리에서 카이사르 황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다. 몸은 힘들지언정 수신기를 손에 꼭 쥐게 된다.
슬슬 압도적으로 고전적인 건물들로 테마를 옮겨본다. 눈 앞에 펼쳐지는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장). 더운 날씨에 다들 지쳤고, 땡볕에 내리쬐는 포로 로마노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도저히 없다는 우리들을 위해 가이드분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설명을 이어나가신다. 본래 투어에서도 시간상, 그리고 건강상(?) 여름 워킹투어에 포로 로마노 안으로는 가급적 들어가지 않는단다(포로 로마노 쪽에는 마땅한 그늘이 없다!). 포로로마노는 천 년의 세월 동안 로마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다. 세월의 무상함이란. 얼마나 많은 성공과 실패와 배신의 이야기가 저 돌들 위로 펼쳐졌을까. 영원한 권력도 아군도 적도 없었을 테지. 건물들의 잔해 위로 로마 황제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포로로마노를 거쳐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콜로세움. 콜로세움이 잘 보이는 그늘막에 앉아 가이드분이 설명을 듣는다. 5년에 걸쳐 지었고, 2000년의 시간 동안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는 콜로세움. 오래된 건축을 위한 복원 작업도 매우 섬세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서졌으면 부서진대로, 기울어졌으면 기울어진 대로, 인위적인 힘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 자체로 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콜로세움 돌 하나하나를 쓸어내는 솔을 보니 그 크기가 칫솔모보다도 작다. 이래서야, 언제 다 청소하나 싶다가도 그렇지, 이게 이탈리아노 스타일이구나 싶다.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리는 대로. 하지만 본연의 가치를 잇는 자존심은 결코 바꾸지 않는다.
저 안에서 검투가 벌어질 때면 검투사들의 인기가 어찌나 높았는지, 그들의 땀을 모은 것을 향수처럼 팔았다고 한다. 때로는 황제가 재미 삼아 검투사의 목숨을 살릴지 죽일지 관중들의 환호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황제의 손짓 하나에 누군가는 살려달라, 누군가는 죽이자라고 외쳤을 테지. 그 아우성을 3시간 넘게 즐긴 황제도 있었다고 한다. 콜로세움은 얼마나 많은 죽음과 영광의 순간을 목도했을까. 그 역사의 순간들이 절로 상상된다.
로마에는 정말 많은 건축 유산들이 있고, 이들은 오래되었으며 지속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로마시의 예산으로는 이 많은 유적지들이 다 감당이 안될 터. 해결책은 바로 명품 브랜드들의 지원이었다. 전 세계 유수의 명품 브랜드들이 로마의 문화유산들을 유지 보수하고 청소하는데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트레비 분수에 대한 비용을 펜디에서 지원했고, 그 대가로 펜디는 유래 없는 '트레비 분수에서의 멋진 패션쇼'를 진행할 수 있었다. 펜디 의상을 입고 물 위를 걷는(사실 투명한 무대를 설치한 거지만) 모델들의 모습에 기업 이미지는 한층 높아졌을 것만은 확실하다. 이외에도 콜로세움 관리에는 토즈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 유적지와 자본주의가 긍정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로마노들은 로마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의 광장들은 늘 사람들이 몰려들 장소를 제공했고, 이 곳에서 사람들은 정치와 철학, 경제,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을 했을 것이다. 로마는 바로 이 로마의 시민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그들의 명확한 색깔과 정체성, 자존심이 합쳐진 아름다운 결과물이 아닐까. 내가 곧 로마고 로마가 나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완벽했던 로마에서의 나날들 속에서, 나는 항상 더 바라 왔던 것 같다. 바라면 더 나은 것을 보여주고, 거기서 더 바래도 항상 내 기대를 뛰어넘는 멋진 것들을 보여준 곳이기에.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꼭 다시 로마에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로마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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