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10일 간 머무를 생각이었기에, 애초에는 로마와 베네치아에서만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주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이 피렌체만은 빼놓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추천을 하는 터라 한 번 둘러나 볼까 하고 피렌체 행을 여행에 슬쩍 끼워 넣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1박이라도 피렌체에서 해볼걸, 하는 아쉬움을 잔뜩 남긴 방문이 되었지만.
미리 예약해간 이딸로 로마-피렌체 행을 아침 일찍 타고서 피렌체 역에 내렸다. 피렌체 두오모 쿠폴라, 조토의 종탑은 워낙에 인기가 많은 곳이라 미리 표를 예약해 뒀었다. 그렇지 않으면 몇 시간씩 기다리며 줄을 서야 할 것이기에. 첫인상은 로마와는 또 다른, 마치 빨강머리 앤에 나올 법한 붉은 벽돌 길의 느낌. 두오모 쿠폴라 입장시간을 오전 11시로 예약해 두었기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역에서 한 20분쯤 걸었을까, 두오모 성당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처음 보는 순간 그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것 같다. 로마에서 이미 건축의 정수를 충분히 느꼈기에, 피렌체는 좀 심심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던 나 자신이 머쓱해지는 순간. 도착한 시점에는 하늘이 좀 흐렸었는데, 그 흐린 하늘을 낭만적으로 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보다는 좀 여유 있게 도착해서 성당 앞쪽만 한번 가볍게 스윽 둘러보려고 했는데, 자꾸 바라보고 멈춰서 있게 되었다. 이러다간 두오모 쿠폴라 예약해놓은 입장 시간보다 늦을 것 같아 정신줄을 부여잡고 입장 줄을 찾아가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서인지 몇 번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제대로 된 줄을 찾을 수 있었다.
예약하면 메일로 티켓이 오는데 티켓들을 출력해서 입장하며 보여주어야 한다. 바코드가 있는 부분을 입장하면서 셀프로 찍고 들어가게 된다. 들어선 성당은 밖에서 보여준 위용보다는 다소 차분한 느낌. 워낙 화려한 성당 내부를 로마에서 보고 갔던지라, 역시 피렌체는 좀 청순한가 하며 앞으로 오를 400개가 넘는 계단을 호기롭게 바라보았다. 가방엔 생수병, 신발은 편한 운동화, 성당이기에 예를 갖추기 위해 입은 긴 카디건, 여기에 체력만 받쳐주면 모든 준비는 끝!
쿠폴라에 올라서는 계단은 생각보다 좁고 가파르다. 중간중간 안내원들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통행을 조절해 주기는 하지만, 이런 계단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의 속도에 방해되지 않게 적당히 눈치를 보며 오르다 보니 어라, 이 곳 천장화, 너무 아름다운데? 목을 확 꺾어야만 천장이 눈에 들어오는 구조이기에, 좀 모양새는 빠지겠지만 남 시선 신경 쓸 겨를 없이 입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뒤 줄줄이 따라오던 사람들도 다 같이 목을 꺾고 입을 벌리고 오 마이 갓, 어메이징을 외치고 있다. 계단 오르며 힘들었던 것도 잠시, 천장화를 바라보고 나니 이 쿠폴라에 오르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올지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만 더, 자 이제 진짜 하나만 더! 하며 계단 끝에 올라 머리를 쑥! 내미니 시원한 바람이 땀을 확 식혀준다. 우와-하며 바라본 하늘에 대한 감탄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눈 앞에 펼쳐진 오렌지색 피렌체의 풍경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왜 이곳에서 냉정과 열정사이의 아오이와 쥰세이가 만나기로 했는지, 너무나도 자연스레 납득이 되는 순간. 아오이와 쥰세이는 왜 하필 이 오르기도 힘든 쿠폴라에서 만나기로 한 걸까 계단 오르다 힘들어서 정 떨어지겠네-하고 투덜대었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세상을 넓게 봐야 한다.
저 멀리 보이는 너무 높지 않은 산과, 막 흐림을 걷어낸 쪽빛 하늘과, 둥실둥실 솜사탕을 잘 떼어다 예쁘게 붙여놓은 듯한 구름과, 땅의 나지막하고 붉은 지붕들이 이루는 조화는 로마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토의 종탑이 서서 중심을 잡아 주고 있으니, 부담스럽게 화려하지도, 너무 심심하지도 않은, 밸런스가 환상적인 풍경. 로마를 보고서는 헤라나 모니카 벨루치가 떠올랐다면, 피렌체에서는 아테나와 장쯔이가 떠올랐다고나 할까. 참 이상하게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의인화시키면 자꾸 여자들만 떠오른다.
사진은 눈 앞의 아름다움을 십 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했다. 아쉬움에 조금이라도 더 피렌체의 이 느낌을 담은 사진을 건지고 싶어 찰칵대 보았으나, 역시나 여기선 그냥 눈으로 충분히 보고 마음에 담아 가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이 예쁜 걸 지금 나만 보다니 하고 억울해하고 있자니, 옆에 나처럼 원통해하고 있는 한국인 같은 여자분이 눈에 띈다. 장비와 옷차림을 보아하니, 분명히 한국인이다. 혼자 여행 온 사람을 만나 반가워서 말을 걸었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고, 같이 점심까지 먹으러 가기로 했다! 나 홀로 여행은 가끔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주는 묘미가 있다.
피렌체는 스테이크가 유명하다고 해서, 스테이크를 먹으러 나섰다. 잘 구성된 시내 속을 걸으며 눈 앞에 들어온 레스토랑! 헤맬 것 없이 저기 가자 하고 들어가니, 친절한 웨이터의 안내와 메뉴 설명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스테이크에 샐러드, 맥주를 시켜 먹으면서 내가 정말 좋은 곳에 와있구나, 나는 정말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사실, 마법 같은 이탈리아에 발을 들이면서부터 순간순간의 행복에 감사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서는 유명하다는 질리 카페에 가서 샤케라토를 시원하게 한 잔-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예뻐서 사탕도 샀다. 마침, 도깨비 ost 였던 Lasse Lindh의 'Hush'가 흘러나오고, 지금 이 노래와 이 햇살과 이 사람들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을 잠깐 머물다 가는 나로서는 피렌체가 마법 같은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당일치기 여행으로 저녁 6시에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는 표를 예약해놨기에, 점심을 먹고 나서 어디를 갈까 고민했다. 우피치 미술관을 가기엔 표도 예약을 안 해놨고, 한 번 발 들이면 꽤 오랜 시간 머무르고 싶을 것 같은데.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진작 알아보지 못하고 당일치기로만 생각했던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 방식,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걷기를 선택했다.
로마에서 1일 2 젤라토를 하면서 젤라토를 손에서 흘러내리지 않게 먹을 수 있는 비법을 터득한 나는, 한 손에 젤라토를 들고서 피렌체 시내를 거닐었다. 베키오 다리의 그 화려한 귀금속들을 정신없이 구경했고, 20유로도 안 하는 조그만 가죽 가방과 안경집을 샀고, 광장의 회전목마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의 애완견과 놀아주었다. 이 곳에 오기 전에는 피렌체가 왜 좋아? 하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그냥 그 분위기가 좋아하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완전 납득. 요소 하나하나를 말해주기엔 너무 많기에 그냥 퉁 쳐서 '분위기'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사람들이 앞으로 피렌체가 왜 좋냐 물어보면 그냥, 그 분위기가 좋아하고 이야기할 것 같다.
피렌체의 야경도 끝내준다고 하던데, 다시 한번 머리를 쥐어뜯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역 쪽으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산타마리아 노벨라 약국이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향수 중 하나가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앙헬디피렌체(angel of Firenze)라서, 호기심에 발을 들여보았다. 가게인지, 미술관인지 모를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택스 리펀드와 한국보다 훨씬 싼 가격의 유혹에 빠져 화장품을 두어 개 사고 말았다. 역시 피렌체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다니까- 하고 스스로 합리화하고서. 피렌체 역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 이딸로를 기다리는데, 어라, 연착이다.
이탈리아에서 기차 연착은 종종 발생한다고 들었기에,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포기하고 역 안의 세포라와 서점을 구경했다. 서점 영문서적 코너에 셜록홈스가 있길래, 틈틈이 읽으러 한 권 샀다. 그리고 역 바닥에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역 바닥에 앉는다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이탈리에 와서는 에이 뭐 어때 하고 그냥 바닥에 철퍼덕 잘만 앉는다. 나만 앉는 게 아니라 여행자들이 다 나처럼 앉아 저마다 할 일을 하고 있다. 편하고 참 좋구먼- 하고 역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나를 태우러 왔다. 뭐, 로마로 갈수만 있다면야, 기차가 와준 게 어디야 하는 생각에 기차에 타서 꾸벅꾸벅 졸았는데, 기차 속도 자체도 연착이 되는 건지, 테르미니에 내린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 가까운 시간.
한 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3시간 가까이 걸려 온 것인데, 뭐 그럴 수 있지, 여기는 이탈리아인데 하고 생각하게 된다. 서울에서는 가져본 적 없는 마음의 여유가 이탈리아의 여행자가 되니 막 생기는 군. 어쩌면 기차에서 보는 풍경과 기차 안의 이탈리아 사람들 모습도 여행의 값진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었는지도 모른다. 연착 안내가 나오니 이게 말이 되냐며, 열차 직원을 가만 두지 않겠다며 투덜투덜 불평을 하지만 어느새 자기들끼리 모여 포커를 치거나 수다를 떨고, 정작 직원이 지나가니 안녕? 별일 없죠? 하고 넉살 좋게 인사하는 그런 사람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피렌체에 잠깐 머무르면서 이 청순하고 해사한 도시가 가진 프라이드가 느껴졌다. 막강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메디치가의 기반이 된 도시, 메디치 가의 지원에 뛰어난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도시. 장인의 향기가 물씬 나는 도시. 피렌체 역에서 내리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이 곳은 첫사랑의 이미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 때는 마음속에 강렬하게 불을 질렀고 이후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 생각나게 하는 그런 매력을 가진 곳. 다음 이탈리아에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피렌체에서 며칠을 머물러야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직 못 본 피렌체의 야경도 보아야 하고, 우피치 미술관도 가보고, 조토의 종탑에도 올라야 하니까. 모든 것이 예상 밖인, 그런 이탈리아, 그런 피렌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