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피렌체에서의 아름다운 여정을 마치고 테르미니 역에서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나의 베네치아행은 기차가 아닌 비행기였기 때문에. 사실 기차를 타면 네다섯 시간 만에 이탈리아 본 섬의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할 수 있지만, 굳이 내가 공항까지의 이동과 짐 검사와 항공 대기시간을 감안하고서라도 비행기를 고집했던 것은 로마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방향의 하늘에서 베네치아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행지들 중에서도 유독 극진하게, 유난스럽게 베네치아를 맞이하고 싶었던 나의 고집 때문이기도 했다. 그만큼 더 정성 들여 여행하겠다는 각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 본 섬의 숙소들의 경우 낡은 시설에 비해 비싼 가격, 그리고 캐리어와 짐을 끌고 다니기에 최악인 자갈길과 계단이 많은 골목들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가볍게 출발했지만 무거워질 나의 캐리어와 혼자 여행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메세트레 역 쪽에 숙소를 잡고 매일 버스를 타고 본섬 쪽으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짰다. 나중에 아주 심하게 후회하긴 했지만.
단거리 노선이라 이용객도 별로 없어 비행기 좌석의 절반은 빈 채로 이륙했다. 비행시간은 한 시간 가량. 계속 창에 코를 박고 두 눈 크게 뜨고 있는데, 저기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그맣게 보이는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귀여웠다. 저 땅을 밟을 수 있다니! 마치 완전 내 스타일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소개팅 직전의 시간처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살짝 아담하다 싶은 베네치아 공항에 내려 아, 이것이 베네치아의 햇살인가 하며 그 찬란한 눈부심에 눈을 찡긋거리며 공항버스를 기다렸다.
40여분을 달렸을까, 버스는 메스트레 역 근처에 정차했고 나는 대로변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했다. 안전하게 체인 호텔인 베스트웨스턴을 선택했는데, 로마에 비해 방은 넓었으나 시설이 좋게 말하면 클래식, 나쁘게 말하면 좀 촌티가 난다. 화장실이 이렇게나 넓고, 하얗고 파란 타일들을 정성스레 붙여놓은 거 하며, 커다란 욕조가 고집스레 한쪽 벽면 넓게 차지하고 있는 것 하며. 공간 활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서 화장실을 좁게 만들고 샤워부스만 넣어놓는 로마의 호텔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화장실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넓은 욕조가 있는 것도, 욕실이 어둡지 않게 햇살이 들어오는 창을 내놓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짐 속의 옷들만 가볍게 정리해놓고, 창문을 열어보니 구름이 신기하게 뭉쳐 있었다. 오늘은 가볍게 본섬을 둘러볼까나 하는 생각으로 선크림과 3단 우산만 챙겨 들고 나왔다. 호텔 옆 카페테리아에서 교통권을 판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72시간 권을 하나 샀고. 호텔 바로 앞에 본섬 쪽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 버스를 올라타고 카드를 센싱 하고서 대여섯 정거장 지났을까. 종점이 베네치아 본섬이라, 사람들이 다 우르르 내릴 때 함께 내렸다. 이곳이 베네치아의 중심인가! 하며 속으론 매우 신이 났지만, 너무 유난스러운 관광객처럼 보일까 최대한 절제하며 버스에서 내려 땅을 밟은 역사적인 순간. 만면에 떠오르는 미소와 벌름거리는 신난 콧구멍을 보면, 나는 누가 봐도 영락없이 베네치아 처음 온 한국 관광객이었을 거다.
가지고 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기에 나의 전매특허, 그냥 발길 닫는 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와 보기 전에 상상했던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 바다 낀 도시를 선호하는 나로서 베네치아는 아예 바다 위에 있는 셈이니 백 퍼센트 취향 저격이고, 거기에다 곤돌라의 낭만, 베네시안들의 자부심, 황홀한 가면무도회. 뭐 이 정도였다고나 할까. 나의 이런 허세 섞인 대책 없는 기대가 무색할 만큼, 이 오랜 역사를 품은 물의 도시는 상상 이상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로마에서는 내가 마치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 위풍당당한 노래들에 끌렸었지만, 이 곳에 오니 평소에는 듣지도 않는 사랑 노래들이 너무 좋게 들린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로마에서 적응을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괜찮았고, 바람이 불어와서인지 로마보다는 더 걷기 좋게, 하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이 아쉽지 않을 정도, 딱 그 정도로 더웠다. 초입에서부터 길가의 노점에는 조그만 가면이며, 예쁜 레이스 장식이며 기념품을 파는 곳들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다리 뒤에 올라서니 여행자들의 핫플레이스 산타루치아 역이 보였다. 다리 아래로 눈부신 햇살을 그래도 담아 반짝거리는 물길이 있고, 그 위를 곤돌라며 수상택시며 바포레토들이 수놓고 있는 그 모습에 의식이 잠시 교체되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워서 정신줄을 놓았다는 성의 없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나의 의식이 생크림이 되어서 베네치아라는 겉은 바삭 속은 촉촉 부드러운 바게트 빵에 살포시 얹혀 가는 느낌이랄까. 이 도시의 일부가 되고 싶은 그런 느낌. 아, 죽기 전에 이 곳에 와서 이 모습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라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생각을 하며 거닐고 있자니 인생이 너무 아름다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좋아 죽겠는 표정을 하고 생각 없이 걷는데, 이 좁은 골목들 사이에 신기하게 방향 표시는 또 어찌나 잘 되어있는지,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걷다 보니 산마르코 광장이다.
과연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만약 전 세계의 독재자고 이탈리아를 침공해서 베네치아까지 진군했는데 이 광장을 봤다면, 여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렸을 거다.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인 만큼, 사람이 득실득실한 건 그렇다 치는데. 놀랍게도 비둘기가 너무 많다! 심지어 호객꾼들이 비둘기 모이를 팔면서, 비둘기한테 밥 줘보라고 꼬시는데 새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정말 기겁할 노릇이다. 다행히 나는 숲 속의 친구들을 좋아하기에 비둘기가 달려들면, 어허, 저리 가라 하고 손을 휘휘 내젓는 노련함이 있었다. 하지만, 비둘기 공포증 사람들은, 산 마르코 광장에서 조심해야 할 것!
산마르코 광장에는 카페 플로리안을 비롯한 유서 깊은 카페들이 있다. 이 곳 카페들은 4중주 라이브 연주를 하면서 관광객들의 귀를 호강시켜 주는데, 300년 넘은 역사를 가졌다는 카페 플로리안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다른 카페들도 만만치 않았다. 어쩌다 보니 여행 내내 카페 플로리안만 빼고 다른 카페들에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는 자릿세 개념이 있어, 카페 내 좌석에서 마시는 것과 테이크 아웃하는 가격이 다르다. 카페 안과 테라스 좌석의 메뉴 가격도 다르다. 카페 좌석이 낭만적이지만, 이 곳은 어디에 걸터앉아도 분위기가 살아나는 베네치아라는 거. 더 많이 보고 싶은 마음에 에스프레소를 테이크 아웃해서 바다를 마주 보는 계단에 걸터앉아 킁킁 향을 맡다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어 보았다. 커피 한 모금에 이 곳 분위기 한 스푼 얹으니 이 순간이 그렇게 달콤 쌉쌀할 수가 없다.
프로페셔널한 연주자들은 그들의 규칙이 있어, 한 카페에서 연주를 시작하면 그 옆 카페는 연주를 쉰다. 음이 섞이니까 돌아가면서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연주자들은 휴식을 얻을 수 있고, 관광객들은 온전한 한 곡의 멋진 선율을 얻을 수 있다. 아름다운 연주를 들으며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카페 웨이터가 야외 테이블을 치운다. 뭐지, 브레이크 타임이 있나? 싶어 갸우뚱하고 있는데 웨이터가 나보고 저기 뒤쪽 하늘을 보란다. 그제야 고개를 휙 돌리니, 어두컴컴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근데, 그 구름의 모습이 그냥 비구름이 아니라 천장화 같다! 아무리 멋진 곳이어도, 비구름마저 그림처럼 보이면 반칙 아닌가? 하고 무릎에 힘이 풀리려는 찰나, 나는 우산이 있으니 괜찮아하고 가방에서 3단 우산을 꺼내 단단히 손에 쥐었다. 그리곤 황급히 실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느릿하게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빗줄기가 후드득후드득, 어라, 근데 빗줄기가 왜 이렇게 굵지? 3분도 채 안 되는 사이, 태풍급의 빗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평소 같았으면 운동화 다 젖네 하면서 투덜 되었을 이 상황에도 나는 베네치아의 마법에 걸려 허허, 역시 베네치아야 비도 화끈하게 쏟아붓는구먼! 하고 감탄하면서 버스 정류장 쪽 방향으로 걸었다. 비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운동화는 이미 다 젖어서 축축해졌고, 나의 연약한 3단 우산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다 싶을 무렵, 앞을 보니 피자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저기로 피신해서 저녁이나 먹어야겠다 하고 후다닥 뛰어가니 야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웨이터가 물에 젖은 생쥐꼴을 한 나를 보고 어휴, 베이비, 이 빗속을 어떻게 또 걸어왔어, 춥지 하며 우쭈쭈 안아준다. 나는 베이비가 아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동양인을 보면 일단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일단 배도 고프고 비를 맞아 추웠기에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디 보자, 메뉴판을 보니 오늘은 오일 파스타가 좋겠군 하고 파스타와 레드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춥지 않냐며 물기를 닦을 수건을 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모습에 또 감동. 따뜻한 파스타를 우물우물하고 있으니 창 밖에 내리는 빗줄기도 그림이다. 날이 조금만 덜 추웠으면 저 비를 맞으며 미친 아이처럼 뛰어다녀도 좋았으련만, 그러기엔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탓해본다.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비가 자주 오나요? 하고 물어보니, 최근에 갑자기 이런 식으로 쏟아붓는 비가 자주 있었단다. 그렇지, 이 곳은 섬이니 날씨가 변화무쌍하겠지. 그것도 매력이라 느끼며, 식사를 끝내고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켰다. 쌉쌀한 풍미가 입안 가득 메우고, 그 긴장감 있는 한 모금에 온몸에 다시 에너지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창 밖을 바라보니 빗줄기가 점점 잦아든다. 이제 다시 나가야겠다 싶어서 따뜻하게 식사를 대접해주었던 가게에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다들 나처럼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는지 골목은 다시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면서, 베네치아에서 비를 맞아서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맑을 테니. 나는 멋진 곳을 다른 날씨로 경험해 보는 게 좋다. 같은 장소라도 분위기가 달라져서 내가 느끼는 감정의 폭이 더 커지니까. 베네치아는 그 좁은 골목 사이에도 명품 가게가 많다. 비싼 글로벌 브랜드들과, 베네치아의 전통을 간직한 가면이나 유리공예 제품을 파는 가게들. 멋들어진 가면들을 파는 가게 앞에 서서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 어떤 서양인 가족이 있어 눈길이 갔다. 아빠는 배낭을 멨고 엄마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있다. 근데 아빠 손에 들린 저것은 유리로 된 와인잔? 비가 그친 골목에서 아빠와 엄마가 자리를 깔고 앉더니 아빠가 배낭 속에서 와인을 꺼내 그 자리에서 딴다. 유리잔에 와인을 채워 넣고 부부가 건배하는데 그 모습이 또 얼마나 멋진지. 유리잔과 와인병을 챙기는 게 수고스러웠을 텐데, 이런 사랑꾼들 같으니라고! 다른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가족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런 사랑을 보며 크는 딸은 또 얼마나 다정한 사람으로 자랄지. 길에서 저렇게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지만, 가볍게 와인 한 모금 머금고 밝은 웃음 짓는 가족의 모습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산타루치아 역 쪽으로 걸어오면서 과일을 파는 노점들을 발견해서 납작 복숭아 1kg을 샀다. 리커샵에서는 레몬이 들어간 술인 레몬 첼로와 짭조름한 감자칩을 득템. 베네치아에서 시간을 보내며 먹을 간식거리들을 사니, 마음이 또 한결 든든해졌다. 복숭아가 들어간 종이봉투를 안고서 버스를 탔다. 달큼한 복숭아 향을 맡으며 창문에 기대에 앉아 있자니 감이 온다. 나는 이 도시를 제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시간의 제한이 없었다면 몇 달이고 머물렀을 거다. 내일은 바포레토를 타 봐야지. 내일은 무라노 섬과 부라노 섬도 가봐야지. 그리고 산 마르코 광장에서 야경도 봐야지. 야무진 다짐들을 하고 얼른 내일 해가 뜨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