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위대하고 편안한 밴쿠버의 자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본래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여행을 가서도 마찬가지. 반짝이는 장식을 가득 단 채 디자이너 브랜드 세일을 하는 백화점, 향 좋은 커피에 예쁜 치즈케이크를 파는 카페,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을 파는 상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전망대와 섬세한 고전적 양식을 자랑하는 건축물들. 그런 것에 지갑을 열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 내 가치관이 밴쿠버에 와서 조금 바뀌었다. 항상 도시 속에서 일하느라 바빴고, 반짝이고 향기롭고 화려한 삶을 동경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올려다보면 하늘을 다 가릴 정도로 빽빽하고 높은 나무들이 내뿜는 공기를 마시고, 흘러가는 계곡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늘 귀에 꽂고 다니는 이어폰도 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새소리, 나무 사이로 솨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계곡 사이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잠깐 멈춰 설 줄 알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열심히 일한 나에게 내리는 보상은 늘 물질적인 거였는데, 가끔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멋진 자연 속에 나를 데려가 주는 것도 좋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그래서 밴쿠버가 더 소중한 것 같다. 물론, 밴쿠버가 자연만 있는 시골 같다는 소리는 아니다. 엄연히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도시니까. 그렇지만 오래도록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한 것은 정말 존경스럽다.
밴쿠버에는 유명한 현수교가 두 개 있다.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와 린 캐년 서스펜션 브리지. 전자는 세상에서 가장 긴 흔들 다리로 불린다. 2009년에 가봤었는데, 여러 포인트에서 도장을 찍게 되어있었고 그걸 다 모아서 마지막에 안내소에 가면 이 모든 탐험을 완수한 당신의 용기를 칭찬한다는 '용기 상장'을 줬었다. 그걸 받고 정말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성인 기준 40불에 육박하는 입장료가 함정이다. 그리고 전에 가본 적 있었으니, 이번에는 노스밴쿠버에 위치한 린 캐년 서스펜션 브릿지에 가보기로 했다.
린 캐년을 가려면 일단 seabus를 타고 노스밴쿠버로 가야 한다. waterfront 역에서 seabus를 타고서 내려서 Lonsdale quay(이하 론즈데일 키)에서 시장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고선 린 캐년으로 갈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seabus를 15분 정도 타면 노스밴쿠버에 도착한다.
내리고 나서 눈에 드는 것은 론즈데일 키 마켓! 신나게 구경하고 맛있는 점심을 여기서 해결하기로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바다를 마주한 밴쿠버에 있으니, 요리조리 둘러보아도 평화롭고 여유롭다.
시장 입구 한쪽 모퉁이에서는 형형색색의 팔찌와 머리끈들을 팔고 있다. 하나 살까 싶다가도, 밴쿠버에서 이런 것 볼 때마다 너무 자주 사서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돌아서고 그 돈으로 더 맛있는 걸 사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친다고,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시장들을 신나게 두 번이나 둘러보고 와놓고서 여기서도 또 넋 놓고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있다. 꽃집도 신기하고, 과일도 신기하고, 평소 눈길도 안 주던 주방용품조차 신기하다.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는데 두리번거리다 보니 피시 앤 칩스 가게가 눈에 띈다. 오늘은 저거다! 하는 생각에 메뉴를 더없이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구로 만든 피시 앤 칩스는 밴쿠버 와서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쉬림프 앤 칩스를 선택했다. 날도 따뜻하고 바다도 이쁘니 밖으로 포장해 나와서 먹기 시작한다. 혼자 앉아 먹어도 너무나 기분이 좋다! 맛있기도 하고.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린 캐년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나섰다. 어디, 오랜만에 밴쿠버 대자연 구경 한 번 하러 가볼까 하고.
론즈데일 키에서 228번 버스를 타고 Lynn valley@mountain hwy에서 내려, 227번으로 갈아탄 후 Peters rd@Duval rd에서 내려서 조금 걸으면 린 캐년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정확한 정거장 이름이 이제 맞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잘못 내릴 까 걱정된다면, 버스 타기 전에 버스기사님에게 린 캐년 공원 가려고 가는데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좋다. 내려야 할 역을 확인한 뒤 더블체크를 위해 기사님께 그 역에 도착하면 말씀해달라고 요청하면 친절히 응해주신다.
날도 좋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걷다 보니 공원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길 잃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샤라락 풀린다. 사실 그리 복잡하게 번화한 동네가 아니고, 도로도 쭉 뻗은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에 길을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다.
걷다 보니 드디어 마주한 공원 입구! 첫인상은 우와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가 정말 많다 였다. 몇백 년은 족히 그 자리에서 자란 것 같아 보이는 나무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있다. 사람들이 전망대를 만들려고 높이 쌓아 올리는 건축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 그 자체의 경이로움. 조금 걷다 보니 기대했던 서스펜션 브릿지가 나타난다.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 현수교에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밑이 출렁- 등골이 서늘해진다. 튼튼하겠지, 설마! 하는 생각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저 깊은 골짜기에 갈색곰들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 싶다. 이곳은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보다는 확실히 사람이 적다. 덕분에 더 여유롭게 조용하게 다닐 수 있었다.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 일부 장면들을 여기서 찍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 나무들은 CG가 아니었구나 싶다.
나 혼자서 슬렁슬렁 걷다가 아무 데나 앉아서 음악을 듣고, 멍하니 있어도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도시 잡음 없이, 주변 사람의 소리 없이 고요한 자연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또 언제 있었던가. 목에 카메라 매고서 요리조리 나무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 보니 탐험가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오면 저절로 치유받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닌가 싶다. 자꾸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와 비교하게 되는데, 그곳은 신기한 토템폴들도 이쁘게 꾸며져 있고, 기념품 가게도 귀엽고 중간중간 공연도 있어 북적거리고 관광지 같은 느낌이 든다면, 여기는 그냥 자연 그 자체에 가깝다. 내 옆을 사람이 지나가는 것보다, 청설모나 이름 모를 새나 한줄기 바람이 스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그런 곳. 재미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자연만으로도 압도되는 그런 곳.
나무가 울창한 덕에 해가 지면 더 빨리 어두워지기 때문에, 충분히 맑은 공기를 즐기다 너무 늦기 전에 공원을 나섰다. 더 오래 있다가는 정말 곰돌이를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무섭기도 했다. 다음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천천히 함께 걸어도 좋을 것 같은 린 캐년 공원이었다.
린 캐년 공원에서 숙소가 있는 예일타운으로 돌아와서는 또 다운타운 구경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다녔다.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서울생활을 하면서 지칠 때면, 밴쿠버가 더욱 그리워지곤 한다. 친구들은 세상에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갔던 곳을, 그것도 별로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밴쿠버를 자꾸 가려고 하냐고 묻는다.
뭐랄까, 밴쿠버를 다녀오고 나서 조금씩, 나는 명품 가죽 가방보다 에코백을 매는 게 자연스러워졌고, 대기업 간판에 대한 집착을 덜었으며, 짧은 치마에 구두보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자주 신게 되었다. 사람이 한순간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이래야만 해 하고 가지고 있던 나의 경직된 사고방식이 조금 유연해지고 여유도 생긴 그런 느낌. 밴쿠버는 그걸 깨닫게 해 준 곳이다.
꼭 보이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지금 정말 건강하고 행복하니? 하고 물어봐주는 그런 친구 같은 곳. 그래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곳, 영원히 머물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