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마신 독한 레몬첼로 탓인지, 베네치아의 기운이 나를 홀렸는지. 두근두근한 마음을 부여잡고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이불을 박차고 나와 샤워하고, 공들여 화장을 하고, 예쁜 옷도 꺼내 입고, 조식을 마시다시피 한 뒤 본섬으로 가는 버스를 탄 시각은 아침 8시. 오늘은 본섬에서 바포레토를 타고 무라노 섬과 부라노 섬을 가 볼 작정이었다. 베네치아는 본섬 이외에도 여러 섬들이 모여있고 수상 버스 개념인 바포레토를 이용해서 편하게 갈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려 산타루치아 역 쪽 바포레토 선착장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그래, 이토록 유명한 곳에 왔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고서 내가 타야 할 바포레토를 두 대 보내고, 세 대째 온 바포레토에 폴짝 올라탔다. 처음 타 본 바포레토에 감격하는 것도 잠시, 꾸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에 밀려서 구석에 몰려 서 있는 나의 꼴은 좀 처량했으나, 창밖 넘실거리는 파도와 본섬 테두리를 보기 좋게 돌아서 나가는 풍경에 금방 또 기분이 좋아졌다.
베네치아는 유리공예가 유명한데,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이 무라노 섬이다. 북적거리는 본섬보다 고즈넉한 느낌의 무라노 섬이 눈 앞에 다가오고, 발을 내딛으면서 생각 없이 시간제한도 없이 발 닫는 대로 돌아다니는 나의 탐험이 시작되었다. 길가에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정말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유리 작품들이 보이는데, 다섯 걸음 걷다가 멈추고 또 다섯 걸음 걷다가 멈추다 보니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선착장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가게마다의 특색을 담은 커다란 인테리어용 시계, 화병, 조명등 같은 것에서부터 아주 조그마한 장식품들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어떤 가게에서는 한 모퉁이에서 장인이 직접 불을 쏴 가면서 공예작품을 만드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었다! 그 앞에서 관광객들이 다닥다닥 붙어 오오-하는 감탄사를 방청객처럼 내뱉고 있으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장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품에만 집중했다. 역시, 오랜 세월 한 길을 걸은 이는 다르구먼! 하면서 존경의 박수를 건네고서는 사 갈만한 기념품이 없을지 계속 두리번거렸다. 유리 운송의 부담을 이겨내기에 나는 너무나도 파괴적인 사람이라, 조그만 목걸이와 유리공예 팔찌 하나를 사고서 만족해야 했다. 걷다 보면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들도 많이 보이는데, 가격은 비슷한 편이었던 것 같다.
무라노 섬을 걷다 보면 단순히 공예 상품뿐 아니라,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조형물도 마주치게 된다. 햇살을 받아 물결 방향대로 빛이 나는 바다와 함께, 정교하게 커팅된 유리와 크리스털이 빛을 내는 모습은 이 장면 그대로 캡처해서 머릿속에 저장하고 싶을 만큼 예뻤다. 태양이 없어진다면 이 순간을 하늘에 띄워놓으면 태양 빛 못지않게 세상을 빛낼 텐데 하는 만화 같은 생각을 해본다.
아까 산 목걸이를 하고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터벅터벅 걸었다. 눈과 마음이 호강하고 있지만, 그것이 고파오는 허기까지 막아주지는 못하는 법. 슬슬 바포레토 선착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부라노 섬으로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착장으로 향하다 보니 커다란 창고 앞에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뭐지 하고 다가가 보니 커다란 유리공장이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뜨거운 불을 마주하고 유리 공예들을 구워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드글대며 엿보면 신경 쓰일 법도 한데, 이런 생활이 익숙한 듯 땀을 뻘뻘 흘리며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이 섬이 이토록 유명해지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에는 다 이런 사람들의 노력이 기반이 된 거겠지.
선착장 근처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 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친절한 웨이터가 가져다준 메뉴판을 보니, 오늘은 카프레제 샐러드가 끌린다. 신선한 토마토와 쫄깃한 모차렐라 치즈의 조합. 오늘 분위기에 맞는 메뉴는 딱 이거군! 하며 카프레제 샐러드와 스프릿츠를 한 잔 시켰다.
스프릿츠는 이탈리아에서 많이 마시는, 와인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인데, 로마에서부터 식사를 할 때면 항상 스프릿츠를 시켜서 마셨다. 가게마다 맛이 조금씩 다른 것도 재밌고, 여름 더위에 시원한 스프릿츠만큼 좋은 식전주가 없다. 이 가게에서 내 온 스프릿츠에는 특이하게 올리브가 들어가 있었다. 마티니를 즐기는 007 같은 마음으로 한 모금 들이키는데, 어라, 지금까지 마셔본 스프릿츠 중 가장 맛이 좋다. 첫맛은 가벼우면서 쌉싸름하고, 끝 맛은 적당히 달짝지근하니 발란스가 부담스럽지 않게 참 잘 잡혔다. 그 덕에 행복 지수는 두 배로 업. 바다 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샐러드와 스프릿츠로 기분 좋은 식사를 하고, 부라노 섬으로 가는 바포레토를 탔다. 앨버트로스 마냥 커다란 갈매기가 바포레토를 따라다니는 꼴이, 마치 이 배를 지키는 수호신은 나다! 하는 것처럼 보여 괜스레 웃음이 났다.
무라노가 유리공예의 성지라면, 부라노의 전매특허는 레이스와 알록달록한 집이 늘어선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부라노는 또 부라노대로 이쁘구먼! 하고서 섬에 내리고 보니, 베네치아는 섬마다 '너는 이거 특화해'하고 지정해주기라도 한 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쩜 이리 섬들마다 특기와 매력이 다채로운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이탈리아 사람처럼 생긴 이에게 왜 부라노는 레이스가 유명하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아주 옛날 이 곳의 어부가 쳐놓은 그물에 인어가 걸렸는데, 인어가 안쓰러웠던 어부는 인어를 그물에서 풀어주고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보답으로 인어가 그 그물을 예쁘게 엮어 어부에게 선물해 준 것이 레이스 공예의 시초라나. 그 레이스가 너무나도 예뻐 이 섬의 여자들이 따라서 만들다 보니 부라노는 레이스 공예로 유명한 섬이 되었단다. 뭐여, 나 외국인이라고 이런 식으로 사기 치는가? 하고 따져 들기엔 그 아저씨의 진지하고 자부심 넘치는 표정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 뭐 그런가 보다, 우리나라도 호랑이와 곰돌이가 나오는 신화가 있으니까.
어깨에 두르는 숄부터, 부채, 앞치마, 티셔츠, 아기 옷 등등 참 예쁜 레이스들이 많다. 하나 사갈까? 싶어 살펴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다. 다 정성 들여 만든 수제품이라 그런가. 무라노에서 유리공예는 너무 커서 못 샀는데, 이 곳의 레이스는 너무 비싸서 못 사는구나 흑흑하고 돌아서서 보니 눈앞에 펼쳐진 알록달록한 집들의 풍경이 또 일품이다. 그래, 사진이라도 많이 찍자 하는 생각에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이 섬의 집들을 알록달록하게 꾸몄는지, 비슷한 색깔의 집이 하나도 없다. 아이유가 뮤직비디오를 여기 배경으로 찍었다더니, 과연 그럴만했군 싶다.
현지 주민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먼발치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여기저기 그냥 막 찍어도 카메라에 담기는 모습은 이쁘다. 그러나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 못했다. 걷고 있자니 어느 집 앞에서 그물을 말려놓고 있는데 그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물끄러미 그물을 보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로 봐선, 그냥 사람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애였던 것 같다. 얘, 넌 정말 좋은 곳에 사는구나, 여기서 생선은 마음껏 먹을 수 있니? 하고 물으며 옆에 쭈그리고 앉으니 날 참 한심하게 쳐다본다. 뻘쭘해지는 마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걷는데, 아주 빨간 집이 눈앞에 딱 나타났다. 저마다의 색깔을 가진 집들이 참 많았지만, 나는 이 빨간 집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여기서 살게 된다면 나는 저런 식으로 내 집을 칠해봐야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정말 이쁜 곳이었다.
선착장에서 다시 본섬으로 돌아가는 바포레토를 탔다. 꿀렁꿀렁하는 배 위에 있는 게 재밌기도 하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색달라서 그런지, 바포레토를 타고 있는 순간도 단순히 이동시간이라기보다 베네치아를 즐기는 순간으로 남았다. 무라노와 부라노는 작은 섬이고, 볼거리가 아주 많이 있는 편은 아니라서 여유 있게 둘러보고 왔는데도, 본섬에 도착해보니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었다.
로마에서 만났던 친구 일행이 베네치아에 왔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베네치아의 저녁을 만끽했다. 여름이라 해는 아주 천천히 떨어지고 저녁에 먹은 스프리츠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향해 있는 어느 계단에 앉아 있자니,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에 나왔던 캡틴 잭 스패로가 된 기분이었다. 온 세상이 다 내 것인 거 같은 느낌. 지나가는 바포레토와 수상택시를 보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며 신나게 인사를 하니, 그들도 미소와 함께 인사를 돌려준다. 조금은 얼빠진 듯 보였을지 몰라도 행복했다. 이 곳은 분명히 내 일상이 아니고, 나는 지금 아주 특별한 순간들을 보내고 있어 하고 되새기며 막차시간이 늦지 않게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은 리도섬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리도섬은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영화제 하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 기다란 섬을 따라 자리 잡은 해변에서 노닥거릴 심산이었다. 선블록과 피렌체에서 산 셜록홈스 소설, 메모지와 펜만 챙겨 들고서 리도섬으로 향했다. 통통거리는 바포레토를 타고 내리니, 리도섬은 휴양섬의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자, 해변으로 가보자- 하고서 무작정 섬의 가장자리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눈 앞에 보이는 건물이며, 조경에선 여유와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섬은 휴양섬으로도 유명하다더니 과연 그런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15분을 걸었을까, 아주 마음에 드는 예쁜 해변가에 당도했다. 신발을 벗고, 소심하게 바닷물에 참방 거리고 있자니 수영복을 미처 챙겨 오지 않은 것이 서글프다. 한국에서부터 리도섬에 갈 거라고 신나 했었는데, 이탈리아 도착해 짐을 풀어보니 수영복과 래시가드만 쏙 빠져있었다는 슬픈 현실. 하지만 해변가를 따라 걷고 있자니,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음, 톰 히들스턴이나 콜린 퍼스와 함께 걷고 싶군 하면서 마음이 분홍색이 될 때쯤 방파제가 보였다.
여기가 좋겠다 싶어 자리 깔고 앉아 멍 때리기 시작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바다를 바라보다 뜨거운 햇빛에 눈이 너무 부셔서 바다를 등졌다가, 책을 읽기를 반복. 뭔가 이 섬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어, 챙겨 온 메모와 펜을 집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주 멋진 호텔 같은 건물이 보인다. 이 풍경을 그려보리 맘먹고 슥슥 스케치를 해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건물은 Hotel Des Bains Venice Lido라는 유명한 호텔. 미스코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는 영화도 그 호텔에서 촬영됐단다. 어쩐지, 포스가 남다르더라.
선블록을 열심히 바르고 다녔는데도 발등을 보니 피부가 많이 탔다. 샌들을 신고 다녔던 탓에, 샌들 자국을 따라 선명히 대조되는 피부톤. 이탈리아의 햇살은 이렇게나 남달랐나 보다. 목덜미가 후끈후끈해질 때쯤 리도섬에 대한 미련을 털 듯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여기선 뭘 먹어볼까 하고 큰길로 나오니 야외에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는 예쁜 식당이 눈에 띈다. 큰 고민 없이 들어가서, 메뉴판을 보고 오늘은 목요일이니 뇨끼를 먹어야지 하고 뇨끼와 스프리츠를 시켰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에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이라 금요일에는 금식을 하거나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배가 쉽게 부르고 든든한 뇨끼를 금식하기 전 목요일에 많이 먹었다고 한다. 뇨끼를 특정 요일에 먹는 전통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 로마의 경우에는 목요일에 먹었고, 베로나 지역은 금요일에, 캄파냐 지역은 일요일에 먹었다나. 아무튼 뇨끼는 맛있었고, 나는 야외 테이블에서 멋진 전망을 보며 맛있는 식사를 했다. 리도섬은 특히나 휴가를 와서 지내면 참 좋겠다 싶은 곳이었다. 쾌적하고, 로맨틱하고, 해변이 가깝고.
다시 바포레토를 타고서 본섬으로 돌아왔다. 슬슬 여행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라 아쉬움이 점점 더 짙어졌다. 바다를 바라보며 쌉싸름한 커피를 한 모금,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인생이 지는 것이 저럴까 하는 감상에 빠지기도 했고. 끝까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베네치아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에는 벌써 내년 휴가 계획이 뱅글뱅글 돌았다.
이탈리아로 발을 들이며 항상 취해있으리라 다짐했는데, 그 결심은 여행 내내 열심히 잘 지켰던 것 같다. 그런 술기운과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이 더해져 이 곳에서의 나는 항상 들떠 있었다. 평소의 내 모습보다 두 톤은 밝은 기운으로. 숙소를 메스트레 역에 잡았던 것을 심히 후회하며 밤늦은 시간, 산마르코 광장을 눈에 담고서 숙소행 버스를 타러 갔다. 그렇지만 내가 10년, 20년이 지나와도 이 곳은 지금과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심했다. 지금 느꼈던 마음의 색깔을 한참 지난 미래에 다시 와도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베네치아는 쉽게 변하지 않는 곳이니까. 자, 내 마음 여기 맡겨놓고 갈게, 다시 오면 그대로 돌려줘야 해! 하며 나는 내 마음을 베네치아에 놓고 떠나니까. 이런 낯간지러운 생각을 하며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