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바르셀로나와 롯데 자이언츠 사이 그 어디쯤-
어떻게 표현을 하면 좋을까 여러 번 고민했던 것 같다. 롯데자이언츠(이하 롯데)에 대한 나의 마음을 글로 쓰기에는 너무나도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애증에 가까운 걸까. 지난번 바르사에 대해 생각해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입을 헤벌쭉하며 웃고 있었는데, 롯데를 생각하면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
바르사에 대한 마음은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누군가에 각인되면 평생 그를 바라보며 지켜주며 살아가는 늑대인간의 심정과 같다면, 롯데에 대한 내 마음은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조커를 미친 듯이 (때론 죽일 수도 있을 정도로 과격하게) 사랑하는 할리퀸의 마음이랄까. 그냥. 다 크게 보면 사랑이다, 그럼 그럼!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바다를 끼고 있는 사람들의 확 타오르는 기질이 한 몫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직에서 롯데 야구가 열리는 날, 그 인근은 흥분하는 롯데 팬들로 가득 차곤 했다.
이기면 기뻐서, 지면 분해서 목청 높여 부산갈매기를 떼창 했다. 소주로 얼큰하게 취한 아재들이 고래고래 부산갈매기를 부를 때면, 싫다는 생각보다 함께 그 노랫자락에 목소리를 얹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야구도 롯데도 잘 몰랐지만, 그래도 야구를 낯설게 생각지는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 대학 진학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어느 순간 완전한 롯데 팬으로 탈바꿈했다.
대단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두산 팬 친구 따라 간 잠실 구장에서 롯데 대 두산 경기를 두산 응원석 쪽에서 보는데, 두산의 득점에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다 갑자기 마음이 일렁였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느낌. 롯데가 패배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마치 내 나라를 배반하고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타국에 가서 나만 신나게 놀고 있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내 자리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미우나 고우나 최강 롯데를 외치고 있다. 아 그때, 그 일렁임을 억눌렀어야 했는데... (아님 진작에 NC로 갈아타거나....)
선동렬 선수, 이승엽 선수 등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묵직한 이름들은 많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최동원 선수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1984년 한국시리즈의 영향이 클 것이다. 최동원 선수는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혼자서 4승을 이끌며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선수 운영. 아직까지도 수많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그때의 한국시리즈는 극적인 드라마와 같은 승부들로 기억된다.
고교시절부터 에이스 소리를 들으며 수많은 체력적 정신적 부담감을 이겨내 왔던 그는, 팀과 본인의 이름에 걸린 명예를 지키고 에이스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불가능한 경기 등판 일정을 소화해 냈다. 팬과 구단이 찾으면 그는 200개의 던지고 나서도 얼마든지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그런 선수였다. 선수 시절에도 자기관리와 책임감으로 무장한 진정한 롯데의 에이스였다고나 할까. 나는 최동원 선수가 공을 뿌리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불같은 강속구와 낙차를 예측할 수 없는 커브를 구사하던 선수라고 했다. 거기에 리더로서의 소양까지 갖추었으니 당시 롯데 팬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을지 상상이 간다.
70년대와 80년대, 그에게 해외진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었다. 1977년 일본 프로야구 롯데오리온스의 가네다 감독이 최동원 선수를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입단을 추진했었지만, 당시의 한일 감정 및 가족의 반대 등 여러 이유로 결렬되었다. 1981년에는 최동원 선수가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최우수 선수로 뽑힌 바 있는데, 이를 인상 깊게 본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러브콜이 있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연봉 계약까지 맺었으나 병역문제로 인해 좌절되었다. 스포츠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어려운 시절이긴 했지만, 최동원 선수가 해외 야구 리그에서 뛰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크게 남는다.
선수생활 말년의 최동원 선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88년, 그는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는데, 선수들의 최저생계비나 경조사비, 연금제도 같은 최소한의 복지제도를 구축해 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선수협 결성은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운털이 박힌 최동원은 삼성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되었다. 그리고 최동원 선수는 1990년 시즌까지 삼성에서 뛰다 곧 마운드를 떠났다. 이후 그는 지도자로서 전환을 노렸으나 순탄치 않았고, 정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야구를 너무나 사랑하고 롯데 최고의 선수였던 그의 말년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리고 롯데의 영원한 에이스 최동원 선수는 2011년 암으로 사망한다.
내가 느끼는 롯데의 미운 점 중 하나는 어떻게 구단 최고의 영광의 순간을 만드는데 일조한 선수를, 팬들이 가장 사랑한 선수에 대한 예우를 이런 식으로 밖에 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물론 그의 백넘버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팬들이 사직구장에 그가 역투하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고(부산은행 기부금 5천만 원과 시민 모금운동으로 모은 5천만 원을 합해 건립), 최동원상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롯데의 감독 최동원 선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는 것이.
워낙에 스타였던 1980년대 최동원과 선동렬, 그리고 둘이 맞붙었던 경기는 영화 '퍼펙트게임'으로도 제작된 바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배우 조승우, 양동근이 열연하여 두 선수의 역투를 잘 구현해 낸 이 영화를 추천한다. 그리고 그 ost 중 overtime도 들어보기를 추천. 록키 ost 버금간다!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데, 마음속에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느낌이다!)
8888577이었던가. 한창 롯데의 순위가 흑역사를 쓰고 있을 때. 한 줄기 빛이 비치었나니 그 이름 제리 로이스터. 이 외국인 감독은 롯데에 패배주의를 없애고, 두려움 없이 우리 다 같이 해보자!라는 색깔을 칠해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롯데 팬들은 롯데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롯데 경기 맨날 챙겨보며 삶의 낛을 찾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으면 가장 거칠게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들 또한 롯데 팬들이다. 욕하다가도 다시 다음날이면 롯데 없이 못 산다고 외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때론 팬들의 과한 사랑(?)이 구장에서 선수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법하다. 특히나 꽤나 오랜 기간 동안 가을야구를 못했던 상황에서 구단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을 터. 선수들이라고 왜 이기고 싶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보는 게 맞겠지만, 자꾸 실책 나오는 플레이를 하면 정말......(정말 부들부들....)
로이스터 감독이 있던 3년 간, 그는 그 특유의 자율 야구와 함께 선수들에게 큰 형님과 같은 존재로 먼저 다가왔다. 선수들 모두가 로이스터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였다. 로이스터식 야구는 이대호를 국민 거포로 만들었고, 김주찬, 강민호 등 잠재력 있는 선수들의 재능을 끌어냈다. 더불어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기든 지든 포기 없이 경기를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했고, 팬들은 감독과 선수들의 근성이 눈에 보이는 로이스터 시대의 롯데를 사랑했다. 한동안 가을야구와 멀어져 있던 롯데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면서 팬들은 그의 미국 여권을 뺐자부터 시작해서 귀화시키자, 부산 시장으로 앉히자는 등 그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하곤 했다. 그가 롯데를 떠나게 되자 수많은 팬들은 신문광고와 플래카드를 통해 구단에 로이스터 감독의 연임을 지지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로이스터 감독은 연임하지 않고, 롯데를 가장 빛나게 만들어 주고 떠났다. 당시 롯데 구단에서는 가을에 야구할 정도의 기초체력은 만들어놨으니, 이제 우승을 시킬 수 있을 감독을 찾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잠시 잠깐 나도 그런 꿈을 꾸었더랬지 허허...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우승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었네 허허허)
당시 로이스터 감독 체재의 No fear 야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우승까지 바라지는 않아도. 적어도, 우리들도 선수들도 모두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던 그때.
어느 팀이든 응원하다 보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게 강민호다.
국가대표 포수. 롯데의 안방마님. 그를 호칭하는 말들은 참 많지만 나는 그가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묵직하게 항상 제 몫을 해주는 게 좋다. (근데 왜 요즘은 네 몫을 잘 안 하니 민호야... )
FA 때 4년 7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몸값 만들어낸 이 산수왕은 다소 거품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롯데의 대표선수라는 상징성이 있었기에 구단 입장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선수였을 거다. (이미 이대호를 보내고 어마어마한 비난과 함께 팀 성적도 함께 가라앉은 전력이 있기 때문에)
팀에는 파이팅맨이 필요하다. 두산 베어스의 홍성흔 선수처럼. (근데 요새 뭐하세요) 야구는 장기전이고 많은 선수들이 함께 팀플레이를 만들어내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선수들을 보듬어 안고 커뮤니케이션하며, 팀 분위기를 으쌰 으쌰 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강민호의 경우, 경력이 이제 꽤 있고 국가대표 경기 같은 큰 경기 경험이 있으며, 실력도 좋으면서 팀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결혼도 하고 해서(?) 아쉽긴(?)하지만, 그래도 내 돈 주고 산 최초의 유니폼이 강민호 유니폼이고, 응원가 부를 때도 왠지 가장 힘이 실리는 것도 강민호 응원가다.
이제 팀의 대들보로서, 팀을 잘 끌고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마 본인이 가장 알고 부담도 느끼고 있기는 할 테지만. 믿는다, 강민호!
1984년, 1992년. 롯데는 우승을 했다. 그때만 해도 아 보통 한 10년에 한 번 정도 비율로 우승하는 건가 보다 생각했었지. 하지만 세월은 흘러 흘러 마지막 우승 후 20년이 훌쩍 지나도 아직 우승은커녕, 요새는 가을에 야구도 못하고 있다. 그래, 우리 애들은 추우면 야구를 잘 해요. 추울 때 운동 잘못하면 다치잖아요. 그래서, 미리 알아서 날 추워지면 운동 슬슬 접습니다. (아 눈물이.... )
전에 그런 말이 있었다. 봄날의 롯데는 양키즈보다 강하다. 근데 요새는 글쎄, 봄데도 아닌듯한 그런 느낌. 속 시원하게 경기를 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그러네. 슬프다. 엘롯기 동맹도 깨어진 지 오래고.
더 슬픈 것은 다른 팀으로 갈아타지도 못한다는 거다. NC다이노스라는 멋진 팀이 경남 지역을 연고로 짜잔-하고 나타났을 때. 그때 갈아탔었어야 했다. 부모님 댁이 김해인데, 나는 NC 팬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근데 왜 때문인지, 롯데 아닌 다른 팀으로는 정이 쉽사리 가지 않는다, 엉엉. 야구팬으로서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아요...
나는 롯데를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자신이 있고, 또 그러고 있는데. 그러면 뭐하나, 1년에 경기를 다른 팀보다 한 달은 적게 하는 걸. '최~강롯데' 응원을 질러주고 싶어도 우리 선수들은 가을에 야구를 안 한다. 내가 경기를 아무리 보러 가고 싶어도 볼 수 있는 경기가 얼마 없다고.
아니다, 가만. 저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108년 만에 시카고 컵스가 우승을 했다지. 고종 때 우승해보고 100년이 훌쩍 넘은 현대에 또 우승. 이 쯤되면 고작 20년 넘게 기다려놓고 우승해달라고 발 동동 구르는 내가 성급해 보이기도 하네. 아,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할 뻔했어!!! 이쯤 되면 다 내 탓이오 내 탓이로다. (저 롯데 선수들은 나같의 선량한 시민들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근데 가끔은, 그래도 응원할 팀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하는 생각이 들 곤 한다. 완패하고도 괜찮아유, 안 다쳤으면 됐지유-하고 웃어 보이는 한화 보살님들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조금씩 얻는달까. 그래, 내년엔 다를 거야. 나는 우리 선수들을 믿는다. 우리들을 믿는다. 호구래도 괜찮다. 언젠가 우리는 우승을 할 거고, 나는 계속 우승을 위해 롯데를 응원할 거다. 그러니 롯데야, 제발 내년에 잘하자!
(이래 놓고 실책 가득한 경기 보고 으아아아 이제 야구 안 봐 끊었어!! 성질부리다가 야구하면 어 야구하니까 봐야지 하겠지. 혹시 이기기라도 하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또 롯데 찬양을 하겠지. 그리고 또 성적이 바닥을 기면 욕하고. 그러다 어쩌다 이기면 으앙 욕해서 미안해 사랑해 롯데야 하겠지 -> 내년 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