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인간을 치유한다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이 작은 생명이 때로는 나에게 살아가야 할 커다란 이유를 주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되어 준다는 것을. 일상 속 스트레스나 슬픔에 빠져서 허우적 댈 때, 내밀어진 그 누구의 손도 잡고 싶지 않을 때조차 털이 보송한 솜방망이 같은 그 조그만 앞발은 거부할 수 없다. 나에게 비비적대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과 내가 왜 그렇게 슬픈 지 굳이 물어보지 않고, 그저 맑게 올려다 봐주는 눈망울에 인간의 백 마디 말보다 더한 위로를 받고는 한다.
물론 나는 고양이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 못지않게 섬세하면서 제멋대로 인 데다 힘이 센 강아지는 있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집사에게 테라피스트 역할을 해주는 그들의 존재감을 느껴본 이상,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은 묘한 공감대를 가지게 된다. 요지는 든든한 강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고양이 없어’를 부르짖으며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 오늘은 ‘고양이 여행 리포트’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주인공 ‘사토루’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놀이터에서 버려진 어린 고양이를 발견하고 냥줍 하게 된다. 서로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지만, 친구는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고 고양이는 사토루의 품에 들어온다. ‘하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고양이는 가족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면 진 사람 쪽에 붙어 위로를 해주고, 사토루가 아플 때는 곁에 붙어 체온을 나눠 주는 기특한 면모를 보이며 사토루 가족에게 따뜻하게 녹아든다. 그 유년시절의 경험으로 사토루는 ‘고양이의 위로와 특별함’을 일찌감치 느끼고 어른이 되어서도 길고양이들을 보살핀다.
그러다 집 근처에서 험난한 길고양이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하치를 쏙 빼닮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나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아가다 교통사고로 다친 나나를 사토루가 발견해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하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일본어로 ‘하치’는 숫자 8, ‘나나’는 숫자 7을 뜻한다. 사토루는 유난히 하치와 닮은 길고양이를 보고 나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과거 자신이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하치에 대한 마음의 빚을 나나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으로 갚아가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 사토루는 나나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할 상황에 봉착하게 되고, 자신의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가장 믿음직한 친구들에게 연락하며 과거 추억들을 회상한다. 이 영화가 단순히 고양이와 집사의 생활 이야기가 아닌, 한 인간이 동물로 인해 어떻게 치유받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조금 더 깊은 영화라는 것은 여기에서 드러났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친구의 콤플렉스를 풀어주고, 고등학교 시절 몰래 좋아했던 여자아이에게 뒤늦은 고백을 한다.
사토루의 어린 시절 마음속에 풀리지 못한 채 남아있던 매듭들은 어른이 된 후 나나를 데리고 친구들과 다시 만나면서 풀어진다. 이것이 고양이의 힘일지, 어른이 되어 조금은 더 마음이 넓어지고 강해진 사토루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나나는 사토루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표현한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영화에 허풍이나 과장은 없다는 것을. 특별한 한 둘이 아닌, 세상 모든 집사의 고양이들이 저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극 중 나나 역할을 맡은 고양이 ‘톰’은 이 영화 외에도 여러 광고 등에서 출연한 연기냥이라고 한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영화 캡틴 마블에 등장한 고양이 ‘구스’ 또한 귀여운 연기력으로 많은 집사들을 앓아눕게 했지만, 이 영화의 나나는 표정이나 움직임이 구스보다 한 수 위다. 사실 고양이는 그 자체로 귀엽기 때문에 연기력을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대본 보고 눈빛 연기를 연습한 걸까 싶을 정도로 나름 숙달된 고양이였다는 것. 어떤 간식으로 유인해 저렇게 오고, 가고, 쳐다보고, 말하고, 째려보게끔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고양이계의 강형욱 씨가 등판해서 트레이닝시켜준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영화의 배경지로 일본의 시골 풍경들이 나오는데, 사토루와 나나의 은은한 신뢰관계처럼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여 좋았다. 일본의 시골 산은 저렇게 생겼구나, 바다는 저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진달까. 후지산이 배경으로 지나가는 것도 멋졌지만, 특히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밭 풍경은 급하지 않고 넉넉한 사토루의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 같아(그리고 그의 싱그러운 얼굴과도 잘 어울려) 인상 깊었다.
다만 나나 역할에 성우를 써서 대사를 입힌 것은 호불호가 갈릴만한 부분이다. 나나라는 고양이가 말을 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하는, 연출의 친절한 상상력이 들어간 것이지만. 고양이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캐릭터에 맞춘 듯 다소 부르퉁하고 일본 남자애들이 쓰는 일본어를 하는 게 영화의 감정선을 깨는 듯한 지점이 몇 번 보였다. 굳이 저기서 저렇게 말을 해야 했을까, 그냥 고양이를 비춰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일본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뜬금없이 저기서 저렇게?’하고 뜨악한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 있는데 여기서도 그런 부분들이 있었다. 주인공이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린다든지, 인물의 얼굴을 필요 이상으로 클로즈업한다든지. 이 영화는 인물들 대부분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캐릭터들이었기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갑작스러운 울음으로 표현하거나, 해사한 주인공의 얼굴들을 잠시 집중해 잡아주는 것이 그 순수함을 부각해주는 듯도 했지만. 영화 취향에 따라 거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외 영화의 소소한 반전 요소들은 신선했다. 반려동물이 나오는 영화 이야기는 대부분 예측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집 강아지를 생각하며 펑펑 눈물을 흘린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결말이 예상되었지만 흘러넘치는 눈물을 막을수는 없었다. 쉽게 감동받거나 눈물이 많은 분들은 반드시 티슈를 준비하길 바란다.
험난한 길 위에서의 생활.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고,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고, 병에 걸리거나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는 그 외로운 생활 중에 나나는 사토루를 만났다. 다친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토루를 보고 나나는 길 위에서의 자유로움 따위는 버리고 이 사람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사람은 고양이에게 따뜻한 집과 맛있는 사료, 사랑과 관심을 주었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세계 모두를 사람에게 주었다. 하치도, 나나도, 그리고 수많은 집사들과 함께 하고 있는 고양이들 모두 그렇다. 고양이의 의리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