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즐길만한 스타일리시-코미디 스릴러
미드 '가십걸'과 영화 '퍼펙트 피치' 시리즈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본 나는 두 시리즈의 주인공인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안나 켄드릭의 팬이다. 이 두 주인공이 쫙 빼입고 대치하고 있는 포스터를 본 순간 이 영화 봐야겠다 싶었다. 스타일리시한 스릴러라는 예쁜 홍보문구와 함께 영화 '나를 찾아줘(Gone girl)'와 이 영화를 비교하는 평가들을 보면서 관심도 급상승. 영화를 보고 난 뒤 남는 느낌은 글쎄, 이건 기대치를 어느 정도 채워주는 트렌디한 오락 영화라는 것.
이 영화는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 배우)와 스테파니(안나 켄드릭 배우), 그리고 에밀리의 남편 션(헨리 골딩 배우) 간 펼쳐지는 의심과 치정(?)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 패션회사의 홍보부장 일을 하는 누가 봐도 글래머러스하고 터프한 에밀리와, 아들을 씩씩하게 키워나가며 요리나 육아팁 등을 올리는 브이로그를 운영하는 스테파니는 처음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였지만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들들 덕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같이 놀고 싶다는 아들들의 성화에 스테파니는 아들과 함께 에밀리 집에 놀러 오게 되고, 두 엄마는 함께 마티니를 만들어 마시고, 각자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친구가 된다. 스테파니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여긴 에밀리는 종종 그녀의 아들 니키의 방과 후 픽업이나 베이비 시팅을 스테파니에게 부탁하곤 했다. 어느 날 에밀리는 평소처럼 스테파니에게 니키의 픽업을 부탁하는 전화를 남긴 채 돌연 사라지고 영화의 본격적인 사건이 전개된다.
에밀리의 실종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한 남편 션과 에밀리의 직장동료들을 보고 스테파니는 본인의 브이로그에 에밀리의 실종 소식을 올리고, 경찰에게 적극적으로 사건을 어필하는 등 친한 친구로서 최선의 도리(?)를 다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밝고 오지랖이 넓은 스테파니가 에밀리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극이 전개되어 가면서 에밀리의 과거와 비밀이 드러나고, 아내의 유혹 못지않은 막장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보는 이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에밀리와 스테파니, 이 두 인물의 갈등과 긴장이 극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는 묘한 점이 있었다. 극 초반 스테파니가 과거의 비밀을 힘겹게 털어놓을 때 그녀를 위로하는 에밀리의 방식이나 스테파니가 에밀리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을 봤을 때는 둘이 친구 이상의 감정이 있나 싶었지만. 극이 흘러갈수록 둘이 아군인지 적인지 모를 사건들이 펼쳐지면서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오락영화와 한 끗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젊은 시절 에밀리의 무모한 매력에 맹목적으로 끌려 결혼했고 지금도 그녀의 실체를 제대로 모른다는 남편, 갑자기 에밀리와 친해져 그녀의 집과 화려한 생활을 부러운 듯 바라봤던 베스트 프렌드, 에밀리의 부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녀가 원래 종종 사라져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며 얼버무리는 직장 상사. 에밀리의 실종과 관련된 이들은 모두가 의심스럽지만 결론은 예측 가능할 듯 아닐 듯 내 예상을 가지고 놀다가, 최후의 일격을 먹였다. 다소 블랙 코미디스러운 방식으로.
이 영화가 스타일리시하다는 평을 듣는 이유는 음악, 배우 비주얼, 중간중간 가볍게 섞인 블랙코미디 요소의 조합때문이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는 지금까지 봤던 영화들 중에서 (라라 랜드나 007 시리즈처럼) 손에 꼽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내가 워낙에 음악이 도드라지는 영화를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패션계 센 언니들이 입을 법한 원색적인 하이힐과 드레스들이 지나가면서 배경음악으로 Jean Paul Keller의 "Ca C'est Arrange."가 흐르는 오프닝은 이 영화의 트렌디한 리듬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면서 살짝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오프닝뿐 아니라 영화 중간중간 Francoise Hardy의 Comment te dire adieu, ZAZ의 Les passants 같은 분위기 있는 샹송이 깔리는 데, 주인공의 실종이라는 비극적인 서사와 부딪히며 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 낸다. 에밀리의 화려한 외모와 멋진 집, 분위기 있는 프랑스 노래들은 사실 그녀의 금전적, 정서적 결핍을 가리기 위한 허세섞인 도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잘 빠졌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매력을 느낀 것은 에밀리의 패션이었다. 그녀의 화려한 비주얼이 이 영화의 아쉬운 점들을 메꾸어준다. 블레이크 라이블리 배우 키가 178cm로 훤칠해서 웬만한 의상들이 다 멋지게 소화될 테지만, 특히 이 작품 안에서는 여러벌의 바지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고 나오기 때문에 같은 여자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안나 켄드릭 배우가 유난히 아담하고, 극 중에서 레이스가 달린 스웨터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청치마 등 귀여운 패션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되도록 연출하고자 한 감독의 의지도 있었겠지만. 에밀리의 의상은 촬영 현장에 자주 포멀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나는 폴 페이그 감독을 보고 블레이크 라이블리 배우가 나도 당신처럼 입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것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 초반 에밀리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펴 들고 스테파니 쪽으로 모델 워킹으로 걸어오는 장면의 포스 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폴 페이그 감독 특유의 촌스럽지 않게 코미디를 녹여내는 스타일은 선방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전작인 고스트 바스터스(2016)나 스파이(2015)처럼 직접적인 코미디는 아니지만(오히려 이 영화는 소재를 고려해 그의 넘쳐나는 코미디 감각을 많이 눌러버린 영화다), 실종사건이라는 스릴러를 다루면서도 막판에는 슬랩스틱까지 과감하게 섞어 넣은 그의 스타일은 적당한 웃음을 선사한다. 종종 너무 미국 유머인 것 같아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지만. 참고로 션이 플래시몹을 하는 장면도 찍어만 놓고 극장판에서는 삭제했다고 한다. 과유불급, 안 넣기를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 골딩 배우의 어색한 웃음과 율동은 상상만해도 뜬금없다.
이 영화는 스토리로 승부 보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 원작에 비해서 영화는 아쉽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다만 폴 페이그 감독 특유의 멋쟁이 감각, 두 주연 배우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는 오락영화라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누구나 보이는 것과 다르게 마음 한 구석에 크고 작은 비밀을 숨긴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일깨워 준) 것 또한 이 영화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