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자부심
얼마 전, 평소 동물들에 관심이 많고 강아지를 키우며(뿌꾸, 29개월, 진도 믹스), 때때로 유기견 센터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 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영화가 개봉했다. 그 제목 하여 ‘언더독’. 무려 220만이라는 관객 스코어를 올리며 한국 애니메이션 흥행 역사를 새로 쌓아 올렸던 ‘마당을 나온 암탉’ 감독이 두 번째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라고 했다. 눈이 반짝반짝하고 몸집이 날렵한, 보더콜리를 빼닮은 강아지가 메인에 자리 잡은 그 포스터에 이끌려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스크린 X로 보면서 그 스토리며 아름다운 영상미에 감탄했고, 이후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된 ‘시네마톡’을 기회로 한 번 더 보고 제작자/감독분의 설명을 직접 들은 후 언더독 2가 나오기를 기원하는 팬이 되었다.
영화 제목에서 예감할 수 있듯, 이 영화는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유기견 ‘뭉치’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특히 영화 초반 10여분은 ‘개’를 장난감처럼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아지 공장에서 어미개로부터 새끼 개를 ‘생산’해내고, 조금이라도 더 어려야 귀여워서 잘 팔린다는 이유로 어린 새끼를 어미로부터 떼어내 애견샵에 팔아넘긴다. 사람들은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에만 관심을 보이며 이 개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지갑을 연다. 그리고선 개에게 짖으면 목에 전기가 통하는 짖음 방지기를 달고, 덩치가 커지면 차에 태워다 산에 개를 버린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개들은 야생에서 죽어가거나, 무리를 지어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거나 어느 맘씨 좋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로 가까스로 생을 연명한다. 그마저도 개를 사냥해서 번식장 어미개로 쓰거나 개고기용으로 도살해 팔아버리려는 사냥꾼들에게 쫓기기 일쑤다.
영화 초반부터 이런 모습들을 보여주니 알고 있는 인간들의 나쁜 모습이지만서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온다. 영화는 이처럼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위험하고 아프게 만드는지 조명하는데, 어느 정도의 영화적 각색이 들어갔겠지 싶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유기견 문제를 피하지 않고 가림막 없이 보여준 듯했다. 엄마, 형제도 없는 개들에게 가족이라고는 자신들을 거둬준 인간들이 전부일 텐데 이들은 세상의 전부로부터 버림받는 기분일 터. 예상은 했지만 극 초반부터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느라 고생했다.
유기견 문제 부분뿐 아니라, 개들의 움직임이나 캐릭터 부여도 실제 강아지들을 많이 연구해 담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애니메이션에서 본 적 없는 자연스러운 개 꼬리와 입의 움직임에 감탄했고, 뭉치나 밤이가 날쌔게 질주하는 모습에서는 우리 집 개가 실제로 달리는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뿌꾸는 진도 믹스인데, 한번 목줄 풀고 제대로 달리면 아무도 못 잡는다. 뿌꾸의 보더콜리 친구 봄이는 뿌꾸보다 더 날쌔서 둘이 달리는 모습을 사람들이 본다면 영화 후반에 묘사된 장면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배경도 한국의 산과 들판, 호수를 3d와 2d 경계 어느 틈에 서서 본 것처럼 그려냈는데, 인상주의 화가 고흐가 표현한 자연을 보는 듯 아름다우면서도 너무 그림 같지도, 그렇다고 또 너무 입체적 이어 보이지도 않아 좋았다. 특히 스크린 X로 보면서 극장 3면이 확 트이면서 들판이 펼쳐지는데 그땐 정말 내가 개들과 함께 들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달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연두색과 초록색이 조화로운 들판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다. 작화 감독님께 기립 박수! 더빙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잘 되어서 더빙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나도 어색함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짱아’ 캐릭터가 익살스러운 대사를 툭툭 던져 자칫 시종일관 무거울 수 있었을 영화의 분위기를 살짝 밝게 건드려준다.
언더독의 주인공들은 견종을 추정해 보건대, 보더콜리 믹스 ‘뭉치’, 진도 믹스 ‘밤이’, 치와와 ‘아리’와 ‘까리’, 시츄 ‘짱아’, 셰퍼드 ‘개코‘ 정도. 종도 색깔도 크기도 성격도 저마다 다른 강아지들이 함께 세상을 살아나가고 어려움에 맞선다. 이 언더독의 친구들은 인간과 다르게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시련이 와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앞서서 무리를 위해 희생한다. (토리의 엄마 개, 아빠 개를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주르륵이다.)
또한, 극 중에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도 잠깐 등장하는데, 그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쫓기는 개 무리에게 잔반을 나눠주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지만, 뭉치가 실수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헤집어 놓는 바람에 식당에서 해고당한다. 나와 다른 사람, 다른 동물에 대한 관용이 없고 편협한 사람들의 모습을 현재 우리 사회의 약자인 이주 노동자와 동물(뭉치의 무리)들과 비교하며 꼬집어 내는 듯하다.
그나마 고마웠던 것은, (제주도에서 민박집 하는 걸로 티비에 나오셨던 부부의 이미지가 절로 떠오르는) 동물들에게 따스한 사람들도 등장시켰다는 것. 이들은 상처 받고 지친 뭉치와 친구들의 다친 곳을 보살펴주고, 밥도 주고, 마음 편히 쉴 곳을 제공해준다. 이 부부의 고운 마음씨와, 영화의 주제를 담은 음악과 별과 반딧불이 수놓는 밤의 시골 풍경이 화면을 채우면서 영화 초반부터 나쁜 사람들만 봐서 인류애를 상실할 뻔한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한 가지 또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뭉치’의 변화다. 초반에 뭉치는 본인이 버려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주인을 기다리면서 주인이 준 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본인이 정말 버려졌고 주인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후 공을 스스로 강에 버리면서, 더 이상 수동적인 개가 아닌, 본인이 하고 싶은 길을 향해 내달리는 인물로 탈바꿈한다. 사는 대로 생각했던 인간의 소유물로서의 개가 아닌,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 과감한 모험을 시도한다.
난생처음 들개 무리를 만나고 좋아하는 개에게 관심을 표현하면서, 지금까지 (짖음 방지기가 무서워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 본 적 없던 뭉치는 친구들과 함께 꿈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극 마지막에 뭉치는 말 그대로 날아올랐다. 이런 뭉치의 변화를 보면서 나는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건 아마도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같이 느낀 감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쾌감에 주먹을 쥐는 순간, 내 근처의 누군가는 박수를 쳤으니까.
뭉치는 나,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뭉치는 처음에 타인에 대한 경계심, 두려움, 불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스스로 반드시 행복을 찾겠다는 목표와 신념을 가지게 된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친구들을 이해하고 신뢰하면서, 서로 도와가며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난다. 그 과정에서 뭉치는 책임감이 있었고, (치와와 부부나 짱아처럼 작은) 약자를 배려했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도달했지만, 그 후 거기서 잘 살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는지는 뭉치가 오롯이 겪어내야 하는 또 다른 인생의 단계일 것이다. 이상향으로 그렸던 안식처 같은 곳에 도달했지만, 그곳이 진짜 영원히 안식처 일지는 알 수 없는 것. 안주하지 않고 계속 달려야 하는 곳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언더독은 분명 유기견들의 이야기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내 인생도 함께 투영해 보게 되어 묘하게 공감이 많이 된 것 같다.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것은 손에 꼽는데, 언더독을 보고 나서는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한국 애니메이션도 이 정도 레벨에 있다고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 뿌듯했다. 아직 마당을 나온 암탉만큼의 흥행은 하지 못한 것 같지만, 입소문이 나서 이 영화가 더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뭉치와 친구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새로운 곳으로 가서 행복할지 고생할지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사냥꾼에게 붙잡혔던 봉지는 잘 살고 있는지, 뭉치와 친구들의 다음 세대는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살 지. 정말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개들의 천국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것 투성이로 막을 내린 언더독, 2편 제작 떡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