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과 함께 한 멋진 여행과 예술에 대한 생각
여행과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많은 여행자들이 책을 통해 다른 나라를 알아가고,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여행은 어떨까 하고 상상하곤 한다. 이는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여행의 정보를 쉴 새 없이 밀어내는 영상과 다르게, 책을 통해서는 누군가 여행지에서 떠올린 생각을 그려낸 문장들과 멋진 순간을 잡아낸 사진을 보면서 그곳을 내 방식대로 더 여유롭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여행 갈 때 나는 종종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를 예약하곤 하는데, 올해 여행을 계획하며 에어비앤비를 검색하다 ‘여행자의 서재’라는 이벤트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식하는 여행, 예술을 즐기는 여행, 먹고 마시는 여행 이렇게 세 가지의 테마를 하루씩 진행하며 총 3일 동안 관련된 책을 맘껏 읽을 수 있고 밤 9시부터는 그 분야와 관련된 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여행 에세이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귀가 솔깃한 행사였다.
재작년 이탈리아를 혼자 여행하며 로마와 바티칸, 피렌체의 건축에 끊임없이 감탄하고 베네치아 리도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서 평소 잘하지도 않는 스케치까지 한두 점 그렸던 기억이 떠올라 6월 28일 방문 신청을 했다. 그 날은 예술과 관련된 여행의 테마로 작가의 밤 토크쇼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것도 신청했고, 운이 좋게도 당첨되어 참여할 수 있었다.
요 며칠 잠을 잘 못 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자마자 꾸역꾸역 저녁을 먹고 지하철에 올랐다. 에어비앤비가 고른 여행자의 서재는 미아에 위치한 카페 어니언이었다. 평생 미아는 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내겐 낯선 동네였고, 생각보다 먼 거리에 한숨부터 나왔더랬다. 곧 비가 내릴 듯 꿉꿉한 공기를 해치고 강북우체국 옆에 위치한 카페 어니언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분한 조명과 여기저기 놓인 여행책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친절한 직원분들이 내 신청 내역을 확인한 후 안내 책자와 휴대용 조명을 나눠주셨다. 밝은 조명이 카페 한쪽 벽전체를 차지하는 유니크한 인테리어 때문에 반대쪽 벽면은 비교적 어두웠기 때문에 책 읽기 불편할까 봐 휴대용 조명까지 준비하며 배려한 에어비앤비의 센스에 감탄했다. 제주맥주와 카페 어니언의 지원으로 맛있는 맥주와 커피, 그리고 차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요즘 술이나 커피를 피하고 있었기에 직원이 추천해준 따끈한 페퍼민트 차를 한잔 받아 들고 읽고 싶은 책들을 골랐다. 벽에 기대앉을 수 있는 좌석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카페 안쪽으로 이동해 한쪽에 놓인 이동식 의자 두 개를 펼쳐 하나는 의자로 하나는 테이블로 쓰기로 했다. 카페 어니언은 고정된 테이블 자리가 없고, 이용자가 본인이 앉아서 커피를 즐길 공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끔 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인상 깊은 경험이다.
7시 조금 넘어 도착했기에 작가의 밤 토크쇼까지는 두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호기롭게 설동주 작가의 동경식당과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펼쳐 들었다. 설동주 작가는 여행의 순간을 멋지게 일러스트로 그려내는 아티스트였는데, 그가 도쿄를 여행하면서 남긴 그림과 깨알 같은 맛집 정보는 도쿄 여행을 앞둔 사람들에게 미슐랭 가이드 못지않은 구세주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귀여운 그림체도, 너무나도 정교한 넓은 풍경도 한 가득 담겨 있어 드로잉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그림을 따라 습작을 남겨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는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였다. 그는 뉴욕, 멕시코, 부산 등 여러 곳을 여행하고 글을 썼으며,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작가답게 역시 글이 술술 잘 읽혔다. 특히 여행에서 호텔에 체크인하고 숙박하는 것을 ‘낯선 곳에서 내가 받아들여진다, 그것도 환대를 받으며’라는 중독적인 안심감으로 해석하고 그 안심감을 느끼고 싶어 여행과 호텔 투숙을 이어 나간다는 말에는 묘하게 공감이 가기도 했다. 호텔이든, 민박이든, 에어비앤비든 숙박시설에서 누군가에게 따스한 환대를 받으면 낯선 여행지에 있다는 불안감은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불안이 안심으로 바뀌는 황홀감’을 느끼고 싶어 자꾸 여행을 떠나게 된다.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면서 계속 여행을 갈망하니까.
상쾌한 페퍼민트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으니 어느덧 9시가 가까워왔다. 작가의 밤 토크쇼를 위해 자리를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고, 정말로 소규모 강연이라도 하는 듯 좌석이 정리되었다. 에어비앤비의 슈퍼 호스트이자 건축가인 이병엽 님, 멋진 여행 풍경을 그림으로 잡아내는 일러스트레이터 설동주 님, 카페 어니언을 미아에 이어 안국점도 멋드러지게 디자인한 패브리커 듀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미 책을 읽으면서 피곤했던 정신이 번쩍 깨버린 데다, 에너지와 영감으로 반짝이는 이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까지 의욕이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 건축, 일러스트, 디자인 등 분야가 조금씩은 다르지만 결국은 여행을 즐기고 여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 너무나 멋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 이병엽 님은 논현의 주택을 리모델링 해 1층에 살면서 2층 공간은 여행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의 안락한 집과 가족이 환대를 거쳐간 중국, 영국, 미국 등의 여행객들은 한국을 특별히 더 잘 느끼고 여행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까래를 연상시키는 한국 전통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목재 천장에 새하얀 침구가 정갈하게 놓인 방은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넓게 트인 유리 창은 건물 밖의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가족은 여행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도 차려내주는 모양이었다. 순간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먹었던 아침식사가 생각났다. 맘씨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려내주셨던 부드러운 오믈렛, 버터를 바르고 구운 식빵, 바삭하게 튀겨진 베이컨, 신선한 과일과 시원한 오렌지 주스로 하루의 시작이 천국 같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고마움과 든든함을 이병엽 님의 집에 머물렀던 여행자들도 느꼈을 거다.
일러스트레이터 설동주 님의 이야기는 즐거웠다. 본인이 그린 일본 길거리의 풍경을 A3 용지로 인쇄하고, 뒷면에는 작품과 이야기의 흐름을 편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QR코드를 넣어주셨다. 단번에 그가 여행을 하며 어떤 생각으로 어떤 작품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노트를 들고 다니며 여행을 하다 인상적인 순간을 습관처럼 스케치한다고 했다. 작은 노트로는 10분 내 슥삭슥삭 그려낼 수 있는 풍경들을 그린다고 했다, 내 눈에는 과연 저것이 10분 만에 나올 수 있는 그림인가 싶었지만(정말 느낌 있고 멋졌다!). 저녁 무렵이면 숙소로 돌아와 찍었던 사진들 중 맘에 드는 것은 자리 깔고 본격적으로 그려낸다고 했다. 과연, 5분 스케치와는 또 차원이 다른 멋진 그림들이 나왔다. 나는 손재주가 없는 편이라 이렇게 좋은 퀄리티의 창작물들을 만들어 내는 아티스트를 보면 부러움이 앞선다. 설동주 님은 본인의 일러스트 못지않게 밝은 에너지를 가진 분인 것 같아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 두 분으로 구성된 패브리커 듀오는 등장부터 범상치 않은 비주얼을 자랑하셨다. 한 분은 단발머리를 곱게 기르셨고 한 분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으셨다.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시너지를 내주는 진정한 소울메이트가 아닌가 싶었다. 수줍어 보이다가도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신남을 감추지 못하시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예술가였다. 특히 안동 부석사를 멋진 장소라 이야기 하시면서, 부석사가 보여주는 사람이 이동하는 시선에 맞춘 건물의 각도와 높이, 건물들 간의 밸런스에 감탄해 그 느낌을 카페 어니언 안국점에 담아냈다고 하시는데 그 말투 속에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카페 어니언 안국은 바깥 전망을 바라보는 시선의 흐름을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좌식 자리, 입식 자리, 메뉴를 고르는 공간의 높이를 다 다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카페 어니언 안국도 꼭 방문하고 싶어 졌다.
뿐만 아니라 카페 어니언 미아도 테이블이 없고, 창이 불투명하고 한쪽 코너 전체를 조명으로 쓰는 등 일반적인 카페와는 확연히 다른 카페 경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미 이 특별함이 입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카페 어니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에어비앤비가 왜 하필 미아를 선택했고, 미아의 카페 어니언에서 여행자의 서재를 열었나 하는 의문은 이곳에서 보낸 3시간의 경험으로 완전히 해소되었다. 에어비앤비를 찾는 여행자는 여행지의 랜드마크만을 쫓는 사람들이 아니다. 현지인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그 도시의 작은 골목길 탐험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바글거리는 유명 관광지와 가이드북에 나온 맛집 탐험보다는 뒷골목 한편에 위치한 조그만 과일가게에서 복숭아를 사면서 주인과 흥정해 체리 몇 알을 서비스로 얻어내고, 제대로 된 간판도 없는 조그만 빵집에 들어가 고소하고 질깃한 빵에 진한 라테를 마시며 현지인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것에 더 행복감을 느낀다. 그 나라의 진짜 삶은 골목길과 맞닿아 있다. 미아는 강남처럼 북적이지도, 종로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곳이지만 살피다 보면 사람 냄새나는 흥미로운 시장이 있고, 인심 좋은 돼지 숯불갈비집이 있고, 골목 안쪽에는 이토록 트렌디한 카페 어니언도 있다. 미아가 강남처럼 북적이지 않더라도 이 곳의 작은 보물 같은 곳들을 누군가들은 발견해주길 바라는 에어비앤비의 선한 의도가 느껴졌다. 여행과 예술에 대한 생각으로 쌓인 멋진 금요일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