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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꽃언니 Jul 05. 2022

92세 노모(老母)를 요양원에 모시는 마음

자식은 부모를 배신해서는 안된다.

부모는 자식을 책임져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배신해서는 안된다.


"야, 너 토요일에 뭐하냐?"


내가 어딜 가서 뭘 하든 생전 묻는 일이 없던 아빠가 이상하네. 웬일이지. 나야, 아빠랑 같이 다니는 게 좋으니까 얼씨구야 덮어놓고 콜.


"할머니가 위독하지는 않아. 근데 며칠 전부터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숟가락 젓가락을 잘 못 들어. 얼마 안 남은 느낌이 드니까 다 같이 밥을 한번 먹지 싶은데."


돌아가시지는 않았다는 것만 알고 산지 오래였다. 아빠의 엄마라는 사실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의 할머니. 마냥 모른 척 살아가기엔 가슴 한편이 쿡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존재. 아빠를 사랑하는 아빠의 엄마니까 나도 아빠를 사랑한다면 아빠의 엄마에게 뭔가 보은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할머니는 언제나 기개가 당당했다. 뾰족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느끼기에 나의 할머니는 차갑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회생 불가능 한 하반신을 붙들고 자리 보존한 지 오래되었어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무장한 할아버지와 대조되어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명절 때마다 새벽 네시 반쯤 깨서 늦어도 아침 여섯 시까지는 서초동 본가에 도착해야 했다. 집안엔 며느리가 둘이었다. 그러나 요리하는 손은 하나였다. 엄마는 그 새벽부터 음식 만들기 설거지하기 과일 깎기일가친척 누군가가 도착할 때마다 반복했다. 큰엄마는 제사상 다 차려놓으면 점심만 먹고 사라졌다. 늘 밍크코트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화려한 행색을 하고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공들여 받은 손톱 벗겨질까 봐서였는지 설거지 통에 손 한번 담그는 법이 없었다. 그런 싸가지에 밥 말아먹은 행동을 처음부터 콘셉트로 밀어와서 그런 건지 누구도 큰엄마의 그런 행동에 언성 높이지 않았다. 나와 내 동생의 눈에만 그것이 이상해 보였는지 무척 심기가 불편했다. 명절 때면 엄마는 기름 냄새에 질려 전 한쪽을 제대로 못 먹었다. 그럼에도 틈만 나면 통통한 알밤이나 잘생긴 육전을 내 입에 쏙쏙 넣어주며 말하곤 했다.

너는 설거지 같은 거 절대 하지 마. 손에 물 닿는 순간 평생 살림이나 하다 늙어 죽는 거야.

엄마가 주방에서 종일 솥뚜껑 운전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동안 나머지 가족들은 고스톱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큰엄마는 애초에 만 먹으러 온 사람이었고 고모는 같은 여자였어도 주방에 드나드는 일이 없었다. 엄마가 깎아내 온 과일을 넙죽넙죽 집어먹으면서 몇 시간이고 그 고스톱 판은 계속되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온 우리는 저녁상을 치우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엄마는 항상 말이 없었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어느 날 갑자기 한방에 끝이 났다. 엄마가 어쩌다 한번 동행하지 않았던 추석을 기점으로 꾹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상 차리고 치우고가 반복되었고 고스톱 판은 몇 시간째 계속되었다. 집에 음식 하는 여자는 할머니와 엄마뿐이었는데 엄마가 없으니 할머니 혼자 제사 음식을 다 만들었을 것이다. 주방에  뭔가 마실 것이 있나 들어갔을 때였다. 엄마가 있는 것이 당연했던 부엌에 아무도 없으니 무척 썰렁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뭘 꺼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있는데 내 뒤통수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꽂혔다.

네가 오늘은 설거지 좀 해라.

내 눈높이에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다 먹은 그릇들이 보였다. 싱크 대위로 머리 하나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작은 키였던 나는 위태롭게 탑처럼 서있던 그릇들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서러움이 복받쳤다.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으앙, 집안이 떠나가라 악을 쓰고 울어댔다. 거실에서 고스톱 치던 식구들이 우르르 주방으로 달려왔다. 당황한 아빠의 얼굴이 눈물에 가려 흐릿하게 보였다. 아빠는 서둘러 짐을 챙겨 나를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웠다. 혼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는 아빠의 뒤통수를 몰래몰래 훔쳐보며 안 혼나는 게 더 이상해서 무서웠다.


"당신,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엄마는 현관문에서 부터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었다. 아빠는 별일 없었노라고 몇 번이나 대답하다가 피곤했는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엄마는 궁금증이 해소가 안되자 나를 붙잡고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또 서러움이 복받쳐왔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채로 뭔가 나쁜 짓을 당한 것을 고백하듯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할머니가 나한테 설거지하라고 시켰어."


엄마의 분노가 폭발했다. 화장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씻는 아빠에게 빨리 나오라고 윽박질렀다. 아빠는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 갑자기 애가 울길래 데리고 나왔다. 하며 중언부언 대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 엄마 제정신이야? 미친 거 아니야? 집에 여자가 몇인데! 당신 동생이나 형님이나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손하나 까딱을 안 해? 얘 이제 열 살이야. 애한테 설거지를 시킨 당신 엄마는 내가 안 가니까 한테 화풀이한 거야 뭐야? 당신 엄마가 애한테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동안 당신은 뭐했어? 나한테나 제잘난 맛에 할 말 다하고 살지 엄마한텐 찍소리도 못하면서."


엄마는 할머니가 챙겨준 오이피클을 싱크대에 철벅철벅 쏟아부어버리고 나에게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넌 엄마가 설거지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랬지. 할머니가 하라고 하면 못한다고 왜 말을 못 하고 거기서 울고 앉아있어. 울면 다야? 뻑하면 울기 나하고 병신같이!"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엄마가 내 잘못이라고 화내는 게 억울했다. 계속 울어대니 엄마는 화가 더 치밀었는지 아빠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여보, 당신 집에 이제 다시는 안가. 알겠지. 그리 알아."


엄마는 그 후 죽는 날까지 본가에 가지 않았다. 나에게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다. 명절이 되면 엄마 기분을 살펴서 괜찮다 싶으면 아빠를 따라나섰다. 그날의 일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딱히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빠를 생각하면 또 덮어놓고 안 간다고 하기가 미안했다. 더군다나 좀 냉소적이었던 할머니와는 달리 할아버지는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예뻐했기에 한 번씩 말동무해 드리러 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본가에 가서 가타부타 집에서의 일들을 설명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엄마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가끔 친척들이 궁금해하긴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아빠가 그 질문을 재빨리 낚아채 이런저런 이유로 둘러대곤 했으니까.

나한테 함부로 하는 건 참을 수 있어. 그런데 내 새끼한테 함부로 하는 건 난 절대 못 참아.

엄마가 나를 위해 미움받을 각오로 투쟁하는데 정작 내가 친척들 눈치 보느라 고스톱판에 사과나 커피를 나르는 꼴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날까. 명절 때마다 설거지 한번 하랬다고 울어버린 철없는 꼬마로 회자되었지만 나는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잔심부름이라도 해야 할 때면 엄마의 분노가 떠올랐다.


할머니와는 원래도 살갑지 않았지만 점점 더 데면데면 해져갔다. 그럼에도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격주 주말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초동을 들락거렸다. 양손 가득 각종 영양제나 비타민 등을 싸들고.


가난한 집의 살림밑천이었던 엄마는 나를 허드렛일과 가사노동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 엄마의 유년기를 답습하게 하지 않도록. 그것이 부모로서 엄마의 책임감이었다. 아빠는 형제자매가 있었음에도 부모의 일이라면 모든 것을 떠안고 나서는 성격이었다. 없던 시간도 돈도 갑자기 만들어 내곤 했다. 그것이 자식으로서 아빠의 도리였다. 엄마는 본가가 먼저인지 우리 가족이 먼저인지 헷갈리게 하는 아빠의 태도에 늘 분노했다. 아빠는 엄마가 본가에 관한 한 불만이 좀 있어도 참아주기를 바랐다. 엄마와 아빠는 부모의 책임감과 자식의 도리 사이에서 서로의 생각이 달라 때로는 박 터지게 싸웠다. 


수없이 싸웠어도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바꾸지 못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결혼 전부터도 오랜 독거로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컸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 갑자기 효자로 돌변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효자랑 결혼을 한 것이었으니 아무리 열이 받아 난리를 쳐도 격주에 한번 본가를 찾는 아빠를 막을 수가 없었다고.


그러는 사이 나는 어렴풋이나마 부모에 대한 의리와 미래의 내 자식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 가치관을 정립해 왔던 것 같다.


세월이 흘렀다. 서초동 본가는 공중분해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는 미루어왔던 이혼을 추진했다. 얼마 뒤 고모는 미국으로 떠났다. 할머니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빠는 할머니를 집에 모시고 싶다고 했다. 여동생이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모셨으니 이제 우리가 하자고. 우리 집은 방이 네 개였는데 내 동생이 군에 입대하면서 방 하나가 비다시피 했으니 그 방을 쓰면 되지 않겠냐며 말이다. 엄마와 나는 눈이 뒤집혀 반대했다. 엄마가 다시 시집살이 비스므레 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 싫었다. 아빠는 며칠을 고심하다가 집 근처 연립주택을 얻어 할머니를 모셨다. 제사는 봉은사에 맡겨졌다. 


고모는 미국에서 한 번씩 들어올 때마다 할머니 에서 지내다가 나가고를 반복했다. 미국에 직장이 생기고 거취가 확실해지고 나서는 그마저도 뜸해졌다. 아빠는 문지방이 닳도록 할머니 집에 들락날락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노쇠해져 거동이 불편해졌다.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 투석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가야 했다. 출근을 해야 하는 아빠는 투석 날짜에 맞춰 병원에 내원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할머니를 집 근처 요양원에 모셨다.


요양원 입소를 위한 모든 절차를 비롯한 모든 행정처리는 아빠가 혼자 진행했다. 아빠의 형은 일평생 "나 몰라라" 태도로 일관했고 고모는 본인의 현재바빠 아빠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며 기대 서있을 뿐이었다. 한국에 있는 날이 별로 없어 아빠에게 한국에서의 이런저런 행정처리를 부탁해야 하는 판국에 할머니의 노후를 같이 책임지자 할 여건이 안되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모는 한 이십 년 병든 할아버지와 노쇠한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도리를 할 만큼 했다 쳐도 아빠의 형은 도대체 사고의 회로가 어떻게 된 사람인지 의문이었다. 평생 노모를 동생들에게 떠 맡기고 시간도 돈도 인색하게 군다는 게. 한배에서 나온 자식인데 왜 같은 양육자에 의해 성장한 삼 남매가 이토록 다른 것일까.


엄마, 앞으로 5년은 더 살 수 있지?
내가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까
그 생각만 해요

한 십 년 만에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같이 외식을 했다. 백발의 할머니는 몸집이 너무나 작아져있었다. 마지막 봤을 때 모습과 너무 달라져있어 속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요양원 출입구의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우리를 보고 얼굴이 잠시 밝아지는 듯하다 이내 예전의 시크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도 반가운 마음이 반짝 들다가도 마냥 반갑기엔 세월 속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환하게 웃기가 어색해 표정이 굳었다.


할머니는 더 이상 혼자 식사를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최근에는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이 답답해서였는지 손으로 음식을 집어서 드셨다고 한다. 온 얼굴에 다 묻히고 철벅철벅 옷에 흘려가며 말이다. 요양원에서 전화를 받고 아빠는 무척 마음고생을 했다.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 하고. 수도 없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지만 눈과 귀가 어두워진 할머니는 잘 받지 않았다. 요양원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면회를 받지 않는다. 얼굴을 보려면 외출을 신청해서 나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옷 입고 씻고 채비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어 자주 하긴 힘들었다.


아빠는 허구한 날 뭔가를 사들고 요양원에 달려갔다. 외식을 하다 말고 묵사발을 포장하고 급식이 물린다고 죽을 소분 해 가져 갔다. 무설탕 사탕과 블랙커피 혹은 자두 같이 살짝 신 과일을 챙겼다. 요양원 앞 갓길에 주차를 하고 벨을 누르면 여직원이 문을 빼꼼 열고 물건들을 받아갔다. 잘 전해졌는지 확인하려고 집에 와서 또 실컷 전화를 했다. 통화가 안되면 요양보호사분께 전화해서 잘 드시더냐고 물었다.


우리는 멀리 가기는 어려워 요양원 옆 건물의 식당에 갔다. 아빠는 익숙하게 할머니 몫으로 냉면을 주문했다. 급식으로 하루 세끼를 먹는 할머니는 아들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주문해주자 표정이 밝아졌다. 한 번도 나를 보면서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지만 아빠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세월이 흘렀어도 그 모습은 그대로였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혼자서 젓가락질을 할 수없었다. 아빠는 식사를 제쳐두고 본격적으로 할머니에게 붙어 보조 하기 시작했다.


"아빠 여자를 좀 소개해줘. 결혼을 해야지."


할머니는 아빠가 집어주는 냉면 가락을 반은 흘리고 반은 먹고 하면서도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아빠의 결혼을 언급했다.


"아빠 친구 많아요. 그리고 우리랑 같이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너 맹추구나. 너랑 같이 살면 안 되고 여자가 있어야지. 아빠가 새장가 가는 게 싫으냐?"


엄마가 죽은 지 일 년 반밖에 안 지났는데. 할머니는 내게 엄마가 죽어서 얼마나 슬픈지 지금은 괜찮은지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내게도 그렇게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도 여전했다. 아빠는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답을 대신했다.


"엄마, 내가 앞으로 5년 안에 결혼할 여자 데리고 와서 인사시켜줄 테니까 그동안 살아있어요. 앞으로 5년은 더 살 수 있지?"


할머니는 웃었다.


"엄마, 요양원에서 밥 먹을 때 손으로 집어 먹고 그랬다며. 엄마 자존심 없는 사람 아니잖아. 다신 그러지 마. 굶더라도

손으로 먹고 그러지 말고 도와달라고 해요."


"자존심, 자존심은 죽는 게 자존심이야. 요양원에서는 사람들이 다 죽고 싶다고 한다. 늙어서 자식들한테 안 좋은 꼴 안보이려고."


"그 사람들이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외롭고 그러니까 그렇지. 엄마는 내가 있잖아. 우리 집이 여기서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려. 내가 엄마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엄마는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까 생각만 해. 나를 봐서라도."


할머니는 또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월요일 하고 금요일하고 병원 갈 때 있잖아. 내가 그때마다 밖에를  이렇게 내다본다. 네가 있을까 싶어서."


아빠는 할머니에게 앞으로 5년은 더 살아야 한다며 손가락을 걸기까지 했다. 백세를 바라보는 노모와 칠십이 다된 아들의 모습으로는 조금 유치하기까지 하지만 아빠는 할머니 앞에서 무척이나 아이 같았다. 매일 나와 남편을 구박하고 잔소리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정다감하고 애정표현이 풍부한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아빠긴 맞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할머니 역시 일평생 시크하기만 했는데 아빠랑 있으면 다른 사람이었다. 혼자된 아빠가 안쓰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도 아빠가 오래 살아야 한다고 다그치자 손가락을 쓱 내밀며 약속! 을 하고 환하게 웃었다.


아빠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했다. 나는 도저히 동의하기 어렵지만 아빠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가 나와 내 동생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 얼굴도 보여주고 싶고 한데 우리가 시큰둥 하니 인위적으로나마 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 애들이 엄마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어. 엄마 핏줄들 보니까 좋지? 얘가 ○○이 남편이고 얘가 ○○이 처야."


아빠는 밥 먹는 내내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는지 말해보라며 할머니를 다그쳤다. 엄마는 내가 끝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며 계속해서 안심시켰다. 처도 죽었는데 엄마도 죽으면 내가 얼마나 슬프겠냐며 응석을 부렸다. 엄마가 오래만 산다면 결혼할 여자를 어떻게든 구해오겠다며 할머니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썼다.


가만 듣다 보니 익숙한 말들. 내가 아빠한테 수시로 하는 소리들. 아빠는 내가 물어볼 때마다 내가 앞으로 몇 년 더 살지 내가 어떻게 아냐. 너 때문에 일찍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그만 좀 얘기해. 하며 오만 짜증을 낸다. 그런데 정작 아빠는 할머니한테 같은 질문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깊은 사랑의 표현이며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말들일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빠에게도 당신들의 양육방식을 전수했을 것이다. 내 앞에서도 늘 아빠에게 한 말이 있다.

자식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부모는 피를 팔아서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다.

아빠도 여태 날 키우면서 돈이 많이 들 상황이 있으면 늘 피를 팔아서라도 해주마 하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성장한 아빠는 부모를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가졌을 것이다. 나 역시도 엄마가 죽고 혼자된 아빠랑 합가 하며 끝까지 아빠를 책임지겠노라고 말했었다. 부모에 대한 내 사랑을 알기에 남편이 나의 말에 망설임 한번 없이 당연히 그러자고 응해주어서 고마웠다. 시댁에서도 부모한테 잘하는 게 사람이 할 덕목이라며 당신의 아들이 갑자기 데릴사위가 되게 생겼는데 흔쾌히 오케이 하셨다. 틈만 있으면 장인 섭섭지 않게 잘하라고 남편을 독려하시는 것도 알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에게 딱 한 마디씩을 물었다. 우리한테도 관심이 없는데 손주 사위나 손주며느리한테는 당연히 할 말이 없었을 것이고,


"너 경찰일은 할만하니, 힘들지는 않고?"

"너는 군인 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지낼만하냐?"


낯선 다정함. 둘 다 얼떨결에 그냥 뭐 그렇죠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새삼 놀라웠다. 백 살이 다되었는데 말이 어눌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졌을지언정 정신이 어찌나 또렸한지 우리가 뭐해먹고사는 지를 기억하고 묻는다는 것에 말이다.


남편은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한 할머니가 늘 애틋한 존재이다. 혼자인 막내 삼촌이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때문에 남편은 할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할머니를 요양원에 버려?"

  

세간의 인식이 이렇다. 오죽하면 요양원은 죽을 때 다된 노인들이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말도 있고. 우리 할머니는 여건상 요양원에 가시겠다고 동의를 하셨다. 아빠도 누군가 상주해서 할머니를 돌봐주는 것이 혹시 모를 비상상황에 훨씬 안전하다 판단했다. 나머지 아빠의 형이나 고모가 아빠 의견에 달리 의견을 낼 상황이 되지 않았기에(의견을 내면 책임져야할 상황이 되기에) 집안 시끄러울 일 없이 아빠 의견이 가족 의견이 되어버렸다. 아빠가 할머니의 여생을 책임져 주길 바라는 암묵적인 동의 이기도 하다.


요양원에 있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를 배반한 것은 아니다. 집안마다 사정이 다르기에 노인을 버렸다는 개념도 일반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할머니와 아빠를 보기 전엔 나도 요양원 같은데 자식들이 내팽개치면 얼마나 우울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빠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슬퍼 보이지 않았고 아빠는 할머니를 깊은 효심으로 아끼고 있기에 요양원에 모신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봤다. 나는 아빠가 오래 살기를 닦달할 것이 아니라 아빠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할머니를 아껴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빠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세상 유일한 어른이니까. 할머니가 내게 살갑든 싸늘하게 대하든 엄마에게 잘했든 못했든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또다시 집안에 초상이 나지 않기를.


가까스로 일상을 찾아가는 우리 삶에 파도가 몰아치지 않기를 바라며 남동생과 나는 작은 실천을 하기로 했다. 격주에 한 번씩 급식 대신 특식을 넣어드리는 것이다. 뭐 대단한 걸 보내는 것은 아니다. 죽이라던지 과일이라던지 하는 것들을 틈틈히 보내드리는 것.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노인들 틈에 살면 가족의 온기가 너무나 그리운 날들이 있을 것이다. 사식을 규칙적으로 넣어드리면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아빠가 늘상 혼자 하던것이지만 아빠의 자식들이 한다는 것은 할머니에게도 아빠에게도 작은 기쁨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계획을 아빠에게 말했을 때 아빠는 날도 더운데 요양원 왔다 갔다 하면서 음식 배달하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다가도 슬그머니 물었다. 음식 뭐 보낼 건데.


츤데레 같긴.


자식들 주머니에서 돈 나간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치 않고 그렇다고 또 아빠의 어머니 챙긴다는데 애들이 많이 컸네 대견스럽기도 하고. 내가 모를 줄 아나 봐. 그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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