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항암제 들어갑니다. 맞으시면서 혹시 불편하시거나 힘드시면 침대 위에 빨간 버튼 보이시죠? 그거 눌러주세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안내해 주는 간호사의 의례적 멘트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항암제가 들어가면 많이 힘든가? 막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고 통증이 느껴지나?" 내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예측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맞닥뜨리게 되면 긴장되고 두렵다.
대학 졸업 후 처음 해봤던 면접도... 사회생활도... 결혼 후 개인사업과 해외거주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경력단절이 되어 오랜만에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때의 긴장과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은 처음이 아니었다. 항암도 그 실체를 아직 모르기에 마냥 두렵기만 했다.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지금 내 몸속으로 항암제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잊어버리려고 애씀과 동시에 내 몸의 변화를 감지하려고 하는 모순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오후 5시부터 저녁 11시 30분까지 6시간 반동안 4종류의 항암제를 맞았고 처음 2개는 표적항암제인 허셉틴과 퍼제타, 뒤의 2개는 세포독성 항암제인 도세탁셀과 카보플라틴이 들어갔다. (참고로 난 입원항암이라 언제나 항암날짜가 되면 2박 3일 병원에 입원을 해서 항암을 한다. 서울의 빅 5 대학병원은 입원항암을 잘 안 해주는 걸로 알고 있다. 아마도 환자가 많고 병실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두 번째 항암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불편한 건 없으셨죠?" 다행히 아무런 이상 증상은 없었다. 그렇게 두 번째 항암제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마음이 아주 조금 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 번째 항암제 (세포독성 항암제)가 들어가고 명치 부분이 살짝 답답하면서 약간의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빨간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진정되었고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마지막 항암제가 절반쯤 남았고 난 약간의 한기를 느꼈을 뿐 다른 이상 증상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총 다섯 번의 항암을 했지만 항암제가 들어가는 동안 몸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표적항암제 2개를 맞을 땐 앉아서 일기도 쓰고, 문자도 보내고, 유튜브도 보면서 여유롭게 항암을 했고, 뒤의 세포독성 항암제를 맞을 땐 몸에 기운이 없고 잠이 쏟아져서 대부분 잠을 청했다. 내일(11월 11일) 6차 항암을 하러 가는데,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간다. 항암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전혀 두렵지 않다.
항암을 한 다음날 아침...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다. 울렁거리지도 않는다. "뭐지? 왜 아무렇지도 않지? 원래 이렇게 멀쩡 한 건가?" 보통 항암이 끝나고 24시간 후에 호중구주사를 맞기 때문에 1차 항암땐 저녁 11시 반에 주사를 맞고 그다음 날 퇴원을 했다. 그땐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왜 항암을 한 다음날 멀쩡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바로 "스테로이드 주사" 때문이다. 항암제가 들어가기 전에 스테로이드 주사가 먼저 들어가고 항암이 끝나고 나면 스테로이드 약을 복용하고 퇴원한다. 또 8시간 후 복용할 스테로이드 약을 한알 처방해 준다. 그렇기에 항암 부작용은 항암을 하고 그 다다음날 오후(항암 3일 차)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항암제가 들어간 날=1일 기준
1-2일 차= 컨디션 괜찮음 (퇴원해서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있는 정도의 컨디션-스테로이드의 위력!)
3일 차= 오후부터 서서히 약기운이 떨어지기 시작. 그래도 버틸 만 함.
4일 차= 항암 최대 고비. 전신 근육통, 울렁증 시작, 변비 혹은 설사 시작, 호중구 주사 부작용의 여부에 따라 오한 또는 발열. 항암기간 중 가장 괴로운 날.
5-6일 차= 4일 차보다는 조금 나아지지만 여전히 오심으로 밥을 먹기 힘들고 부종으로 다리가 뻑뻑함. 무릎이 아파 걷기가 어려움.
7일 차= 울렁증이 살짝 있지만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 근육통은 없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는 않음.
8-10일 차= 몸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낌. 입맛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
10일 차 이후~21일 차인 항암 전날까지= 살 것 같음. 여전히 부작용 관리를 해야 하고 체력이 예전과 비교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하며 잘 지낼 수 있는 컨디션. 감사하고 행복한 기간.
물론 사람마다 같은 항암제라도 부작용이 다르고, 부작용 기간도 다르고, 또 항암제의 종류마다 나타나는 부작용이 다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부작용 증상이다.
감사하게도 난 울렁증으로 음식 먹기가 어려운 기간이 3-4일이다. (4일 차부터 7일 차까지) 며칠만 고생하면 다시 입맛이 돌아오고 아주 잘 먹는다. 항암을 하면 모든 점막세포가 공격을 받아 약해지기 때문에 구내염도 생기고, 항문도 잘 찢어지고, 콧속이 헐어 피가 나기 때문에 증상에 따라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항암 부작용이 힘든 건 사실이다. 처음 항암이라 버틸 수 있었지 만약 이번 항암이 끝나고도 또 다른 항암제로 약이 바뀌어 항암이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하면서 항암 기간이 길어진다면... 이것 역시 지치고 힘들고 계속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하지만 처음 항암을 하며 그래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부작용에 대해 미리 알고 적극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항암을 하러 갈 때마다 교수님께 정리해서 드린 쪽지들
내가 병원에서 무슨 약을 받았고, 언제 어떤 약을 먹어야 하고, 며칠이나 먹었고, 약의 효과는 어땠고, 추가로 어떤 증상이 나타났으며 따라서 무슨 약이 더 필요한지...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약의 종류가 무엇이고 얼마나 남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교수님께 알려 드렸다.
그랬다. 모를 땐 두렵고 무섭기만 했다.
이제 항암의 실체를 알았기에 더 이상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실체를 직면하는 것이다. 막상 해보면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을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부작용의 대부분이 신체적 불편함과 고통을 초래한다면, 감정적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슬픔을 가져다줄 수 있는 부작용이 하나 있다. 바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이다. 모든 항암제가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지는 않지만 내가 맞고 있는 항암제는 머리카락이 빠지는 약물이라서 난 내 머리카락도 빠질걸 알고 있었고 마음의 준비도 충분히 했다. 그래서 쿨하게 내 머리카락과 이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머리카락과 헤어질 결심...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