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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디 Nov 12. 2024

05. 대머리 앵무새와 대머리 앵집사

반려조와 머리털 이야기

" 안녕하세요, 아이고 이뻐, 귀여워,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꼬끼오, 갔다 왔어?, 보리야, 보리 밥주까?, 옳지! " 내가 키우는 앵무새 보리가 할 수 있는 말들이다.


2021년 9월 1일 한 앵무새 카페에서 아직은 이유식을 먹고 있는 2개월 된 왕관앵무를 입양했다. 코로나 시기에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준 내 인생 첫 반려조 보리... 보리의 털 색깔과 무늬를 보고 떠오른 최초의 단어가 보리라서 이름이 보리가 되었다. 왕관앵무는 외모에 따라 노멀, 루티노, 알비노, 펄, 시나몬, 화이트페이스, 파이드 등등으로 나뉘는데, 보리는 펄 수컷이다. 보리를 입양하고 6개월 뒤 왕관앵무 한 마리를 더 입양했는데 그 앵무의 이름은 "귀리"다. 추가로 계속 다른 앵무새들을 입양했다면 아마 이름이 "현미" "기장" "수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보리(펄-수컷은 털갈이 후 회색이 됨)와 귀리(루티노)

보리가 털갈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털갈이가 끝나질 않는다. 이상 증상이 계속되자 특수동물 병원을 검색했고,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가 부산에 있는 한 동물병원에서 PBFD 진단을 받았다. (*PBFD는 앵무새 4대 질병 중 하나로 앵무새 부리 변형과 털 빠짐 증상을 동반하는 난치성 질병이다) 이후로 보리의 털이 계속 빠지더니 놀라거나 호기심이 생기면 90도 직각으로 쭉 뻗어 올라가는 긴 우관도,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빨간 볼터치도 사라져 버렸다. 머리는 대머리가 되어 버렸고, 날개의 털은 거의 다 빠져서 더 이상 날수도 없다. 날개가 있어도 날수 없다니... 가엾은 보리. 보리를 볼 때마다 얼마나 속상하고 눈물이 는지 모른다. 내가 펑펑 울고 있으면 보리는 영문을 모른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마치 "이때가 기회다" 하는 것처럼 쪼르륵 달려와 부리를 사용해 어깨 위로 올라온다. 정말 사랑스러운 앵무새다.

어쩌다 보니 보리와 내가 둘 다 대머리가 되어버렸다. 첫 항암을 하고 한 달 반동안 요양병원에 있었기에 난 보리와 귀리를 만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리를 다시 만났을 때 보리에게 내 민머리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보리야~너도 머리가 없는데 나도 머리가 없지? 머리가 없어져서 이상하지? 나 누군지 알겠어?"

달라진 내 모습을 보리가 알았을까 몰랐을까? 어쨌든 여전히 보리는 내 껌딱지다.


"14일의 마법" 항암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이다. 머리가 빠지는 항암제의 경우 항암을 하고 14일이 되면 거짓말처럼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한다. 그 말을 듣고 내 머리도 빠질 거라 생각은 했지만 10일이 지나도 잘 붙어있는 머리를 보면서 왠지 내 머리만큼은 빠지지 않을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14일이 가까워지자 머리가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14일째에는  주먹씩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타이밍이 온 거다. 머리를 밀어야 한다. 요병에서 만난 유방암 선배 언니가 이발기가 있으니 머리를 밀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뜻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언니, 저 내일 외래 가는 날이라 일단 머리를 숏컷으로 자르고 난 뒤에 좀 적응되면 밀게요. 고마워요" 언니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음날 외래진료가 있어 병원 근처 한적한 미용실을 검색했다.


"어차피 며칠 있다가 다 밀어야 할 텐데 그래도 커트로 해줄까요?" 알고 보니 원장님은 대학병원 근처에서 미용실을 25년간 운영하시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암환우의 머리를 밀어주셨다고 한다. 별의별 사람들을 봤는데,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머리 미는 것을 힘들어하고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통곡을 하시는 분도 계셨다고 한다. 반면에 젊은 사람들은 머리미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 남기기도 하고 비교적 담담한 태도였다고 하셔서 좀 의외였다. 난 어리고 젊은 사람일수록 힘들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숏컷을 하고 며칠 후에 결국 머리를 밀게 도와준 사람이 생겼다. 바로 유방암 단톡방의 "보댜미님". 내 항암 동기다. 어쩜 나와 똑같은 항암제에 항암 입원 날짜까지 같다. 내가 항암 하러 병원에 가는 날 보댜미님도 병원에 간다. 가기 전 단톡방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단톡방의 다른 환우들의 엄청난 응원메시지를 받는다.

내 항암 동기 보댜미님이 용기 내어 머리를 밀었다며 민머리사진 한 장을 올리셨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왠지 나도 밀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내 머리카락과 이별할 결심을 하고 요병의 유방암 선배언니 방에서 머리를 밀었다. 언니도 민머리라 (나 혼자가 아니라) 위안이 되었다.


달라진 외모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다. 거울을 볼 때마다 왠 낯선 사람이 서있는 것 같고 아무리 봐도 내 모습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암선고를 받고도 단 한 번 울지 않았던 내가, 이제 누가 봐도 영락없는 암환자 같은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웃음으로 눈물을 애써 덮어버렸다. 앞으로 더한 일도 헤쳐나가야 하니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랬을까? 보리를 위해서는 펑펑 소리 내어 울면서도 나를 위해서는 울음을 잘 삼켜버린다.


항암을 하면 동기들이 많이 생긴다. 대학병원 동기, 요양병원 동기, 항암날짜동기, 유방암 단톡방 환우들 등등. 이런 동기들이 정말 큰 힘이 된다. 서로가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쉽게 친구가 된다. 나이도 상관없다. 내 친한 요병동기는 74세 아주머니, 항암날짜동기는 90년생이니까...

항암을 앞둔 사람이라면 항암 기간을 잘 이겨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궁금하다. 나에겐 이 두 가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화에서는 그 두 가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전화-04. 항암-그 실체와 마주하다/ 항암제와 부작용

다음화-06. 항암 중 가장 필요한 것/ 두 가지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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