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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Feb 10. 2021

어디까지 가봤나요 라디오 드라마의 세계

이미지 시대의 청각 매체



TV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다. 우리 어머니 기억 속에 어릴 적 시골집에서 꼴 죽을 쑤면서 듣던 <태권동자 마루치> 이야기부터  나 어릴 적 KBS FM의 단막 창작극들과 누가 누구인지 이해도 못하면서 간간히 스치듯 들었던 MBC의 <격동 50년>의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는 그다지 선명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요즘 세상에 누가 라디오 드라마를 챙겨 듣겠는가 싶었다. 그러던 중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팟캐스트를 알게 되었다.

4k도 넘어서 VR도 등장한 엄청난 영상 기술의 발전과 영상기반 소셜미디어와 유튜브가 대세인 요즘에 단순히 청각만을 통하는 매체인  팟캐스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유명한 팟캐스트 방송의 대부분은 동영상을 찍어 음성은 팟캐스트에 동영상은 유튜브에 올리는 방식을 많이 취한다. 그러나 팟캐스트만의 매체적 특성을 적극 활용해 익명성을 확보하고 그를 통해 동영상이라면 하지 못했을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팟캐스트의 세계를 돌아다니던 중 뜻밖에 그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라디오 드라마를 다시 만났다.
민간단체에서 만든 라디오 드라마 채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KBS 라디오 극장>의 발견이었다. 포맷은 길게 1시간을 달리던 이전 시대의 러닝 타임과 달리 인터넷 시대에 맞춰 1화당 20분 내외로 나뉘어 있었다. 소재도 전보다 발랄하고 젊어져 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무엇보다 정통 성우 연기의 맛깔스러움이 좋았다. 왜 성우 덕질을 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전통과 노하우 덕인지 퀄리티에 있어서도 다른 제작사에서 만든 것보다 더 나은 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휴학을 하게 되었을 때 잠을 못 이루는 새벽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온 BBC 라디오 드라마를 발견했다. 현대 배경의 형사물이었는데 영어라서 어려울 줄만 알았지만 막상 들어보니 효과음이 세련되면서 현장감 있게 생생했고  배우의 연기가 영화를 화면 내려놓고 듣는 것처럼 사실적이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모든 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어떤 상황인지 바로 전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긴장감도 적당해서 꽤나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자꾸 찾아서 듣다 보니 어느새 60년대에 녹음한 작품까지 찾아내게 되었다. 저작권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렇게 오래된 라디오 드라마까지 외국인 내가 듣게 된 것은 그 불법적인 일을 한 채널 덕이었다. 물론 곧 그 채널은 제제 조치를 받았다. 여하간 생각보다 시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도 좋았고 가끔 유명한 소설과 연극을 각색한 라디오 드라마도 있었고 베네딕트 컴버베치 같은 제법 유명한 배우들이 참여한 라디오 드라마도 있었다. 영국 라디오 드라마는 성우가 아니라 일반 배우가 많이 녹음을 한다.

이후로는 BBC도 팟캐스트에 요즘 하는 라디오 드라마의 일부를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찾아가서 들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BBC 외의 영미권 민간 프로덕션에서 만드는 라디오 드라마도 있었다. 요즘 듣고 있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Campfire Radio Theater>는 30분 정도 분량의 단막 호러극인데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고 서스펜스가 살아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많은 스토리 중심의 호러 컨텐츠가 있고 나도 꽤 좋아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전문 배우가 배역을 정해 드라마를 녹음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나름 신선했다.

눈을 사로잡는 현란한 이미지의 시대, 청각 매체의 라디오 드라마의 존재는 아날로그적 포근함을 선사한다. 아침 일찍 헐레벌떡 출근했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도착한 겨울밤, 외투를 벗고 부엌으로 가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만든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라디오 드라마를 켜고 이어폰을 꽂는다. 눈을 감고 몸을 뒤로 젖히고 천천히 힘을 빼고 소파에 등을 파묻는다. 귓속에서 낯선 장소에 와 있다. 배우들의 대화로 또 다른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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