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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Mar 13. 2021

Schadenfreude

샤덴프로이데

제나와 지노는 키득거렸다.

“저 수염 좀 봐. 빅풋이야 빅풋.”

더러운 작업복과 장화에 공구 벨트를 두른 남자는 구레나룻부터 턱 아래까지 이어지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보통 성인 남성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유난히 긴팔을 늘어뜨린 채 어기적 어기적 걷는 품이 눈에 띄었다.

제나와 지노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앞서가는 남자를 가리켰다. 지노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제나에게 넘기고는 양팔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구부린 다음 과장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제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 공기를 뒤흔드는 웃음의 폭발음에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멈춰 섰다. 곧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몇몇이 짧은 웃음을 비쳤다.

그 소리에 앞서가던 덩치 큰 남자는 멈춰 섰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남자는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노는 빅풋 흉내를 계속 내면서 유인원 특유의 찌푸린 듯 만 듯 무심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지노를 아는 학생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앞서가던 남자는 또다시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만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웃다가 문득 고개를 든 제나가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지노의 어깨를 찔렀다. 지노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곧 지노는 도전적인 표정으로 더욱 우스꽝스럽게 걸었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한치도 변하지 않고 덤덤했다. 그 변함없는 무표정이 오히려 오싹했다. 지노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자세가 스르르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동요 없이 영원처럼 지그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조용히 돌렸다. 그리고 그 특유의 걸음걸이로 서두름 없이 걸어서 복도 모서리로 사라져 갔다.

남자가 사라지자 멈춰 서있던 일부 학생들이 긴장을 무너뜨리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시 걸어갔다. 지노의 친구들이 그의 곁을 지나치면서 어깨를 두드리고 갔다. 제나는 어색하게 그의 곁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지노는 씨근거리며 발을 굴렀다. 그는 달리다시피 성큼 걸어가더니 남자가 사라진 복도 모퉁이 뒤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제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전의 작은 사건은 언제 있었냐는 듯 학생들이 넓은 복도를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단지 반질반질한 석재 바닥 위에 흙 발자국 만이 복도 저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제나는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가자 그 발자국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거기 멈춰서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친구를 찾았다. 왼편 모퉁이에서 친구가 돌아 들어오고 있었다.

“그 자식 어디 있어?”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붉으스레 한 얼굴로 지노가 물었다. 제나는 대답 대신 흙 발자국을 눈으로 훑다가 엘리베이터 문에 시선을 멈췄다. 지노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더니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댔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앞으로 디뎠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이 메아리쳤다. 바닥모를 검은 엘리베이터 통로 아래서. 제나도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다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게 학생들이 놀라 몰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긴급구조번호로 전화를 건다, 또 몇은 무슨 일인지 주변에 물어본다며 웅성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인파 속에서 황망하게 방황하던 제나의 눈에 저 모퉁이에서 손이 하나 쑥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손은 무릎 높이의 표지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위험! 엘리베이터 점검 중’



소란으로부터 며칠 후 오후였다. 봄의 공기는 어스름과 함께 화단에 심긴 덤불 식물의 향기를 창문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제나는 홀로 호젓해진 복도를 걸어갔다. 생각에 잠긴 듯 눈길을 내려 뜬 제나의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제나는 소스라치며 멈춰 섰다.

“제나?”

“아, 조교님.”

삐쩍 마른 젊은 남자가 한 손으로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다른 손으로는 작게 손인사를 했다.

“마침 잘됐네. 소식 들었어?”

“네?”

“네가 장학금을 받게 되었어.”

“정말요?”

“그래. 지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 애는 어떻…….”

제나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러자 조교가 서둘러 말끝을 흐렸다.

“여하튼, 세미나는 잊지 말고. 그럼…….”

조교는 서두르지 않는 척하느라 애쓰는 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지났다. 제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서 있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제나는 다시 시선을 내린 채 굳은 표정으로 계속 걸었다. 그리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을 지나쳐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1층에 다달았을 때였다. 저만치 보이는 입구로 그녀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영이 보였다. 커다란 덩치, 구부정한 어깨, 늘어뜨린 긴팔.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입구 너머 계단참에 학생 둘이 나란히 마주 보며 이야기 중인 것이 보였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제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일부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로 입구를 지났다. 이어서 남자의 옆을 지나치는 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낡은 체크무늬 플란넬 셔츠를 입은 덩치 큰 여자였다. 피식,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며 제나는 안도의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물론 그녀 자신 빼고는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바보."

제나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제나의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경쾌하게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뒷모습은 총총이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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