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희생양이자 위대한 원천이 된 가여운 것들
* 영화 속 일부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삶은 일종의 모험과도 같다.
무지에서 출발해 이 세상의 모든 선과 악, 쾌락과 고통을 알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생의 의미를 압축할 수 있는 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설령 남들과는 다른 외관을 가졌더라도,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우린 모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태어나고 또다시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진리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벨라(엠마 스톤)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일반인의 시선에서 다소 이해하기 힘든 서사와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창조한 백스터 박사(윌렘 대포)의 실험실에서 갇혀 살면서 박사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그들의 기괴한 행동과 독특한 창조물은 벨라의 세계관이 처음부터 일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다소 이질적이라는 점을 각인시켜 준다. 그렇게 평생을 실험실 안에 갇혀살던 벨라는 우연찮게 실험실을 방문한 유명한 카사노바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반해버린 벨라는 그가 제안하는 세계 여행에 동행하기 위해 박사를 설득하고 또 설득한 뒤,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한 특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던컨 웨더번의 도움으로 실험실에서 나오게 된 벨라는 그 후 전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의 이면과 문화를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벨라는 자신이 몰랐던 세상의 잔혹한 면에 충격을 받고 실신하기도 하며, 자신이 몰랐던 다른 이들의 독특한 개성에 흠뻑 빠져버리기도 한다. 벨라의 여행 일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느끼게 되는 감정과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단어 하나 발음하기도 힘들었던 벨라는 어려운 철학 용어들도 달달 외울 만큼 똑똑해지기도 하고, 처음으로 내가 아닌 남을 위하여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내놓는 선행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녀가 겪는 일들은 이 사회의 나름 높은 계급과 위상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 받는 교육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는 몸으로 부딪히면서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여전히 본능적인 감각에 휩쓸려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영화는 이러한 벨라의 본능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거리낌 없이 배출하는 자연스러운 행위로써 연출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 속에 비치는 귀족들의 옹졸한 모습이 관객들의 웃음거리로 전략하기도 하는데, 벨라를 하나의 여성의 육체로서 탐미하며 수백 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즐겨 하는 던컨 웨더번이 지속적으로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즐겨 하는 벨라의 외설적인 모습을 지적하는 행위는 다소 웃지 못할 풍자극으로 비치는 예시 중 하나다. 귀족들도 겉으로는 체면을 중시하면서 속으로는 벨라와 같이 섹스와 소유욕에 대한 열망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인간의 본능은 크기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벨라가 지닌 독특한 가치관은 중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방대한 모험 일지와 함께 세계관을 크게 휘젓는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가치관을 버리면서 새로운 풍습을 취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자아의 흐름은 변치 않고 굳건히 남아있다. 이러한 벨라의 성장은 극 중의 인물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점으로도 해석할 여지를 제공해 준다. 벨라가 극 중에서 보여주는 반사회적이면서 외설적인 행동은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고, 수치심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귀족 집단에게 멸시를 당하기도 하지만, 벨라의 이러한 행적은 극 중 사회 분위기와 관습에 정면적으로 대항하는 일종의 혁명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보수적인 사회의 틀을 깨버리고 인종, 성별,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쟁탈하는 벨라 백스터야말로 진정 사회에서 박수받지 못한 가여운 것들이라 칭송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영화는 벨라에게 그녀를 지지하고 동조해 주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이 남겨놓음으로써 그 누구도 벨라에게 함부로 손가락질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영화 속 벨라의 삶은 그 누구의 삶보다 매력적이면서 고귀한 모습으로 비쳐줬다.
<가여운 것들>은 기존에 란티모스 감독이 선보였던 다소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연출과는 거리감이 있어 아쉽다는 평도 있지만, 화려하면서 레트로한 미술과 배우들의 정열적인 연기가 영화의 재미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란티모스 필모그래피의 위상과 대중성을 한껏 높여줄 그의 최고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월 10일 미국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진행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여운 것들>이 수상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이 필자의 의견을 뒷받침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