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호박 정식 시기
밤호박 모종을 키우다 보면 고민되는 순간 중 하나가 정식 시기다. 모종을 언제 하우스나 밭으로 옮겨 심어야 하는지 매년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밤호박은 본잎이 3~4장 정도 나오면 정식을 시작하지만 실제 밤호박 정식 시기는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봄 날씨는 하루 사이에도 기온이 크게 달라져서 정식 타이밍을 잡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싹이 먼저 올라왔던 밤호박은 어느새 본잎이 두 장이 되었다. 3월 5일쯤이었다. 파종했던 전체 분량의 3분의 1정도가 훌쩍 자라 있었다. 예년 같았으면 이쯤에서 이미 정식을 시작했을 시기다. 모종이 이만큼 자라면 더 늦기 전에 땅으로 옮겨 심어야 한다는 걸 몸이 먼저 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토요일마다 출근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제일 유난스러웠던 건 날씨였다.
봄이 오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날씨. 따뜻해질 듯 말 듯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 기온이었다. 내 마음이 그러건 말건 모종은 자기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트레이 속에서 자라는 호박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넓어졌다. 마치 “이제 좀 넓은 데로 옮겨 주세요” 하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농사는 타이밍이라고 하지만, 그 타이밍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날씨였다.
많이 자란 모종 때문에 농부님이 조금 서둘렀다. 농원 일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틈틈이 시간을 쪼개 준비했다. 비료를 뿌리고, 땅을 갈고, 관주를 설치하고, 하나씩 셋팅을 마쳤다.
4번 하우스(보배동)는 3월 7일에 비료와 살충, 살균제 등을 살포하고 경운을 했다. 다음 날인 8일에는 관주를 설치하고 오후에 농부님과 함께 멀칭 작업을 했다. 그리고 3월 9일, 첫 정식을 시작했다.
그날 아침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밤사이 된서리가 내렸기 때문이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 보니 다시 겨울이 온 것처럼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이른 아침에 시작하려던 계획은 잠시 미뤄야 했다. 그래도 9시가 조금 지나 햇살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햇빛이 비치니 조금 숨통이 트였다. 오후의 일정을 위해서 더 늦출 수는 없어 정식을 시작했다.
모종이식기의 도움을 받으니 모종을 심고, 복토하기까지 순식간이었다. 매년 느끼지만 밤호박 농사를 처음 시작하던 해에 ‘모종이식기’를 알려주신 분께는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덕분에 정식 속도가 빨라졌다.
아침 서리가 내렸을 뿐 햇살이 강하지 않고 구름이 낀 날씨라 오히려 일하기에는 괜찮았다. 너무 햇살이 강하면 일하는 사람도, 작물도 힘들다. 적당히 흐린 날씨 덕분에 오전 동안 두 줄을 후다닥 심고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정식 후 옮겨 심은 녀석들이 안전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 터널을 만들고 이불(부직포)을 덮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이불을 걷고, 덮는 게 일상이 될 것이라는 걸 안다.
3번 하우스(보영동) 정식은 3월 11일에 진행했다. 아침 기온은 영하 3도였다. 날씨가 왜 이러나 싶었다. 일기예보상으로는 오늘까지만 아침 기온이 낮은 걸로 나오는데 제발 예보가 맞기를 바랬다. 9시쯤부터 정식을 시작했다. 기온이 영상으로 오르기 시작하자 하우스 안은 빠른 속도로 여름이 되었다. 모종이식기로 심은 밤호박도 잎들이 쳐지기 시작했고, 내 손도 느려졌다.
벌써 더위를 먹은 걸까. 복토를 하다보니 중간에 3군데 모종을 심지 않았다. 앞에서부터 복토해 오던 농부님께 알려주고, 다시 모종삽으로 열심히 흙으로 덮었다. 정식을 마치고 빼 먹은 곳은 채워 넣었다. 하우스 안이 여름이 되다보니 정신을 못차리는 건 모종이나 사람이나 같았던 모양이다.
아직 하우스 두 동이 남아 있어 날씨와의 밀당은 계속 된다. 이번 주에 셋팅을 마치고 다음 주에 정식을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데, 추가로 파종한 밤호박 모종이 덜 자랐다. 게다가 첫 정식을 마치고 빡세게 일을 몰아치다보니 농부님이 몸살이 나기도 했고, 다음주 햇섭 심사가 있어 일이 많다. 그래서 농부님은 조금 더 천천히 할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
밤호박 파종할 때 수량 계산을 내가 했는데 너무 빠듯하게 예상한 듯 하다. 모종이 부족할 것 같다. 아니, 부족하다. 나의 계산에는 90% 발아와 100% 성장이 전제되어 있었다. 발아율은 99% 였으나, 녀석들의 성장은 예상과 달랐다. 밤호박 농사 10년차이면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년에는 남더라도 좀더 넉넉하게 파종해야겠다.
이처럼 농사는 내 생각대로 흘러간 적이 없다. 늘 선택의 연속이었다. 내가 아무리 일찍 심고 싶어도 서리가 내리고, 모종이 덜 자라면 어쩔 수가 없다. 언제나 타이밍은 그들이 결정했고, 할 지 말 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었다. 완벽한 답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하나씩 해 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