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가끔 현실이 된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밤호박 모종 정식하던 날

by 농부아내


어제(3월 20일)는 2번 하우스, 작년까지 ‘보미동’이라 불리던 하우스 정식 날이었다.

2차로 파종했던 밤호박 모종은 커가고, 날씨는 오락가락하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이번 주 수요일 있었던 햇섭 심사 때문에 농부님은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내가 트랙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해봤지만, 파괴왕인 내가 애써 지어놓은 덕이랑 하우스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3월 19일 목요일, 심사를 무사히 끝낸 농부님이 오전에는 관주를 설치하고, 오후에는 둘이서 으쌰으쌰 비닐 멀칭 작업을 했다. 땅끝보배농원에는 나름의 직원 복지가 있는데, 그중 내가 마음에 드는 건 장화를 무상으로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귀농 초기에 시어머니가 사주신 장화를 꽤 오래 신었는데 어느 날 보니 찢어져 있었다. 그래서 재작년에는 대표님(농부님)이 알리에서 장화를 하나 사주셨다. 그런데 그 장화는 얇고, 발목은 길고, 바닥도 얇아서 신을 때마다 불편했다.


지난 3월 8일, 다른 하우스 멀칭 작업을 하려고 그 장화를 신고 나갔다가 발가락 쪽이 찢어져 버렸다. 장화 안으로 흙이 그대로 들어왔다. 당장은 작업을 해야 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버텼다가, 3월 11일 밤호박 정식을 마치고 나서 당당하게 말했다.


“새 장화 사줘.”


일할 때 필요한 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대표님은 말없이 바로 주문을 넣었다. 이번 장화는 국산인 것 같았고,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에 반짝반짝 광까지 나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그 광은 멀칭 작업 하루 만에 사라졌다. 흙으로 뒤덮인 장화를 보며 ‘그래, 너의 운명은 이거지…’ 싶었다.




다음 날인 3월 20일 금요일 아침, 공기가 싸늘해 9시가 되어서야 작업을 시작했다. 농부님이 호박 모종 트레이를 소독약이 담긴 통에 담가 뿌리를 흠뻑 적셨고, 그 트레이를 받아 하우스로 나르는 걸로 내 일은 시작된다. 양손에 하나씩 들 수도 있지만, 들고 가다가 떨어뜨릴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옮기듯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하나씩 들고 간다. 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양손에 트레이를 들고 농부님을 따라다니며 간격에 맞게 전달한다. 물에 젖은 트레이는 생각보다 무겁고, 그 무게만큼 마음도 복잡해진다. ‘이거 떨어뜨리면 어쩌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배치가 끝나면 본격적인 정식이 시작된다.

농부님이 트레이에서 모종을 하나씩 빼 모종이식기에 넣어주면 땅에 꽂아 심는다. 손이 바빠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제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사실은 늘 상상하던 일이었다. 농부님이 트레이를 들다가 그만 놓쳤고, 그대로 멀칭 비닐 위로 모종들이 쏟아졌다.


모종엎은 흔적, 일이 끝나고 나서야 핸드폰을 꺼냈다


그 순간 잠깐 스친 생각.

‘아… 숏츠 각인데…’


상황이 상황인데도 영상 생각이 먼저 떠오른 게 조금 웃겼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 중요한 건 모종이었다. 현재 모종이 부족한 상황이라 하나라도 못 살리면 정말 난감해진다. 일단 살릴 수 있는 것부터 살리기로 했다. 하나씩 집어 모종이식기에 넣고 빠르게 심었다. 다행히 줄기가 완전히 부러진 건 없었지만, 떡잎이 떨어지려 하거나 줄기가 꺾인 녀석들도 있었다.


‘살아줘라… 제발…’




트레이를 나를 때마다 불안한 마음에 비슷한 상상을 했다. ‘이거 엎으면 어떡하지?’ 그 상상은 늘 상상으로만 끝났는데, 어제는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농부님 손에서. 농부님도 밤호박 농사 9년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약간 허탈해했다.


내 상상을 현실로 바꿔 준 어제의 상황을 떠올리니 괜히 더 욕심이 난다. 이왕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거라면 이런 거 말고, 집을 새로 짓는다든지, 하늘에서 돈이 쏟아진다든지, 그런 쪽이 더 좋지 않을까.


농부님아, 그런 상상도 한 번쯤 현실로 만들어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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