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느리지만 여전히 가는 중입니다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곧바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면허증은 지갑 속에 잘 들어 있었지만, 차 열쇠는 여전히 남편의 손에 더 익숙해 보였다. 읍내에 나갈 일이 생기면 나는 자연스럽게 남편의 일정을 먼저 떠올렸다. “오늘 바빠?” “장을 봐야 하는데…” 말을 꺼내는 방식은 늘 비슷했다. 상대의 시간을 빌리는 일이니 미안한 마음도 따라왔다.
남편이 바쁘면 다음 날로 미루거나, 아예 일정을 바꿔야 했다. 당장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지금은 어렵겠다’는 말을 들으면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내 일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함을 남겼다.
면허증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운전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은 비슷했다. 집 앞에서 차를 움직여보는 것과 실제 도로 위에 올라가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도로에 차들이 많아지면 어깨가 저절로 굳어졌다. 혹시나 내 실수로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가 두려워 결국 나는 다시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면허증은 있었지만 운전자는 여전히 남편이었다.
남편에게 간간히 도로연수를 받긴 했지만, 읍내를 나가는 일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일정이 바빠 아이들 라이딩이 불가능한 일이 생겼다. 무려 일주일 동안 택시를 불러 아이들 등하교를 해결했다. 그 일주일 동안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 남편과 아이들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이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며칠 전부터 운전연습을 학교까지 했고, 이제 내게 제일 편한 길은 아이들 등하굣길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삶이 갑자기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낯선 길은 긴장이 되었고, 차가 많은 시간에는 마음이 바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 차가 한 대 밖에 없어 남편의 일정을 떠올려야 하는 건 변함없지만, 내 마음만 내키면 운전대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다 보면 하루가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이 많다. 비가 갑자기 내리기도 하고, 주문이 몰리기도 하고, 아이 학교에서 전화가 오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 예전에는 그 과정에 항상 ‘누군가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내가 움직이려면 누군가의 일정이 먼저 비어 있어야 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일이 생기면 내가 먼저 움직일 수 있다. 차를 몰고 읍내에 다녀오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다시 돌아와 하우스 일을 이어간다. 하루의 흐름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생겼다.
운전을 잘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내비게이션을 화면을 보고, 음성까지 듣고도 엉뚱한 길로 들어갈 때가 있다. 주차는 더 어렵다. 주변에 차가 서 있으면 네모칸 안에 넣는 일은 아직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능숙함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움직이다 보면 조금씩 익숙해진다는 것을.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차를 움직이는 일이 아니었다. 내 하루의 방향을 내가 조금 더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시간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생기면서, 내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졌다.
요즘도 마당에 주차된 차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저 차가 특별히 좋은 차라서 내 삶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차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달라졌을 뿐이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아직 능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차가 마당에 서 있고, 내가 그 운전석에 앉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전에는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시작되던 일들이 이제는 내 손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제 스스로 움직이는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