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같은 신호등에서 만나게 된다

5부. 느리지만 여전히 가는 중입니다.

by 농부아내


운전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찌그러질 때가 있다. 분명 서두르지 않아도 될 길인데 백미러를 보면 차 한 대가 뒤에 딱 붙어 있다. 나는 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경적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초보”라는 이유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내가 너무 느린 건 아닐까, 괜히 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속도를 조금 올린다. 하지만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면 결국 브레이크를 밟는다. 나를 앞질러 가려고 바짝 붙어 있던 차도 결국 멈춰 선다. 그렇게 급해 보이던 차도 결국 같은 신호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운전대를 잡기 전에는 조수석에 앉아 남편의 말로만 기억되는 장면이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뒤꽁무니에 붙었다가 옆 차선으로 옮긴 뒤 다시 우리 차 앞으로 와서 쌩~하고 앞을 향해 달린다. 그때마다 남편은 “조금만 가면 신호등이 있어서 결국은 서야 되는데..”라고 말하곤 했다.


직접 운전대를 잡고 보니 도로는 생각보다 자주 멈추는 곳이었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톨게이트 앞에서, 공사 구간에서, 비 오는 날 시야가 흐려질 때. 차들은 끊임없이 멈추고 다시 출발한다. 느리게 운전하는 나는 그 장면이 마음에 든다. 잠깐이지만 모두 같은 속도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기 전에는 누군가의 속도를 신경 썼다. 직장을 다닐 땐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기의 진급이 부러웠고, 퇴사한 후 의젓한 사장님이 된 동기의 모습에 나는 아직 이 자리인가 싶었다. 농사를 시작하고 나서도 비슷했다. 누군가는 시설을 새로 들이고, 온라인 광고에 자주 제품이 등장하는 걸 목격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더딘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농사를 짓다 보면 속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다. 폭우가 내리면 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장화를 신고 나가도 흙이 발목까지 들러붙어 한 발짝 떼기가 어렵다. 그럴 때는 밭머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려야 한다. 처음에는 그런 날들이 불안했다. 이러다 다른 농가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밭도 멈추고, 사람도 멈춘다. 도로 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바쁘게 달리던 차도 빨간 신호 앞에서는 멈춘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




삶에도 빨간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아침을 먹으며 콧물을 훌쩍이는 아이를 보며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라는 말을 한다. 살짝 미열이 있는 아이를 보면 열패치를 이마에 붙이고, 해열제를 대기한다. 그 와중에도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하우스에 나가야 했다. 계절은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빨간 신호를 무시하려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지, 이 정도는 참고 가야지 하면서 하루를 밀어붙였다. 그러다가 아이의 코에서 노란 콧물이 흘러내리고, 미열이 고열이 되면 이건 빨간 신호등에 불이 켜진 거다. 방금 전까지 하우스에서 밤호박을 만지며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병원 의자 위에서 가만히 멈춘다. 그때 비로소 숨을 고르게 된다.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도 그랬다. 하우스에서 밤호박을 수확하고, 수확한 밤호박은 택배 포장을 해서 판매해야 했다. 할 일이 쌓여 있었고, 아이들 일정도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 가야 했다. 운전대를 잡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내 속도로 달렸다. 서두른다고 해서 길이 짧아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신호등 앞에 서 있을 때면 차 안이 잠깐 조용해진다. 앞차의 브레이크 등이 붉게 켜져 있고, 그 몇 초 동안 나는 숨을 한 번 고른다.


도로 위에 다른 차들과 함께 달리면서 나는 삶의 속도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빠르게 달리고, 어떤 날은 천천히 가고, 어떤 날은 멈춰 서서 기다린다. 그 모든 시간이 이어져 길이 된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서두르지 않는다. 뒤차가 경적을 울리면 잠깐 신경이 쓰이긴 한다. 그래도 내 속도를 크게 바꾸지는 않는다. 어차피 다음 신호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서 배운 가장 단순한 사실은 빨리 간다고 해서 항상 먼저 도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멈춘다고 해서 길이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게 운전하지 못한다. 교차로에서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낯선 길에서는 속도를 줄인다. 그래도 괜찮다.


내 차는 아직 도로 위에 있다.

엔진도 꺼지지 않았다.

나는 조금 느릴지 몰라도, 여전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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