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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Nov 22. 2017

⎨COVER STORY⎬
"부메랑의 궤적"

BOOKDIO COVER STORY


부메랑은 원래 돌아오지 않는것이 보통이었다. 

약 5만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주의 암각화에 부메랑은 이미 등장한다. 흔히 알고 있듯이 당시 부메랑은 사냥도구로 만들어졌다. 사냥도구로서 부메랑의 덕은 먼 거리를 빠르게 날아 사냥감을 타격하는데에 있었을 뿐, 던진 이에게 돌아오는 데에 있지는 않았다. 회귀하는 부메랑은 놀이를 위해 만들어졌다. 더 나은 사냥용 부메랑을 만들기 위한 실험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는 던진이에게 돌아오는 모습이 부메랑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 사냥이라는 기능적인 측면 역시 부메랑의 전형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부메랑의 전형이란 어림잡아 5만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형성된 모순적 요소들의 결합체이다. 사실 사냥을 위한 부메랑은 직선으로 비행할 뿐이며, 유턴 비행을 하는 부메랑은 원시인의 장난감일 따름이었다. 두 종류의 부메랑이 가진 비행궤적과 기능을 믹스매치한 결과물이 우리들 머릿속에 자리잡은 부메랑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에만 존재하는 가공된 현실이 나은 왜곡된 관념 중 하나인 것이다. 



악당을 공격한뒤 주인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은 모순적 산물이지만, 최대한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하는 영상 컨텐츠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내린 셈이다. 두종류의 부메랑을 놓고, 그 기능과 비행궤적을 생각해보자. 먼저 사냥용 직진 부메랑. 사냥은 현대인이 쉽게 경험할수 없는 재미있는 소재이지만, 직선의 비행궤적은 크게 놀랄것 없는 광경이다. 뉴턴이 발견했듯이 앞으로 던진 물체는 쭉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놀이용 유턴부메랑. 분명히 앞으로 던졌는데 뉴턴의 운동법칙을 무시하며 뒤로날아 돌아오는 궤적은 놀랍기 그지 없으나, 놀이라는 활동은 전례없는 잉여생산을 누리는 현대인에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영상 컨텐츠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기능과 상식을 벗어난 비행궤적을 합쳐, 사냥용 유턴부메랑이라는 허구의 부메랑을 발명해 냈을 것이다.


현대인의 관념적 부메랑에 대한 분석은 이만하고, 손에 잡히는 물적 부메랑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현대인에게 물적 부메랑의 본질은 사냥이라는 불필요하면서 비효율적인 기능보다는, 유턴형의 비행 궤적에 있다. 우리들은 널찍한 한강공원에 새를 사냥하러 나가진 않으며, 흔히 친구들과 캠핑 하며 놀러 나간다. 하늘을 향해 날렸을때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한낱 나뭇조각일 뿐 부메랑이라 칭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에게 물적 부메랑이란 기능과는 무관하게 날아 돌아오는 나무조각이라 할수있다. 


어찌됐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부메랑의 모티프는 다양한 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정작 부메랑 실물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엑소의 부메랑이라는 노래는 사랑하는 이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끝없이 돌아가게되어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을 담아낸다. 혹은, 천둥의 신 토르가 악당에게 던진 묠니르는 마치 ‘부메랑’처럼 토르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렇게 부메랑의 모티프는 숱하게 봐왔지만, 진짜로 다듬어진 나무조각으로서의 부메랑을 내가 처음으로 목격하기가지는 대략 3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호주 브리즈번 공항의 기념품 가게에는 십여자루의 목재 부메랑이 위에서 아래로 진열되어있었다. 대략 80센치는 될만큼 기다란 것부터, 겨우 20센치 가량 되어보이는 짤달막한 것까지, 다양한 길이였다. 진열대에 쓰여진 설명에 따르면, 어느정도 길이가 되어야 유턴하는 비행궤적을 그릴수 있는 모양이었다. 비행 궤적을 기준으로 나누자면, 아래쪽 절반은 유턴부메랑, 위쪽 절반은 직진부메랑이었다. 물론 여기서 직진 부메랑이라 함은, 5만년전 암각화에 등장하던 사냥용 직진부메랑이 아닌, 사냥용도 놀이용도 못되는 무늬만 부메랑을 말한다. 유턴 부메랑이라 함은, 사냥용은 아니지만 5만년쯤 전에도 시간이 남을때 재미삼아 한번씩 던져졌을법한 놀이용 부메랑을 말한다. 나는 주로 직진부메랑과 유턴부메랑을 번갈아 바라봤지만, 이따금씩 두 부류의 교차점에 자리잡은 어중간한 길이의 부메랑에도 눈길이 갔다. 


나는 낯선 여행지의 소비자로서 그 물건들을 관찰하며 가치를 따져봤다.  


조그마한 직진 부메랑은 그 어떤 기능적인 가치도 없다. 오로지 낯선 땅 호주에 있었던 시간을 상기시키는 상징적인 장식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이다. 혹은 내가 호주에 다녀왔다는 사실에 어느정도 신빙성을 부여할만한 증거물로서의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만약 내가 부메랑을 직접 날려보고 싶은 마음이라면 더더욱이 직진 부메랑은 거들떠볼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다. 어차피 날려봤자 원형의 비행궤적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진 부메랑의 몰가치는 결코 내 탓이 아니며 그놈이 그렇게 짜리몽땅하게 태어난 이유일 따름이다. 



그에 반해, 꽤나 길죽한 유턴부메랑은 놀이라는 분명한 기능적인 가치가 있다. 처음부터 이 부메랑을 제대로 날릴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유턴 부메랑이 유턴 비행을 할수있게 만드는 과정에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그럴수만 있다면 나는 5만년전 만들어진 나뭇조각 놀이를 체득하는 셈이 된다. 우리나라의 옛 선인들에게 활쏘기가 그랬듯이, 부메랑은 즐거운 놀이이자 때로는 마음을 가다듬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턴 부메랑은 나의 미숙함으로 제대로 날지 못할지언정, 꾸준히 연습만 한다면 멋진 원형 궤적을 그리면서 나에게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직진과 유턴부메랑 중간에 자리잡은 한자루의 나뭇조각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나무조각에 일말의 기능적인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날려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길이가 어중간하기 때문에 웬만큼 능숙하지 않은 이상에는 제대로된 궤적을 그리기는 힘들 게 뻔하다. 그렇지만 웬만큼의 길이는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무늬만 부메랑이라는 딱지를 섣불리 붙일수도 없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고 멀리 날아가 떨어지고 마는 실패한 비행은 내탓을 하기엔 어중간한 부메랑 길이가 걸리고, 길이탓만 하기엔 내 실력을 키울만한 여지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듯 했다. 이 어중간한 부메랑의 가치는 내가 그걸 어떻게 날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게 아닐까.


모든것이 모호해진 마음탓인지 나는 내 인생의 몇가지 난제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난제들이란 그 근원을 아직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문제들로, 타고나길 이 모양으로 타고난 탓인지 아니면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여태껏 알수없는 사안들이다. 예를들어 나는 조지오웰의 1984를 읽기위해서 여러번 시도했지만 아직 반도 읽지 못했는데,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책 내용이 지겨운 것도 아니고, 내가 한권의 책을 정독못할만큼 게으른 것도 아니다. 수도없이 노력해 봤으나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다. 몇번의 이별역시 마찬가지다. 헤어진 연인을 떠올려보면, 그사람이 애초에 나와는 오래갈수 없는 스타일이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라는 자책을 지울수 없다. 인연이 아닌건지, 내가 잡지못한 인연인건지 아리송하다. 못다읽은 책이든, 끝나버린 인연이든 답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의 문제이다. 


길이가 애매한 부메랑에서 시작해 다분히 개인적인 삶의 난제까지 생각하다보면, 내가 왜이러고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갖게된다. 그것은 애매함을 용납하지 않고 어떻게든 대상을 규정하려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본능이라기 보다는 학습되어진 습관적 욕망인지도 모른다. 진열대의 부메랑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래서 가운데 얹혀있는 저 부메랑은 돌아 온다는건지 만다는건지 명확하게 누군가 알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차오른다. 삶의 난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내 문제들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려준다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내가 궁금해하는 부메랑의 궤적이나, 못다읽은 1984, 연인과의 이별의 문제는 세상 그 누구도 정리해 준바 없지만, 나라는 사람의 가치는 세상 여러사람이 규정해 준바 있다. 세상이 규정하는 나의 가치란건 무서울만큼 단순명료해서, 100점 만점에 80점, 합격 또는 불합격과 같이 세글자 이내에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가치매김이다. 부메랑이 지닌 반반의 가능성을 못견뎌하는 내마음속 규정욕구는 사회의 이러한 측면과 닮아 있다. 이 세상은 기필코 당신을 규정하고 분류해버리고 말겠다는 각오로 덤벼든다. 그렇게 양질의 고등교육을 받을수 있는 대상이 정해지고, 일정수준의 월급을 받을 수 있거나 없는 부류가 나뉘어진다. 정치적으로는 여당 야당이 나뉘고, 사회적으로는 계층의 분포가 몇가지 스펙트럼 내에서 이루어진다. 


곰곰이 따져보면, 반반의 가능성을 지닌 부메랑 한자루도 여태껏 규정하지 못한 마당에 사람을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규정해도 괜찮은건지 의문이 든다. 편의상 진열대 가운데에 있었던, 어중간한 길이의 부메랑을 ‘반반부메랑’이라 칭하기로 하자. 인간은 반반부메랑과 같다. 그것을 직접 날려보기 전까지는 결코 가치를 규정할수 없다. 날려 봤다손 치더라도, 겨우 몇차례의 비행으로는 여전히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다. ‘부메랑을 날려본다’는 말은 참으로 가벼운 말이지만, 그것을 사람에 빗댄다면 ‘사람이 삶을 살아본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 된다. 


한편 이 세상은 부메랑 진열대와 같아서, 반반 부메랑만 잔뜩 쌓아두었다가는 갸우뚱하는 관광객의 지갑을 여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메랑을 그 길이에 따라서 장식용 직진부메랑 또는 놀이용 유턴부메랑으로 분명히 나누어 놓는 것이다. 이러한 진열대 앞에서 소비자는 명확히 가치를 판가름 할수 있게되고, 지갑을 열어젖힌다. 지인에게 건네줄 기념품 용이라면, 실제로 날진 않아도 장식용으로는 손색이 없고 값도 좀 저렴한 직진 부메랑을 구입할수 있다. 혹은 이 기회에 원주민이 되어 사냥까진 못하지만, 5만년전 생겨난 놀이를 즐겨볼 심산이라면 꽤 기다랗고 값도 좀 나가는 유턴부메랑을 구입할 수도 있다. 두 부메랑의 가치는 그렇다 친다면, 반반부메랑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나아가 어떤식으로든 우리를 규정하고 가치를 섣불리 매겨버리는 사회 속에서, 반반부메랑으로 남기를 고집하는 데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사회가 매겨주는 자신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반반부메랑과 같은 고유한 본성을 유지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반반부메랑은 팔리지 않을지언정 가능성을 품고있는 존재이며, 그 가능성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반반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누구도 그 부메랑을 확실하게 분류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직접 부메랑을 연거푸 날려 봐야만 그것이 제대로된 부메랑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있다. 더군다나 누가 날리느냐에 따라서 비행궤적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며, 시작된 이야기가 비로소 막을 내릴 때까지는 그 끝을 속단할 수 없다.  직진 혹은 유턴 부메랑은 그 이름표가 곧 결말과 다름없다. 반반 부메랑은 그러나, 마지막 비행이 끝나고 나서야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모비딕이라는 소설이 있다. 1800년대 미국 동부의 포경도시 낸터컷을 배경으로, 한 선장이 벌이는 고래와의 복수극 이야기다. 선장의 이름은 에이햅으로, 괴팍하기 짝이없는 괴짜선장으로 악명이 높다. 캐릭터에 걸맞게 기이한 소문하나가 그를 늘 따라다니는데, 그 소문이란 출처를 알수없는 하나의 예언이다. 흰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나아가 목숨까지 잃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에이헙의 운명을 한문장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물가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라고 그가 생각했다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었을 것이다. 이미 다리한쪽을 잃은채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아하면 이제 몸좀 사리라는 이야기를 해주고픈 마음도 든다. 



그러나 에이햅은 아랑곳 않는다. 고래뼈를 깍아만든 의족으로 버틴채 갑판위에 꽂꽂히 서서, 고래를 찾아 닻을 올리는 에이햅의 행동에서 한편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자신을 규정하려는 예언에 저항함으로써 에이햅은 마지막까지 반반부메랑으로 남는다. 그가 바다에서 복수에 성공하느냐, 파멸하느냐는 이야기의 끝자락에 다다라서 결정된다.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약 700여 페이지는, 신화와 역사속에서 드러나는 고래의 모습과 해부학적 묘사,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지, 원시문명과 서구문명의 충돌, 낸터컷 포경업계를 보여주는 생생한 묘사들로 장엄하게 수놓아진다. 


돌아보면, 브리즈번 공항의 부메랑에 붙어있던 딱지들 역시 하나의 예언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단지 부메랑을 만든 전문가가 좀더 합리적인 근거위에서 내린 진단이라는 점에서 좀더 그럴싸한 예언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십여자루의 부메랑 중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반반부메랑을 구매했다. 그것은 선물을 위한것도, 놀이를 위한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속에 삶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생애 첫 호주여행을 열린 결말로 남겨두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귀국후의 삶 역시도 전개를 알수없는 이야기로 열어두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이제 비행궤적을 알수없는 부메랑 한자루가 하늘로 날아갈 것이다. 반반 부메랑은 진열대의 한 가운데 자리를 꿰찰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Written by 박진용
suj20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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