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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Dec 20. 2017

⎨COVER STORY⎬
"무진이라는이름의 버킷리스트"

BOOKDIO COVER STORY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면 마냥 좋았던 어렸을 때와 달리, 머리가 좀 커지니 상대방과의 ‘케미’를 예측하는 나만의 체크리스트가 생겼다. 예를 들어, 피자를 나이프로 잘라먹는 사람은 밥친구가 되기 어렵고,  숟가락으로 맥주 병뚜껑을 시원하게 따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마음이 가더라,는 나만의 리스트.

그 중 나의 ‘별로야’ 리스트에는 ‘버킷리스트 만들고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도 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한데, 굳이 하고 싶은 일들까지도 리스트를 만들어서 성취해야 할 것 같은 압박과 노력을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실천하고 나서는 왠지 느낀 점도 써야할 것 같아서 말만 들어도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의 체크리스트를 수정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 히말라야에 다녀왔다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여행은 발리에서 서핑하고 포틀랜드에서 커피를 마셔야 하는 줄 아는데, 히말라야라니, 이렇게 신선할 수가!  하지만 히말라야 등반을 함으로써 20대에 이루어야 할  버킷리스트를 모두 완성했다고 뿌듯하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숨이 턱, 막혔다. ‘버킷리스트’란 단어 자체도 피곤한데, 버킷리스트 때문에 히말라야 등반을 실제로 다녀왔다니. 이거 피곤한 버킷리스트 예찬론자들보다, 한술 더 뜬 마조히스트적인 버킷리스트 예찬론자 아닌가.


다행히도 그는 자신이 왜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게 되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설명은 꽤나 합리적이었다. 자신의 일은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 호흡이 매우 길기 때문에, 버킷리스트를 지워가면서 지치지 않도록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마치 장거리 고속도로 운전이 지겨워지지 않도록 가끔 국도로 빠져나가 변화하는 풍경을 즐기며 운전을 하는 것처럼.


실제로 버킷리스트는 심리상담사들이 무료함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자주 처방해주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새로운 도전 목표를 만드는 것 자체가 쳇바퀴같이 반복되는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고, 생활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중년의 남성 개그맨들을 모아놓고 예능판 버킷리스트를 찍은 <남자의 자격>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오로지 버킷리스트만 적는 앱이 꾸준히 잘 팔리는 이유도, 우리 모두에게는 현실로부터 잠깐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버킷리스트’는 ‘죽다’ 의 뜻으로 쓰이는 속어인 ‘kick the bucket’ 에서 만들어진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두 노인들이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을 실행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이야기인 영화 ‘버킷 리스트’ (2007)가 상영된 뒤 더 자주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버킷리스트’ 를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사용하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은 많은이에게 도피를 하게 만드는 ‘죽은 삶’ 이라는 우울하고 슬픈 의미도 숨어있다.


‘버킷리스트’는 아니지만, 나도 주어진 순간을 견디기 위해 사용하는 묘책이 있다. 대부분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시간이 잘 가지 않을 때, 어색하고 지겨운 공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묻는 질문이다.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넌 무엇을 할래?’


혹시 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금 바로 떠나는 거요. 무진으로 가요, 우리.”


그리고 진짜 가다니 우린 정말 미쳤어! 라고 깔깔 웃으며 서울역으로 달려가 무진행 기차표를 사고, 서로에게 기대어 끼무룩 잠이 들었다가, 어느새 바뀐 공기의 온도에 눈을 뜨면 창문 밖으로는 자욱한 안개와 바다가 보이는 무진항으로 떠나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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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은 소설가 김승옥이 1964년 발표한 단편 소설로써, 한국에서 수능을 본 사람이라면 어렴풋이 ‘안개’와 ‘허무주의’ 라는 키워드로 기억할 소설이다. 주인공인 ‘나’는 ‘무진’이라는 탈일상적인 공간으로 여행을 가서 순수와 세속적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 모습을 가진 여성(하인숙)을 만나 잠시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과거의 자신을 무진에 묻어두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무진기행>을 스물아홉살의 가을, 이태원 모처의 디자인 문구샵에서 단지 책의 표지가 예쁘다는 이유로 구매하게 되었다. 소설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데, 아름다운 첫페이지와는 다르게 마지막 페이지는 뭔지 모를 불편함만 잔뜩 심어 놓아버렸다. 내가 주인공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실 나는 이상을 쫓는 순수한 ‘후배 박’ 도 되지 못하고, 출세를 목표로 사는 ‘중학 동창 조’ 도 택하지 못한 채 그저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기다리기만 하는 소극적인 ‘하인숙’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어서 불편한 것이 었을까.


무엇보다도 판타지가 가능한 소설이라면 주인공이 속 시원하게 무진보다 더 먼 곳으로 뜨거운 사랑의 도피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편지도 보내지 못하고 무진을 떠나버리는 주인공을 보니 이런 찌질한 엔딩이 또 있을 수 있냐며 작가를 찾아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나니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과거 속 ‘나’의 모습이 남아있는 무진을 묻어 두고 현실 속의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연 새드엔딩일까 아니면 헤피엔딩일까? 1년 전의 나였더라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의 선택은 정말 비겁하다며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 했을텐데. 하지만 나는 이제 “만약 무진에 남아있더라도 과연 주인공과 하인숙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라고 되묻게 되었다.


낭만적인 도피처였던 흐릿한 안개 속 ‘무진’ 마저도, 이 도시가 나의 현실이라고 결정한 순간 탈출하고 싶은

명확한 현실로 변화하고 만다. 그래도 무진에서 주인공은 서울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 나도 주인공처럼 현실적인 사람으로 변한 걸까? 이런 변화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쩌면 일상으로부터의 완벽한 일탈은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환상 속으로 떠나는 일탈이란 본디 현실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치이니까. 또렷한 얼굴의 서울을 떠나 도착한 불투명한 안개 낀 ‘무진’ 이라는 도시가 사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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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12월 첫째 주, 나는 오랫동안 사고 싶었던 책을 한 권 샀다. 약간의 과장을 더해 엘리트 국어사전 뺨치는 두께를 가진 <The Food Lab> 이라는 요리책인데, 왜 닭을 튀기면 껍질이 바삭해지는지, 왜 센 불에 고기를 빨리 구워 육즙을 가두는 것이 잘못된 요리법인지 과학적인 설명과 함께 레시피를 모아놓았다. ‘요리’란 모름지기 조리시간을 지켜서 전자레인지 버튼을 누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사실 전혀 필요 없는 책이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쓸데없는 책을 구매한 것을 정당화할 겸 나의 첫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견뎌야만 하는 시간을 버티느라 올해 많이 지쳤던 나에게 주는 셀프 처방전으로써.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2017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 첫 번째, 다시 글을 쓴다. 두 번째, <The Food Lab> 에 나오는 레시피를 따라서 3 개의 요리를 완성해본다. 세 번째,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스티커 사진을 찍는다. 네 번째, 즉흥적으로 기차를 타고 바다에 간다. 참고로 첫 번째 항목은 이미 지워졌고, 인정하긴 싫지만 꽤나 효과가 있었다!


혹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혹은 너무 무력화되어 어떻게든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은 의지마저 사라진 상황에 처해 있다면, ‘버킷리스트’ 라는 이름의 무진행 티켓을 사길 권한다. 두터운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불안하기만 하던 나의 모습이 어느새 또렷하게 보일 것이고, 순간 잔인하게 느껴질지라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두 발로 똑똑히 마주하게 되는 용기가 생길 테니까.

Written by 김보경
jasmineb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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