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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Dec 11. 2017

⎨BOOK REVIEW⎬
달콤한 노래

BOOKDIO BOOK REVIEW


주말의 공원. 아이들이 흙장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엄마들은 벤치에 삼삼오오 모여 이국적인 엑센트로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아이들이 놀이가 지겨워질 때를 기다린다는 듯한 모습이다. 아이들은 모처럼 찾아온 놀이 시간에 흙을 파고 다시 메운다. 누군가는 흙으로 공을 만들고 누군가는 집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이 흐트러질 때면 다시 흙을 판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아이들은 흙을 판다. 만든다. 무너뜨린다. 그렇게 끊임없이 흙을 파다 보면 언젠가는 놀이 시간이 끝날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간절히 바라고 있다. 즐거운 놀이 시간. 그것이 끝나길. 돌아갈 집이 없어 끝을 낼 필요가 없는 놀이 시간. 그것이 끝나길. 그들의 주말은 그렇게 반복된다. 


이것은 아주 평범한 유럽의 주말 공원 풍경이다. 백인을 제외한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공원에서 하염없이 놀고 또 노는 모습. 그러다 지친다 한들 돌아갈 곳이 없어 다시금 놀아야 하는 아이들. 그들의 부모는 평일에만 환영받는 이민자이며 누군가의 보모다. 보모가 평일 내내 돌보는 백인 아이들은 지금쯤 백인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공원에서 칭얼대고 있거나 근사한 카페 혹은 레스토랑에서 부모가 떠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아이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행운인지도 모른 채 타국으로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고, 어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허락된 여유를 즐기며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보모들은 집을 나서야 했다. 평일 내내 누구보다 오래 머물던 집이지만 주말에는 그곳을 비워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평일 동안의 집도 허락되지 않을 터이니 선택의 여지는 없다. 주인의 집을 나선 이들은 공원에 모인다. 일시적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이 찾는 곳이 바로 공원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선 밖을 넘는 것을 경계하며 해가 넘어가길, 이 지긋지긋한 주말이 사라져 버리길 빌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 <달콤한 노래>의 루이즈처럼 말이다. 



레일라 슬리마니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이자 공쿠르상을 안겨준 작품 <달콤한 노래>. 작품의 시작은 충격적이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둘이었다. 하나는 밀라, 다른 하나는 아당이다. 두 아이는 어떤 연유로 삶의 경계를 넘어섰고 이를 발견한 이는 아이들을 위한 디저트와 보모가 좋아하는 오렌지 케이크를 양손에 들고 집에 돌아온 엄마 미리암이었다. 


소설의 시작은 이처럼 충격적으로 보모가 아이 둘을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왜 아이가 죽었는지가 아닌, 그들이 각자의 원 밖으로 밀려난 까닭을.


폴과 미리암. 그들에게는 결혼을 매개로 생겨난 굴레가 있다. 결혼을 손에 쥐었기에 그들은 그 굴레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두 사람의 굴레는 튼튼했다. 적어도 결혼 초,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두 사람은 또 하나의 원을 그려야 했다. 그 원을 지키지 못하면 소중한 아이는 선 밖을 벗어나 아웃되는 그런 게임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잊힌 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이라는 굴레였다. 이것은 여자인 미리암에게만 적용되는 굴레였다. 미리암은 선택해야 한다. 결혼 전처럼 일의 원을 지켜나갈지, 아니면 그 게임에서는 아웃된 채 결혼과 육아라는 게임에만 참가할지. 여기서 폴과 미리암, 그리고 미리암과 두 아이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생긴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이 아닌 다른 원에 미리암이 머무는 것. 다시 말해 자신들이 하는 가족이라는 중요한 게임이 아닌, 별 볼 일 없는 게임에 시간을 보내는 미리암이 마땅치 않다. 반대로 미리암은 하고 싶은 게임을 폴과 아이들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 미치도록 서럽다. 그래서 서로는 골짜기를 판다. 한쪽은 다시는 이 선 밖으로 그녀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다른 한쪽은 원에서 절대 아웃되지 않기 위해 골짜기를 판다. 


문제는 폴과 미리암. 두 사람이 양분하고 공유해야 할 육아의 원이었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쳐질 수 없으며 그곳에서 아웃된다면 다른 모든 게임도 종료되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이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사한 소환수가 필요했다. 어떤 적도 한 방에 물리쳐줄 것만 같은 강력한 소환수.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불을 뿜지 않을 아주 착한 소환수. 그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그가 도착한다. 


루이즈. 소환수의 이름은 루이즈였다. 그녀는 아주 작은 체구에 선조차 흐릿해 보이는 보모 후보였다. 폴과 미리암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모습과 신뢰 가는 말투, 그리고 아이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것 같지 않은 흐릿함.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후보를 고려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은 루이즈를 고용한다. 두 사람의 생각대로 루이즈는 완벽히 자기 일을 해낸다. 집은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해졌으며 아이들의 머리는 단정해졌다. 그렇게 루이즈가 육아라는 게임을 완벽히 플레이하는 동안 폴과 미리암은 각자의 일을 즐겼다. 일, 결혼, 육아. 마침내 이 세 가지 게임에서 중앙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폴과 미리암이 게임을 진행해나갈 때 루이즈도 게임을 시작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루이즈의 게임은 절대 아웃되서는 안되는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루이즈는 간절했다. 폴과 미리암. 둘의 아이가 어떤 괴물이어도 보듬으며 지켜야 했다. 그래야만 원 밖으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시궁창 같은 자신의 집, 그리고 더러운 삶의 경계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게임을 위해 루이즈는 두 사람의 눈밖에 들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어떤 일도 미리암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진행하지 않았고 미리암이 원하는 일은 완벽히 해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미리암은 자신이 그들 가까이에 다가가고 있다 믿었다. 그럴수록 미리암은 자신이 그들의 온기 사이로 파고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예를 들면 그들의 휴가에 동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즈의 완벽함에 반한 미리암은 그녀에게 휴가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한다. 루이즈는 예상치도 못했던 그들의 제안에 보너스를 얻은 것처럼 기뻐한다. 하지만 그런 루이즈를 걱정하는 시선이 있었다. 


“너무 즐기는 인상을 주지는 마.
네가 너무 재미있어하면 안 좋게 볼 거야.”


이것은 루이즈가 잊어선 안되는 게임의 룰이었다. 선 밖으로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게임. 루이즈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다. 폴 부부가 그녀를 ‘보모’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로 떠난 휴가에서도 루이즈는 미리암 부부의 룰을 지켜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원 안에 함께 있기 위해서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되며 아이가 울면 옆에는 루이즈가 있어야 하는 룰. 그것을 지키면 지킬수록, 가족 사이에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루이즈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미리암 가족의 원.  하나로 합쳐진 줄 알았던 그 원 사이에는 파리 20개 구 만큼이나 두꺼운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이것을 깨닫는 순간 루이즈는 한겨울의 벤치에 앉아 있는 자신이 보였다. 자신의 뼈는 점점 삐걱대는 소리를 내는데 아이의 몸은 자신을 양분 삼았는지 거대하게 커져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장면은 게임의 끝과 다르지 않았다. 선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임의 끝.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낡은 지폐 한 장뿐이었다. 루이즈는 허벅지에 숨겨둔 자신의 마지막 지폐를 꺼내 마지막 게임을 이었다. 


루이즈에게는 커가는 아이가 아닌 작고 말 못 하고 연약한 아이가 필요했다. 어리면 어릴수록 좋았다. 그런 아이가 있다면 모든 것이 평화로울 것이다. 폴과 미리암은 안정된 삶에 즐거움을 더할 것이며 자신은 아이를 돌보며 원 안에 머물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한 이불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 그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그저 겹겹이 쌓인 위를 평생 올려다보는 일이 있더라도 쳐다볼 수 있는 권한. 즉, 게임을 이어갈 수 있기만 하다면 좋았다. 이를 위해 폴과 미리암은 섹스를 해야 했고 아이를 가져야 했다. 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 사라져야 마땅했다. 루이즈 자신을 포함해 밀라와 아당도 집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를 위해 루이즈는 두 아이와 외출을 나섰고 마지막 남은 지폐를 하찮은 음식을 사는데 써버린다. 그 음식이 아이들의 입에 들어가는 시간 동안 루이즈는 간절히 바랐다. 폴과 미리암.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지 않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지 않아 아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더는 게임을 이을 지폐 한 장 남아 있지 않다면. 
그렇게 추락해 선 밖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것이 소설의 질문이다. 레일라 슬리마니 작가의 <달콤한 노래>는 결국 알게 모르게 선을 그어야 하고. 선에 들어가야 하며, 선으로 경계를 짓는 현대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모두가 선을 긋지만 아무도 선을 지우지 않으며, 모두가 더 나은 선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그 선의 경계는 점점 좁아지는 현실.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미리암이고 모두가 루이즈이며 또 모두가 단 몇초만에 죽은 아이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소설은 묻고 있다. 이미 나뉠대로 나뉜 경계를 더 촘촘히 나누며 우위에 섰다 자위할 것인지. 위가 아닌 옆으로 선을 그으며 새로이 마주한 이들과 인사를 나눌 것인지. 이것이 무의미한 질문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탁상 위에서 맴도는 끝없는 토론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질문의 답은 이미 소설의 첫 페이지에 나와 있으니 말이다.  



Written by 최동민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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