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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Mar 25. 2018

⎨COVER STORY⎬
같은 표정


얼굴이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대한 높은 곳에서 주위를 경계해야 하고, 멀리서 풍기는 음식의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며, 보다 안전히 먹이를 입으로 먹어야 해서 일까? 아니면 왕관을 쓰기에 가장 적절한 신체여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얼굴로는 균형을 잡기도 무언가를 집기도 어려워서일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인간은 척추동물의 하나이고 척추동물이라면 모름지기 얼굴이 신체의 시작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앞의 이유도 일견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런 필연적인 진화의 과정 덕분에 우리에게 얼굴은 신체중 어떤 부분보다 중요해졌다. 특히 얼굴을 가진 타인을 만날 때는 더욱 그렇다. 


시간을 돌려 중세의 시대로 가보자. 그때 사람들은 평생 동안 기껏해야 200명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한계였다. 이동 수단의 제한과 생활방식의 제약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나의 얼굴을 인식하는 타인의 수라고 해봐야 200명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토록 적은 숫자 속에서 우리의 얼굴은 지금보다 나태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매일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 맞춰 표정을 바꿀 필요도 없고,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눈빛과 미소를 보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그저 200명의 얼굴과 200개의 상황에 적응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다. 이제 단 하루에도 새로운 사람 200명을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사람을 마주하는 상황 역시 수십 가지 경우의 수로 나뉘어 우리의 안면 근육을 괴롭게 만든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에게는 진화론이 있으니까. 


한때 인간은 우리가 표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신의 선물이라 믿었다. 그 선물은 단순히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도 표정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미묘한 감정들. 예를 들어 미간을 약간 찌푸리거나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는 것. 잔뜩 두 눈에 힘을 준다거나 입을 쭉 내미는 것…. 모두 분류를 하기에도 벅찰 만큼 우리의 얼굴은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인간 스스로가 믿었다. 


하지만 신의 축복을 기도하는 이들 옆에서 조용히 책을 쓰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찰스 다윈이었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표정 변화>라는 책을 통해 표정 변화가 인간에게만 주어진 신의 축복이 아님을 밝혔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표정을 바꿀 수 있고 이를 통해 의사소통 표현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표정의 변화 역시 “진화”해 나간다는 것을 말했다. 


이 같은 다윈의 주장에 신을 믿는 이들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졌을 것이다. 반대로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턱관절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은 동그랗게 뜬 채 다윈의 책을 읽었을 것이다. 결과만 말하자면 다윈의 증명은 대부분이 그렇듯 정설이 되어 받아들여졌고 인간의 표정 변화 역시 신의 선물이라기보다는 기능에 의해 자연히 개발된 진화의 산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연구도 시작되었다. 표정이 단순히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던 얼굴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중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하나 꺼내 들어 보자. 그것은 표정 변화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수히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표정 변화가 책이나 영화를 볼 때가 아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 보다 활발히 일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즉, 혼자서 콘텐츠를 감상할 때보다 사소한 이야기라도 같은 인간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더욱 큰 표정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전화나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보다 직접 마주 보고 대화를 할 때 표정 변화가 더 강렬히 일어난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했을 때 구텐베르크를 통해 열렸던 출판의 시대나 뤼미에르 형제로부터 시작된 영화의 발명, 1 페니 우체국으로 시작된 우편 산업의 발전과 무선 통화와 메시지 기술과 같은 통신 기술의 발전은 표정과 얼굴의 진화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우리 얼굴의 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교통과 건축의 발달일 것이다. 더 빠르게 다양한 장소를 갈 수 있고, 한 곳에 수없이 많은 이를 담을 수 있는 건축물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타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 마을 단위의 소규모 인원만 만났던 사람들이 이제껏 본 적도 없는 타지의 사람을 쉽게 만난다거나 심지어 인종과 국가가 다른 이의 얼굴도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우리의 표정과 얼굴은 보다 빨리 진화해야 했다. 


그뿐 아니다. 우리의 얼굴은 이제 언제든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 전 세계로 전송될 수 있다. 또한 원한다면 우리 역시 전 세계인이 올린 사진 속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며 그야말로 일상과도 같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얼굴과 표정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을까?


“진화”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보다 다양한 타인의 표정을 마주하면서 우리도 그만큼 다양한 표정을 습득했을 것이다. 그를 통해 표정에 담긴 각기 다른 감정의 공유 역시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것은 생각과 정서의 공감으로까지 뻗어나갔을 것이다. 


이제 “진화”를 부정적 측면에서 바라보자. 전제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다양한 타인의 얼굴과 표정을 통해 보다 넓은 단위의 표정을 습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감의 영역까지 뻗었을까?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분량에 눌려 재미없는 책을 후르륵 넘기듯, 표정 역시 의미 없이 넘기고 있다. 공감의 영역으로 한 발을 뻗기는커녕 중세의 감옥에 갇힌 듯 두꺼운 얼굴의 책에 피로감을 느낀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현재 우리의 얼굴과 표정의 진화를 예측해볼 수도 있다. 전자가 정답이라면 문제는 없다. 앞으로의 통신이나 교통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전제조건을 선사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교감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문제가 생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전제 조건은 똑같이 늘어날 텐데 그것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피로감은 증폭될 것이다.  그 결과, 표정과 표정 사이에 두꺼운 벽, 혹은 알 수 없는 표정의 가면이 덧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피로감은 한 가지 질문을 남길 것이다.


“넌 왜 우리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니?”


다양한 표정을 나누며 신기해하던 시기를 지나 다양한 표정이 범람하는 시기에 이른 우리는 이제껏 생각지 못한 질문을 떠올린 것이다. 왜 저들은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왜 저들은 나와 다른 말을 하고, 왜 저들은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까? 


정말 왜일까? 왜 그런 생각에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일까? 획일화, 민족주의, 군중심리… 그런 획일화된 사회를 거부했던 이들의 표정 위로 어떻게 저런 의문 부호가 떠오른 것일까? 그리고 저 질문은 우리를 어떤 진화의 길로 이끌 것인가? 그 답은 당신의 얼굴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타인과 마주했을 때 짓는 당신의 표정이 알고 있을 것이다. 긍정이나 부정. 타인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때 그것은 신의 축복이라 불렸을 정도니까. 하지만 타인의 표정을 보기도 전에 그것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통의 기본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표정과 얼굴의 진화 조건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얼굴은 타인과 소통을 하기 위해 다양하게 발달했는데 소통이 아닌 피아의 구분을 위해서 표정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진화를 역행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다시 또 한 번 진화의 갈림길에 선 지금. 거울의 방을 나와 물어보자. 

같은 표정, 그것은 편리한가?

그리고 또 다른 질문.

같은 표정. 그것은 표정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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