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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Mar 18. 2024

봄, 맛, 두유


수능이 끝난 뒤 처음 아르바이트하고 월급을 받은 김보통 작가. 그는 갖고 싶던 캠코더를 하나 사고, 남은 돈으로 외할머니에게 드릴 내복과 두유를 샀습니다. 왜 두유였을까? 누군가 묻는대도 딱히 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두유였기 때문이라는 두루뭉술한 대답 외에는 말이죠.


외할머니는 얼마 전, 자리에서 일어나다 쓰러져 골반 벼가 부러졌습니다. 그 뒤로 내내 방에만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외할머니를 불쑥 찾아간 작가는 준비한 선물을 외할머니께 건네주었죠. 그러자 할머니는 힘들게 번 돈, 너나 쓰지 뭘 이런걸 사 오고 그러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방 안의 온도는 어느새 훈훈해진 기분입니다.


그냥 가기 아쉬웠던 작가는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오면서 찍은 다양한 풍경들을 할머니께 보여드렸죠. 할머니는 별것 아닌 그 영상도 손자가 찍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액정에 집중했습니다.


어느새 찍어둔 영상을 다 보여준 김보통 작가. 작가는 이번엔 외할머니를 찍기로 마음먹고 렌즈를 할머니에게 돌렸죠. 그러자 할머니는 할 말 없다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작가는 그런 할머니에게 무슨 말 좀 해보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할 말 없다며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죠.


할 수 없어진 작가는 할머니께 “밖에는 봄이 왔어요. 꽃도 많이 피었어요”라며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꽃이 피었단 말이여?”라며 깜짝 놀란 표정이었죠.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걸까? 작가는 처음엔 의아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집을 둘러보고 난 뒤, 의문은 풀렸죠.


몸이 아파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할머니의 방에서는 아무리 창문을 열어도 맞은편 건물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봄이 이미 찾아왔음에도 봄인 줄 모르고 지내셔야 했던 것이죠.


그해 봄. 할머니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김보통 작가는 ‘개나리꽃이라도 좀 찍어 보여드릴걸’ 내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봄의 맛이 두유가 된 것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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