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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ul 17. 2017

⎨COVER STORY⎬
하루키를 들이켜다

BOOKDIO COVER STORY



1.

 여기는 회사의 사무실이 아니다. 전기와 수도, 그리고 가스 요금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나의 집이다. 지금 나는 겉보기에는 고급 나뭇결이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합판 덩어리인 1인용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에는 15인치 노트북이 놓여 있고, 팬이 몹시 흥분된 듯 돌아가고 있다. 사람 귀에 거슬리기 딱 좋은 주파수의 소음. 이 소음 덕에 얇은 티셔츠 안팎으로 열이 쌓이기 시작한다. 선풍기를 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의자에서 일어나면 다시 이곳에 앉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만 같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이다. 어서 일을 마치고 노트북을 닫아 버리는 것. 그것이 모든 구원의 해답이다. 

 소음의 불규칙한 박자에 맞춰 키보드를 두드리고 현란하게 마우스를 움직인다. 하지만 노트북은 어제 다툰 배드민턴 복식조의 동료처럼 미묘하게 호흡이 어긋나 자꾸만 오타를 낸다. 수정을 할 때마다 바짝 목이 타오른다. 물을 가지러 갈까? 이내 생각을 접는다. 지금은 물을 마셔선 안 된다. 바로 옆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있는 얼음물이 놓여 있대도 손도 대서는 안 된다. 

 떨리는 손으로 인터넷 브라우저를 연다. 오늘따라 자동 로그인된 메일 사이트는 로그인이 풀렸는지 다시 아이디와 암호를 요구한다. 대문자와 숫자, 특수문자를 섞어 보안을 강조해야 해서 억지로 바꾼 비밀번호는 칠 때마다 오타를 낸다. 이제 2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았다. 두 번 더 비밀번호를 틀리면 메일에 로그인할 수 없다. 물론 방법은 있다. 그들은 핸드폰 인증으로 나를 확인할 테고, 다행히 나는 핸드폰이 있다. 물론 사무실에 놓고 왔지만. 

 성공. 다행히 성공이었다. 안 읽은 메일 3통은 열어볼 시간이 없다. 막 완성한 문서를 담당자에게 보내고 재빨리 인터넷 브라우저를 닫는다. 마른 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의 팬 소음이 멎는다. 잠깐의 침묵. 온몸의 열을 공기 중으로 날려버린 나는 다소 가벼워진 걸음으로 부엌을 향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그것을 꺼낸다. 손바닥에 전기가 오를 만큼 강렬한 냉기가 전해 진다. 병따개를 쥔 오른손을 그것에 가져간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식탁 위를 구른다. 

 콜라일까? 아니, 그러지 말자. 이건 맥주다. 


'하루 끝자락에 마시는 차가운 맥주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지도 몰라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문장처럼 나는 지금 맥주를 마신다. 

아니 들이킨다. 



2. 

 하루키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들 중에도 하루키의 맥주 사랑을 아는 이들은 많다. 그만큼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과 에세이, 잡문 곳곳에 맥주를 차갑게 식혀 놓았다. 실제로 그의 맥주 사랑을 마케팅에 사용하려는 일본의 맥주 회사에서 CF 제의를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하루키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 맥주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하는데 그의 소설만큼이나 그럴싸한 이야기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외부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본업에서 하루키는 진정한 맥주 홍보대사이다. 그의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150여 페이지 정도의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하지나 그 짧은 소설에 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56번이나 등장한다고 한다. 3페이지에 한 번씩은 맥주를 마셨다는 것인데, 만약 어떤 소설가가 맥주 회사에서 의뢰를 받아 소설을 쓴대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맥주 장면을 넣지는 못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이 정도니 그의 삶이 녹아있는 에세이에서 맥주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달리기 매니아로서 마라톤을 즐기는 하루키는 한 에세이에 이런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가슴속까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42킬로미터라는 아득한 거리를 달려야 한다는 것은, 가끔 너무 잔인하게도 느껴진다.
어쨌든 마지막 5킬로미터는 맥주, 맥주하고 중얼거리면서 달리게 된다.”

 누군가 하루키에게 가장 맛있는 맥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자 하루키는 기린, 삿포로와 같은 브랜드를 대거나 페일 에일, 라거, 둔켈과 같은 종류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맥주의 존재를 말하기에 앞서 상황을 말했는데 그의 대답은 예상하셨듯이 “42킬로미터를 뛰고 난 뒤 마시는 맥주.”였다.



 가장 맛있는 맥주. 그것의 정의는 누구에게나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쌉싸름한 에일을 누군가는 목 넘김이 좋은 라거를 또 누군가는 하이네켄 혹은 기네스를 좋아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가장 맛있는 맥주의 정답으로 내놓기는 머뭇거려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 답에 상황이 담겨있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보자. 나는 페일 라거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방금까지 차가운 콜라를 바닥이 보일 때까지 빨아 마셨다. 이미 배는 가득 찼고 몸의 온도는 체감상 5도는 내려간 것 같다. 그런 상황에 내 테이블 위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양조장인이 만든 페일 라거 한 잔이 먹음직스러운 거품으로 무장한 채 등장했다. 나는 그것을 마신다. 평소 같으면 네 번은 꿀꺽거려야 했지만, 이상하게 두 번의 목 넘김을 채 마치지 못하고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내게 갑자기 방송국 마이크가 다가와 묻는다. 


 “가장 맛있는 맥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3. 

 술을 목으로 넘긴다는 것은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넘기는 것이다.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이러니와 서사다. 권여선 작가는 자신의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를 발표하며 이런 작가의 말을 남겼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 때의 그것과 닮았다.
‘술'과 ‘설'은 모음의 배열만 바꿔놓은 꼴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거짓 ‘설'을 연기하던 나는 어느덧 크게도 아니고 자그마하게 ‘설’을 푸는 소설가가 되었다.”



 권여선 작가의 말처럼 술을 마시기 직전, 목까지 쌓였던 사건. 즉 ‘설’은 술을 넘기며 아래로 쑥 내려갔다 단말마의 탄성으로 다시 뱉어진다. 술잔과 안주가 놓인 테이블 사이에 그렇게 서사가 놓이는 것이다. 대부분은 이 서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글이나 더 크게 봐서 소설 같은 어려운 것과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알콜 중독이었던 그는 몸이 너무 안 좋아져 잠시 금주를 하는 기간에도 맥주는 끊임없이 마셨다. 그런 그에게 친구들은 금주 중이 아니냐 물었지만, 스콧 피츠제럴드는 맥주는 술이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술을 마시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맨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해.
그건 감정 없이 이성으로만 쓴 글이라 그래.”

 그의 말을 한 주정뱅이의 있어 보이는 변명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당대의 문장가 존 치버는 그의 말을 돕기라도 하는 듯 이렇게 말했다. 


 “술이 주는 흥분과 상상이 주는 흥분은 아주 흡사한 면이 있다.”

 그 외에도 헤밍웨이, 카버, 심지어 괴테와 셰익스피어까지. 작가들이 전하는 술에 대한 예찬은 끝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이쯤 되면 권여선 작가의 말처럼 ‘술'과 ‘설'은 분명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4.

 의심에 조금 깊이 다가서 보자.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에 나오는 인물들은 터키의 전통주 라크를 마신다. 물과 1:1로 희석해 마시는 이 술은 물과 섞이지 않았을 때는 투명하지만 물을 넣으면 하얗게 변하는 신기한 술이다.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특히 이 술을 많이 마시는데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내내 나에게 ‘작은 도련님’이라고 하다가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케말 씨’로 명칭을 바꾼 지배인에게 아버지는 수뵈레이(얇은 밀가루 반죽 층층이 치즈나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페이스트리), 소금에 절인 다랑어 같은 안주와 라크를 주문했다. 식당의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작은 토마토를 집어 향기를 맡으며 라크를 급히 들이켜는 아버지를 보자, 그의 머릿속에 할 말이 있지만 어떻게 꺼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장면은 주인공 케말의 아버지가 케말에게 무언가 어려운 이야기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술을 마셔야만 깊이 간직해온 설을 말할 수 있는 상황. 이런 상황 역시 '술'과 '설’을 연결해주는 관계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순수 박물관>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인데,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공통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술'을 마시며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어찌나 자주 나오는지 해외 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어떤 이는 "저 초록 병은 무슨 마법의 병이길래 마시기만 하면 진실을 말하냐."고 물었다는 '설'이 있다. 

 다시 '술'로, 아니 '설'로 돌아가 보자. 존 치버의 말처럼 술과 설이 주는 상상은 맞닿은 곳이 있다. 이 명제를 증명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경험이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케말 혹은 홍상수 영화 속 술자리와 그 앞에 놓인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껏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존 치버,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를 비롯한 많은 작가의 경험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5. 

 테이블에 놓은 맥주잔을 다시 집는다. 여름밤 온도에 벌써 미지근해진 맥주잔에서 처음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딱 빈 잔만큼 오른 취기와 흥분은 어떤 서사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둘이라면 함께 나누는 ‘설’의 서사가 그 흥분을 돋아줄 것이고, 혼자라면 맥주잔 옆에 놓인 하루키의 혹은 어떤 작가의 서사가 흥분을 배가시켜줄 것이다. 지금은 가장 맛있는 맥주가 무엇이냐 정답을 찾을 시간이 아니다. 


“소설은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가설을 무한정 쌓아가는 것.”

이라고 말한 음주 선배 하루키의 말을 믿을 시간이다. 



Written by 최동민
1984romaingar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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