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건 나뿐인가.
얼마 전에 독립잡지를 같이 만들던 동지들을 만났다. 사실 '이거 다 끝나고나면 다시는 안보리라'고 다짐했던 사람도 몇 년 지나니까 보고싶어지던데, 아끼는 사람들은 어지간하겠나. 아무튼 만나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잡지 만들던 때 얘기도 나오고, 독립잡지 팀에 들어가기 전 이야기도 나왔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독립잡지 팀에 들어간 것, 꽤나 명백한 이유가 있었구나.
도저히 왠지 모르겠고, 나도 왜 그랬나 모르겠다만 세상에는 꼭 잡지를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에디터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야겠어!'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말이다. 솔직히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에이... 하지마... 힘들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떻게 세상이 효율적으로만 돌아가겠나. 잡지 직접 만들어보는 거 정도는 인생에 낭비라고 하기도 어렵다. 까짓거 만들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만드세요!
아, 축하축하. 이제 가장 쉬운 단계는 끝났다. 누구나 마음먹는 건 쉬운 탓이다. 나도 22살에 잡지를 내 손으로 처음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참고로 실제로 뭘 만들어 내기까지 한 1년 걸렸다. 아, 내가 게으른 탓도 있는데, 솔직히 그때만해도 뭘 어떻게해야 잡지를 만들 수 있는 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어서 그랬다. 1년 중에 한 10개월은 어떻게 하는 지 몰라서 헤맨 기간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잡지에 관련된 책은 적다. 거의 없다. 이번에 박찬용 선배가 쓴 '잡지의 사생활' 정도가 다다. 모쪼록 에디터를 꿈꾸시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셨으면 한다. 나는 에디터는 아니지만(못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건 그래도 잡지 만든다고 빨빨대면서 돌아다닌, 한 4년동안의 깨달음따위보다 유의미한 이야기가 많다.
아무튼 솔직히 인생 나 혼자 개고생하고 망하는 거 너무 억울하긴 한데, 그래도 독립 잡지 만들어보고 싶으신, 얼마나되실지 모르는 분들도 시간 낭비하는 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고, 게다가 어쩐지 간간히 독립잡지 만드는 것에 대해서 문의주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글로 남긴다. 게다가 독립 잡지 만들던 몇 년의 치열함을 기리는 의미다.
아래 내용이 이게 모든 경우에 맞는 건 아니고, 내가 만들던 잡지 + 메이저 잡지사 어시 경험을 통해 추가한 것으로 쓴 것이니 참고만하자.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아, 그건 좋다. 그럼 이제 동료를 모아야한다. 루피가 혼자서는 해적왕이 못되는 것처럼 잡지도 혼자서는 못 만든다. 사실 제일 어려운 과정이다. 인생은 루피처럼 아무나 막 골랐는데, 전부 다 사기꾼처럼 재주좋은 놈들만 골라지지 않는다. 물론 만들기로 결심한 여러분이, 기획안도 잘 내고, 글도 잘 쓰고, 사진도 잘 찍고, 사람 섭외도 잘하고, 영업도 잘 하고, 디자인도 할 줄 알고, 메이크업이나 아트웍도 할 줄 알고, 취재력도 뛰어나다면 혼자해도 된다. 다만 나는 그런 완전체 같은 사람은 본 적도 없고, 본다면 당장에 도망쳐버릴 것 같으니까 없다고 전제하겠다. 그러니까, 본인 역량 밖의 동료를 구해야한다. 필요한 영역은 다음과 같다.
글 : 잡지에 글이 들어간다면 필요하다. 기획력도 있어야 한다. 필진을 구해와야하니까 사람 섭외도 할 줄 알아야한다.
사진 : 잡지에 사진이 들어간다면 필요하다. 기획력도 있어야 한다.
아트웍 : 아트 화보나, 일러스트가 들어간다면 필요하다.
메이크업&헤어/스타일링 : 사진에 사람이 들어간다면 필요하다.
디자이너 : 무조건 필요하다. 편집 디자이너로 찾아야 한다.
영업 : 광고를 넣거나, 펀딩을 받거나, 아무트 남의 돈을 쓸 예정이라면 필요하다. 본인들 돈으로 뽑을거면 필요없다.
솔직히 모든 분야 다 구해오는 게 무리다 싶으면, 적당히 겹치게 구하면 된다. 아트웍과 디자이너, 영업은 모두가 다같이. 뭐 이런 식이다.
나는 에디터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 혼자 글 쓴다고 그게 잡지 콘텐츠가 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거쳐야한다. 사진도 찍어줄 사람이 있어야하고, 디자인을 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내 글을 찍어낼 수 있게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와 함께 가장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났을 때 나온 콘텐츠를 보는 쾌감은 크다.
사람을 다 모았다면, 이제 뭘 만들 건지 이야기해야한다. 사실 이미 사람들 모으는 과정에서 이미 큰 주제는 잡혔을거다. 그건 아마 잡지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잡혔겠지. 만약 그런 큰 주제가 없는데 모여있는 집단에 속해있다면, 당장 도망쳐라. 곧 붕괴될 집단이다.
잡지는 힌 권의 책이다. 여러명이 쓴다고 중구난방이면 안된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성이 있어야한다. 그냥 신변잡기를 엮은 거라면 아무도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새로 만드는 잡지니, 이전 호에서 나오는 매체의 통징이라는 게 존재할리도 없고. 그럼 우선 완결성있는 한 권을 만드는게 중요하다. 결국 치열한 기획 회의를 통해서 채울 내용들과 그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고려해야한다.
내가 있던 팀에서는 매 호마다 큰 주제를 잡고 편집장이 통일성을 고려해 기획안을 통과시키거나, 말거나 했다. 그래 결국 그과정에서 나는 썅놈의 새끼가 됐지만, 뭐 어쩌겠나. 다시 말하지만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명의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구심점을 제시할 누군가는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거 없이 모두 마음이 통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환타지처럼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나아가는 일들이 쉽게 일어나진 않더라.
뭘 만들지 정했으면 이제 만들면 되겠지! 싶겠지만, 아니다. 일정을 잡아야 한다. 생각보다 고려해야할 게 많다. 마감 일정도 잡아야하고, 마감일정에 맞춰 영업일정도 조정해야한다. 디자인은 언제까지 끝낼 건지, 인쇄소에는 언제까지 맡길 건지, 대지도 봐야하고, 가제본 일정을 잡고, 언제까지 인쇄를 마칠 것이고, 언제 출간을 할 건지 날짜를 잡아야한다. 기억을 더듬어서 적는 것이라서 확실한 일정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해야할 것을 적어둔다.
마감 :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현실성있게 잡되, 너무 여유롭지도, 너무 빡빡하게 잡지도 않도로하자.
영업 마감 : 광고 기사를 쓰거나, 광고 페이지를 넣을 거라면, 그걸 만들거나 자리에 끼워넣을 시간은 있어야한다. 마감 기간보다 다소 앞에서 끝나야한다.
디자인 마감 : 마감이 끝난 원고/사진의 편집 디자인이 마치는 시간이다.
대지 확인 : 디자인까지 마친 페이지를 뽑아서 실제로 확인한다. 오탈자, 사진 오류, 디자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이거 제대로 안하면 오타가 넘친다.
인쇄소에 파일 넘김 : 파일을 빨리 넘길 수록 빨리 나온다.
가제본 확인 : 인쇄소에 가제본을 요청하면 실제로 뽑힐 용지에 페이지를 뽑아준다. 색이 제대로 나왔나를 확인한다. 문제가 있다면 CMYK를 고려해서 조정을 요청하면 된다.
인쇄 완료 : 인쇄소랑 이야기해서 언제까지 인쇄를 마칠 것인가를 합의한다. 대개 소량인쇄(아, 몇 백부는 소량인쇄다. 가끔 500분데 대량 아니에요? 라고 물어보시더라.)니까 인쇄소에서 천천히 하려고 하니까 이야기 잘해봐야한다.
발간 : 공식적인 발간일이다.
이제 치열하게 만들 시간이다. 아마 대개 이 시간은 이미 다 계산에 들어가있을 테니 별달리 설명할게 없다. 설마하니 만드는 과정을 고려 안하진 않았겠지... 힘내라.
열심히 기사쓰고, 취재하고, 사진찍고, 필진 따오고, 디자인하고, 영업하고, 뭐... 다 해야한다. 편집장하는 사람은 그거 총괄해야하니까 쓸데없이 기사 쓰겠다니, 욕심부리지마라. 어차피 잡지는 편집장의 책이다.
디자인까지 싹 다 마친, 이른바 페이지를 뽑아서 실제로 어떤 형태인지를 봐야한다. 중요한 건 돌려보면서 오탈자를 잡는 거다. (잡지사는 대개 교정사 선생님들이 계시고, 잡아주신다) 사진이 제대로 잘 보이나도 확인해야한다. 화질 떨어지는 사진을 쓰면 실제로 뽑았을 때, 자글자글하게 노이즈가 잡힌 게, 아주 보기 끔찍하다. 컴퓨터로 봤을 때랑 실제로 인쇄해서 볼 때랑 차이가 크니 눈을 크게 뜨고 보자.
대개 대지쯤 오면 '아, 이제 다했네!'라는 생각을 하고 긴장이 풀어진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오탈자가 넘치고, 사진은 거지같이 보이고, 전반적으로 잡지의 질을 열심히 끌어내리는, 그런 페이지가 만들어진다. 짜잔. 그러니까 제발 정신차리고 대지 잘 보자. 대지까지 다 됐다고? 거의 다 왔다. 인쇄소로 파일을 넘기자. 당연한 말이지만, 인쇄소는 이미 사전에 구해놨어야한다.
이게 현업에서도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 독립잡지 판에서만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대지는 확실히 현업에서 쓰는 말인데. 아무튼. 인쇄소에 미리 이야기를 하고, 가제본 일정을 잡았다면 표지를 실제 용지에 몇 장 뽑아준다. 그걸 보면서 색감을 맞추면 된다. 편집 디자인을 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CMYK로 했을테니까, 뭐가 문제될 게 있나? 싶겠지만, 그게 또 뽑아보면 조금 다르게 보이고 그런다. 그러니까 가제본을 확인하러 갈 때는 디자이너를 꼭 동행하고 그게 아니라면 공부하고 가자.
인쇄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개 귀찮고, 종이랑 잉크 낭비되니까 가능한 빨리 끝내려고 하신다. 여기서 쓰이는 종이랑 잉크는 대개 가격청구가 안된다. 그니까 박카스라도 들고가서 일하시는 분께 드리면 좀 낫다. 첫 페이지 색감을 잡으면 뒤의 페이지들도 그걸 기준으로 인쇄한다. 물론 계속 앉아서 뒷페이지들도 색을 확인하기는 해야한다. 근데 대개 첫 페이지 잘 잡으면 뒤에는 문제가 없다. 인쇄기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잡지 만든다고 고생한 시간이 절로 눈앞에서 흘러가면서 욕지거리가... 아니 성취감이 쏟아진다.
인쇄소와 일정을 조정해 인쇄를 언제까지 완료할지, 그리고 그걸 언제 수령할지를 정하자. 자, 여기까지 마쳤다면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 출간이다. 축하한다. 6단계로 쪼개니까 쉬워보이는데 어마어마하게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낸거다. 잘했다. 대단하다. 성취감을 느껴도 좋다. 만약에 혼자했으면 진짜... 인간이신가? 와- 진짜 여기까지 왔으면 나한테 메일이라도 주면 좋겠다. 한 번 만나뵙고 싶다. 농담이다.
이제 만들어진 잡지를 뿌려야한다. 내방에 꿍쳐두고 보자고 만든 잡지는 아니니까. ISBN 요청해서 바코드도 박아넣고 서점에 입점해도 되고, 독립서점에 뿌려도 된다. 독립서점도 생각보다 쉽게 안받아주니까 이것도 꽤 난관이다. 미리 이야기해두자.
독립잡지를 만들면 힘들다. 진짜 욕지거리가 절로 나온다. 고생은 개같이 하고, 딱히 누구도 인정해주진 않는다. 그래도 만들어봄직한 가치는 있다.
에디터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독립잡지 경험은 꽤 의미가 있다. 메이저 잡지와 독립잡지의 차이는 규모다.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게다가 독립잡지도 오래하면 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프레스로 취재를 한다던가. 뭐 그런 것들. 경험하기 쉬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시스턴트를 해도 된다. 어시는 본인이 뭘 얻어가냐 나름인데 이것 역시 본인 선택이다. 근데 어시하다보면 에디터가 될 거라는 안하는 게 좋다. 얻어갈 게 분명 있으니, 어시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갈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 어시를 하자.
에디터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의미는 있다. 잡지는 기록이다. 어떤 시기의 본인이 남긴 기록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보다는 신경써서 쓸테고, 게다가 인스타랑 페북은 과거에 쓴 걸 보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잡설이 길었다. 아무튼 과정은 말씀을 드렸다. 독립잡지를 만드시겠다고? 힘들텐데... 라며 꼰대같은 유감을 표하며, 응원한다. 힘내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