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도 May 11. 2023

허송세월

다시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 있게 된 지 벌써 3주째다. 첫째 주는 아기가 수족구에 걸려서 병간호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지난주는 연휴 때문에 아기가 등원을 3일밖에 안 했으니 내 시간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번주가 이제 다 지나간다. 무엇 하나 해낸 것 없는 기분이 나를 조금 우울하게 한다.


육아휴직 후 아기를 등원시키던 첫날, 나는 야심 차게 수영을 다시 하겠다고 선언했다.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그만뒀던 수영을 오래간만에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수영가방을 챙겨 가지고 수영장에 가는 길은 설렜다. 2년만이니 무리하지 말자 하고 한 시간 만에 상쾌하게 수영을 하고 와서 캐비닛에 있는 폰을 확인했는데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아기가 열이 났단다. 병원에 데려갔더니 수족구였다. 수영을 간 첫날부터 그런 연락을 받았으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바로 연락을 확인할 수 없는 종류의 운동을 가기가 꺼림칙해졌다. 그 이후로 수영은 가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일이 많았다. 아기가 일찍 깨서 칭얼거리는 걸 남편이 어른 침대로 데려왔는데 세상에나 내 안경다리를 부러뜨렸다. 이번이 안경이 부러진 세 번째라 안경점에 또 가기가 심란해졌다. 안경점에 갈 의욕도 생기지 않았지만 일단 수습은 해야하니 예비안경을 썼다. 그렇게 정신없는 사이 남편이 아기 밤기저귀를 갈아주러 거실에 갔다가 나를 불렀다. 아기 밤기저귀가 샜단다. 아침부터 아기 이불이랑 옷 빨래를 새탁기에 돌렸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게 기저귀때문이었는지 아기는 컨디션이 안 좋아 내내 징징댔다. 아침을 먹이고 대변 기저귀도 갈아주고 간식을 먹고 싶다고 해서 과일도 주고 세수와 양치를 시킨 뒤 아기 침대에 새 이불을 깔았다. 보송한 새 침구 위에서 좀 쉬고 나니 아기도 컨디션이 좀 괜찮은지 조용해졌다. 다행히 어린이집은 보낼수 있는 컨디션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어린이집 등원을 시켰다.


어쩐지 집에 있는 모든 게 어수선해 보이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김치냉장고를 열었다가 남편이 설거지하기를 미루고 방치해 놓은 김치 없는 김치통과 곰팡이가 핀 김치통을 발견했다. 싹 꺼내서 설거지하고 밥을 먹으려 밥솥을 봤는데 밥솥 증기배출구에 때가 낀 게 보였다. 또 밥솥도 싹 분해해서 세척했다. 그러고 나서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아기 설거지까지 모두 끝내고 발에 거슬리는게 밟혀 주방 바닥을 보니 온갖 건더기들이 보였다. 어제 남편이 아기 닭죽과 닭곰탕을 해준다고 요리를 했다가 아래에 떨어진 음식물들이었다. 주방 바닥을 싹 닦고 화장실과 주방 발매트도 세탁기를 돌렸다. 세탁실에 가보니 유통기한이 지난주까지였던 아기 멸균우유가 보였다. 한 박스나 사뒀는데 막상 아기가 잘 먹지도 않고 나도 맛이 없어서 방치한 거였다. 지난달에 당근 나눔 했으면 버릴 일이 없었을 텐데. 우유팩을 모두 잘라서 싱크대에 우유를 버리고 우유팩을 정리했다. 그러고나니 마침 아기빨래 건조기까지 다 되었단다. 아기빨래를 정리하면서 보니 계절에 안 맞는 옷들이 아기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그 김에 아기 옷장정리도 다시 했다. 이 모든 걸 하고 나니 오전 시간이 모두 끝났다.


그렇게 바쁘게 지냈는데도 아무것도 안 한 기분이 들어 유튜브를 켜서 30분짜리 요가를 했다. 그러니 아기 하원까지 두 시간 반이 남았다. 이상하게 오후시간이 되면 새로운 스케줄을 시작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기가 하원하고 나서 잠에 들기 전까지 독박육아를 하는 동안 늘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아기 오기 전엔 낮잠을 자건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건 체력을 비축해둬야 한다. 다 건조된 설거지거리들을 정리하며 집안을 둘러봤다. 오전 내내 열심히 움직였는데도 집안 풍경은 그대로였다. 내일 오전에 집에 돌아올 남편은 아마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집안일을 했는지 잘 모를 거다. 대신 아기 아침 루틴을 하는 동안 어지럽혀진 폭탄 맞은 거실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 집안일은 애써도 애쓴 티가 나지 않는 게 가장 힘 빠지는 부분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오전에는 혼자 도서관에 갈 계획을 세워두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 조용히 앉아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어린이집을 보내기 전에는 내 시간이랄 게 아무것도 없었고, 두 달의 어린이집 적응기간엔 오늘처럼 집안일하기에 바빴다. 복직을 했던 두 달 동안은 업무에 적응하고 아기가 아파 동동거리기 바빴다. 그런데 모처럼 아기가 아프지 않아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 시간도 그동안 미뤄왔던 집안일 하느라 보냈다고 생각하니 허무했다.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다. 필요한 일이지만 티나지 않는 일은 힘만 빠진다. 나도 내 경력을 잇고 돈을 벌어서 내가 생산적인 사람이란 걸 증명해내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폭식을 반복하느라 망가진 내 몸을 회복하러 운동이라도 규칙적으로 하거나 공부라도 다시 시작해서 내 경력에 도움 되는 뭐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휴직을 하고 난 3주간 난 뭘 한 걸까? 물론 육아 면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아기가 어린이집에서 머무는 시간도 훨씬 적어졌고, 아기를 재촉하거나 집안일하느라 방치하지 않아도 되니 아기가 나에게 집착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나아졌다. 육아에서 늘 잔잔하게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이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아기 간식과 밥을 내가 직접 차려줄 수도 있게 됐다. 일을 다니지 않게 되고 어린이집에 보내는 시간 동안 체력 보충을 할 수 있으니 내 몸도 덜 피로해졌고 남편의 긴 근무시간에 대한 짜증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나는 뭐가 남는 걸까?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또 폭식에 대한 욕구가 마구 올라오곤 한다. 복직을 하면서 빠졌던 몸무게가 휴직 결정을 하고 난 뒤 다시 몇 킬로나 쪘다. 그만둬야 한단 걸 알면서도 끝내 폭식하고 마는 내가 너무 싫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엄두가 나지 않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한 건 내가 너무 의지가 부족해서일까? 내가 마음대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건 먹는 것뿐이라 자꾸 그걸 반복하게 된다. 스스로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만족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면 되는 건데 사실은 공부도 멋진 몸매를 갖는 것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도 아니면서 내가 게으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만 하고 싶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정과 사과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