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 쓰게 된 지 참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해는 가슴속에 맺힌 이야기들이 폭발하는 해였다. 사는 게 더는 견딜 수가 없고 상담을 다녀오면 우느라 온 힘이 빠져있고 나를 이렇게 만든 원가족들에게 파업을 선언했다.
질릴 때까지 가족 욕을 하고 참지 않는 건 내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건 내 존재에 대해 인정하는 작업이었다. 부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던 약하고 휘둘릴 수밖에 없던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주려면 내 아픔이 없었던 일이 돼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했던 행동이 학대였고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그 안에서 내가 이만큼이나 살아남은 건 참 애썼고 대단한 일이지. 인정하는 과정은 나를 칼로 쑤셔대는 것 같았다. 어른인 나는 아이였던 나에게 왜 더 똑똑하게 굴지 못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아프고 힘든 일이고 그렇게 대처할 수밖에 없는 나는 이제 안다. 죽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줘서 다행이라고.
내 아픔과 상처가 어떤 의미인지 다 알게 된 나는 이전과는 같을 수 없었다. 원가족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 연민 같은 감정들이 내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선을 긋고 분리해야 한다는 것도 조금씩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억울함, 분노, 원망, 후회 같은 부정적이고 폭발적인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나 자신에게든, 원가족에게든, 알면서도 방치한 친척들에게든.
그런 것들을 다 쏟아내고, 상대의 날것의 무언가을 마주하고, 끊어내고, 그 사람들이 없어도 잘 살게 된 이후에는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고 스스로의 행복을 잘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단 것도 알게 됐다. 그러고 나니 브런치에 쓴 글 속의 나를 보며 더는 아프지도 부끄럽지도 않게 됐다. 그저 그때의 나는 그랬지 싶다. 과거의 나에게 고맙기도 하고.
어제는 몇 달만에 원가족을 보러 갔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원망도 분노도 없이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들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래 우리에겐 이 정도의 마음이 필요했다.
자리를 마무리하고 자려는데 엄마가 나를 안아주었다. 과거의 일을 돌아보는데 미안하고, 나 살고 싶은 대로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던, 남편과 이혼하건 말건 내가 행복하면 참 좋겠다고. 물론 나는 엄마가 충격을 받건 말건 좋아하는 옷을 입을 거고 남편도 내가 그와 안 사는 게 더 행복하면 이혼할 거지만 이제 그런 말을 해주는 엄마에게 고마워서 같이 울었다. 인정의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미안할 때마다 사과하는 게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인지 알기 때문에.
더불어 이제껏 아무 말 없는 부친과 미안함을 기회가 될 때마다 사과하는 엄마는 다를 수밖에 없다.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이제는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로 인해 더 마음이 편안해지곤 한다. 그리고 나는 어찌 되었든 엄마의 인생도 행복했으면 싶다. 그와 내가 각자 힘을 다해 잘 살기로 약속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