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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Sep 22. 2020

의식과 무의식은 무엇을 기점으로 나눌 수 있을까. 꿈을 선명하고 강렬하게 기억한다면 그것은 의식일까 무의식일까. 내 기억은 꿈에서 시작했다.


다섯살 때 살던 곳은 조그만 마당이 있는 오래된 한옥이었다. 대문을 들어서기 직전에는 텃밭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고추, 호박, 상추, 들깨, 오이 같은 걸 심었다. 그런 것들 사이를 헤치며 나오면 바로 앞은 도로였다. 지금이라면 어린애를 함부로 밖에 내보내지 않았을 테지만 그땐 달랐다. 차를 모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도 아니었고 한산한 주택가라 오히려 자동차를 구경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날이 좋으면 도로에 나와 세발자전거를 타곤 했다. 모래가 날리는 마당보다는 매끈하게 닦인 도로가 자전거 타기에 훨씬 좋은 곳이었다.


때로는 두부 하나, 콩나물 한 봉지 같은 작은 심부름을 받아 덜렁덜렁 그 길을 걸었다. 내 최초의 기억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까만 비닐봉지를 흔들며 문득 하늘 위를 바라보는데 하늘의 색이 묘했다. 보라빛 물감통을 엎은 것 같기도 하고, 바다 위에서 해가 지는 듯도 하고, 다 커서 생각해보면 밤하늘을 닮은 배스밤을 풀어놓은 듯한 느낌으로. 온통 울렁거리는 하늘에 압도되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온 세상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튜브에 누워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온몸이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다 눈을 떠보니 창호지 밖으로 푸른 새벽이 보였다. 적막한 새벽 푸른 공기를 보며 눈을 깜박이다 눈을 감았다. 한줌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새벽이 의식일까, 온통 강렬한 색채와 울렁임으로 가득한 꿈 속이 무의식일까. 


십대 때는 꿈이 두려웠다. 기껏 잠이 들면 나의 모든 불안과 공포를 한데 단단히 뭉친 것이 나를 쫓아왔다. 온 힘을 다해 “악!” 소리를 쳐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깨어있는 세계도 녹록치 않았다. 현실도 꿈도 쉴 공간이 없다면 남은 일은 허구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곳이 차라리 내 현실인 편이 나았다. 밤을 새워 모든 장르를 섭렵하고 나면 흰 새벽이 나를 맞이했다. 깨어 있어야 마땅한 시간들은 꿈과 꿈과 아닌 곳의 경계에서 흔들린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 나의 의식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느 쪽이 나에게 의미 있는 현실에 가까웠을까.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시간이 끝없이 흐른 후에야 내게 쥐어진 것은 둥글고 납작하고 길쭉한 몇 개의 떫은 알약들 뿐이었다. 아침과 밤에 손에 가득 찬 알약의 개수를 세어보고 입에 털어 널었다. 그것들은 나를 꿈없이 잠에 빠지게 하고 명료한 정신으로 삶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내것이 아닌 듯 했다. 오히려 외면하고 싶던 삶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앞에 다가와 더는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내 모든 순간이 엉망진창인데 그걸 왜 똑바로 바라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미 편리하게 외면하는 방법을 다 알아버렸는데.

 

이십대에는 절망에는 깊이가 없단 것을 배웠다. 이번에는 꿈에 있는 편을 선택했다. 대학시절의 나는 동아리방에서 dvd를 빌려보거나 적막한 도서관 소파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동기들 손에 이끌려 수업에 앉아있는 일 이외에는 잠을 자곤 했다. 내 삶의 대부분이 잠을 자듯 모든 것이 흘러가길 바랐고 잠을 자면 의식에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삶은 끝나지 않고 더 높은 파도에 더 깊이 잠겨드는 기분이었다. 밑으로 밑으로 헤엄쳐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듯 저절로 굴러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섯살의 나에서 한 걸음도 제대로 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졸업이 가까워오자 불안이 나를 덮었다. 뒤늦게 아등바등 매달려본 일에 단 한 가지도 내 손에 오롯이 쥔 것이 없었다. 그럴 수록 잠을 줄였다. 다섯 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손에 꼽았다. 직장을 잡고 생활이 조금 안정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온 힘을 다해 살고 기절하듯 잠에 들면 꿈 속에서는 끝내지 못한 일과 다음 날 다시 해야할 일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잔뜩 긴장했는지 쥐가 나서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았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과는 달리, 이런건 살아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누군가도 나처럼 울렁이는 꿈 하나쯤은 안고 살아간다면 좋겠다. 그러면 오늘도 어김없이 다가오는 이 밤에 그를 생각하며 외롭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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