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이 아닌 내가 되기
모든 걸 다 놓고 싶어요. 이런 기분이 든건 꽤 됐어요. 사실 일이 그렇게까지 죽을 거 같고 힘든 건 아니에요. 그런데 다 견디기 힘들어요. 다 때려 치우고 쉬고 싶어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한 번에 다 때려 치우는건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만두고 뭘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먹고살 것도 걱정되니까요. 저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아서 왔어요.
상담실에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씀에 내가 꺼낸 이야기였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아침이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고, 적당히 내 몫을 하고 퇴근시간이 되길 손꼽아 기다리는. 동료들 사이 큰 갈등도 없고 하는 일은 잘 풀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대부분의 일들은 집에 가면 금방 잊곤 한다. 싫은 일들은 퇴근 길에 저녁거리를 사며 툴툴 털고 가곤 하니까.
그런데 시작은 모임이었다. 이년 정도 잘 해왔던 거 같은데 그냥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모임의 목적도 내 마음에 맞았다. 그리고 나름의 좋은 성과들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끝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피해를 주기 싫어 내 몫의 일을 마무리 하고 새 해가 되어 다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꾸릴 때쯤 나는 한두 가지만 남기고 모두 그만뒀다.
처음엔 일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다. 나는 직장 외에도 직장의 업무 향상이나 자기계발 등등의 목적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무려 다섯 가지나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두 가지만 남기고 모임을 모두 그만 두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럴만 하다고 했다. 모두 하기는 벅찰 것 같으니 쉬기 잘했다고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만둬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나는 항상 허덕이고 있었다. 뭐가 안 맞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냥 올해 맡은 업무 때문에 그런가? 작년보다 업무량도 늘고 맡은 범위도 늘어서 내가 적응하느라 허덕이는 건가? 그럼 이 순간이 지나고 적응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9월이 된 어느날 나는 퇴근하는 길에 울것 같은 기분으로 상담소에 전화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화요일에 첫 상담을 잡았다. 몇 년 만의 상담이었다.
상담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지점이 있다. 상담 선생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온도씨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요?”
“저는.... 제가 가장 중요해요.”
“그런가요? 하지만 온도씨가 한 이야기에는 온도씨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들어 있어서요.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서 할게요. 온도씨는 스스로에게 무엇을 해주었을 때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나요? 언제 편안하고 안정된다고 느끼는지 궁금해요.”
순간 뭔가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일이 가장 중요한 게 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나를 가장 우선에 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나에게 도움에 되니까 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리고 나는 어떤 때 나를 가장 소중하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 나는 이나이 되도록 이런 걸 몰랐지?’라는 생각이 드니 당황스럽고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울면서 겨우겨우 “이제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 상담이 어땠는지는 부분 부분만 기억이 난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해야 하는” 것은 조금 참고 힘들어도 해야한다고 느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싶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공부를 잘 하기 바라셨다. 부모님께서 원하는 수준의 대학교를 가기 바라셨고 과도 취업이 잘 되는 곳이기를 바라셨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바라셨다. 직장을 잡고 나서는 매달 일정 수준 이상의 용돈을 주기 바라셨다. 친척들에게도 어느 정도 챙겨주기를 바라셨고 특히 동생은 물질적으로나 학업적으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길 바라셨다.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부모님의 착한 딸이었다. 기대에 부응해 내 개인적 삶을 포기한 만큼의 성적을 냈고 기대하고 있던 대학교와 과에 붙게 되었다. 취업 준비가 조금 길기는 했지만 정규직 자리를 얻었고, 부모님이 요구한 용돈을 매달 드렸다. 친척들과 만날 자리가 있거나 가족 식사 자리에서는 내 카드를 내밀었다. 동생에게도 종종 용돈을 주고 필요한 것을 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부족한 딸이었다. 기꺼이 해주지 않았고 요구해야만 해주냐는 푸념을 들었다.
그동안 나는 사실 굉장히 허덕이고 있었다. 대학교 입시 시절과 취준 시절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루에 다섯시간 이상 잠을 자본 날이 손에 꼽았다. 부모님 몰래 병원에 다녔다. 이것 마저 안 다니면 죽을 것 같았지만 약을 발견할 부모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너무 잘 알았다. 눈을 피해 약을 먹고 약봉지는 가방 안에 두었다가 밖에서 버릴 정도였다. 부모님께 첫 월급부터 용돈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월세 살이를 하는 초년생에게 십일조보다 더한 용돈을 드리는건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월급이 오르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부모님께선 월급이 오르니 명절이나 어버이날에 더 크게 챙기기 바라셨다. 몇 번이나 내 힘든 점을 말했지만 그 때마다 들었던 폭언과 압력, 갈등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너는 혼자 벌어 혼자 먹고 살면서 그렇게 돈이 부족하니?”
“난 이해할 수가 없다. 가족끼리 손을 벌릴 수도 있는거지.”
“돈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저축은 무슨 저축이야.”
“난 돈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해줄게 없다. 여자가 직업만 있으면 됐지. 결혼은 알아서 해라.”
“내가 너에게 용돈 달라고 할 때마다 얼마나 눈치 보이는 줄 아니? 내가 왜 이걸 받으면서 니 눈치 봐야하니?”
“동생이 얼마나 언니 눈치를 보면 겨우 그런거 사달란 소리도 못할까?”
“그래도 니가 도리는 했어야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전화를 받고나면 며칠 내내 거의 울면서 보내곤 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문자로 폭언이 왔다. 문자에도 답장을 안 하면 다짜고짜 연락 없이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더욱 미칠것 같은 이유는 그 이후의 일이다. 그렇게 나를 구석 끝까지 몰아놓고 구구절절 미안하다고 하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에는 더욱 애정어린 문자와 전화로 나를 달래려 했다. 이 실낱같고 구질구질한 관계가 끊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쪽은 늘 부모님이었다. 학대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 갑갑함은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다리고 인내하고 이해하는 연애에 익숙했다. 힘들고 지쳐하면서도 끝을 내지 못해 구질구질하게 차이기더 했다. 직장에서도, 모임에서도 그랬다. 내가 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하면 아등바등 내 선에서 끝을 내야 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아프고 지쳐 나가떨어지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고 소중하게 하지 못했던 순간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사실 나는 다 이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내가 힘든 점을 토로할 때면 다들 그렇게 산다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 내가 가족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불효라는 생각에 너무 마음이 불편했다. 키워준 값을 하고 살아야한다는 게 내가 입을 닫게 되는 이유였다. 그리고 내 주변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사람들의 반도 못 따라간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많았다. 배울 점이 많은 선배들 사이에서 막내인 나는 그렇게 되고싶어 아등바등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죽고싶을 만큼 지금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역할에 짓눌리는게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나를 소중하게 여길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나는 내 그대로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인정 받아본 경험이 없으니 나를 나로 인정해주는게 당연한거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잘해야만” 좋은 사람이고, 나로서 당당할 수 있고, 그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줄 알고 살았다. 이전의 상담들로, 책으로,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나를 나 스스로 인정해주는 것’에 대해 배우기는 했지만 그걸 나에게 적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묻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안 살아도 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죽도록 불편하고 힘든 걸 안 해도 괜찮아?”
“이런걸 안 하는 나를 사랑해도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