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는 것만 해도 괜찮아요.
상담 선생님께서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좋아하는 것 말고 잘 하는 것들 중 흥미 있는 걸 하라고.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의 차이를 여쭤봤다. 결국 그 말이 그말 같았다.
좋아하는 것은 결핍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바라고 있고 하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좋아하는 걸 하다보면 힘에 부칠 때가 많다고 했다. 내가 잘 하고 싶어도 남들 만큼 안될 때, 내가 소모된다고 느낄 때, 그것을 놓치 못해 아등바등 하다보면 번아웃 되기 쉽다고.
하지만 잘 하는 걸 하라는 건 약간 결이 다르다. 할수록 신이 나는 걸 하란 이야기라고 했다. 내가 잘 하는 걸 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재미도 있다고. 잘 하는 걸 다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해보다가 안 맞으면 중간에 그만 둬도 괜찮고 잘 하는 것 중 하나만 즐겁게 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잘 하는 것만 해도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요? 잘 하는 것만 해내도 대단한 거예요.”
“그런데 힘들어도 해야하는 게 있지 않나요?”
“지금 온도씨는 힘들어도 참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리고 행복하면 괜찮은데 지금 제 앞에 있어요. 그렇다면 안 해도 괜찮아요. 해도 괜찮은 일만 하세요.”
“안 되는건 그만둬도 괜찮아요?”
“그럼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모든걸 다 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어요. 물론 욕할 수도 있지만, 그사람들은 어디 다 잘하고 살던가요?”
“잘 하는게 뭔지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한번 찾아보세요. 의외의 장소에서 있을 수도 있어요.”
상담을 마친 저녁 애인과 통화를 하고, 조금 울었다. 내가 상담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상담 내용을 정리하고 나니 그냥 눈물이 나왔다. 다음 상담 때는 내가 잘 하는 걸 생각해 보고 와야지. 그리고 집에 와서 누웠는데 몇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러면 얼마나 잘해야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내가 나로 온전히 있다고 느낄 때는 언제였을까?
내가 압박감을 느끼는 순간에서 그걸 거부했을 때 나는 조금 행복해졌을까?
내가 잘하는 일을 생각해봤다. 나는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궁금하고 요구하는 바를 말할 수 있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내 생계에 위헙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발표하거나 내 의견을 말하는 걸 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도 그 사람과 어색한 기분은 들어도 할 일을 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는 편이다. 나는 상황에 따라 재구성하는 것을 잘 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고는 할수 없지만 바로 해결방안을 찾는데 집중하는 능력이 좋다. 나는 꾸준히 하는 일을 잘 한다. 생활의 리듬을 잘 찾는 편이고 하기로 마음 먹은 건 대체로 마무리를 잘 내는 편이다. 나는 경험한 것을 적용하고 확장하는 일을 잘 한다. 다양한 활동에 도전하고 해보는 것,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하는 것 맞나? 이런 건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내가 인정받는 순간들 말고, 스스로에게 안정을 주는 방법은 뭘까? 나는 그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오는 것 같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스스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 먹을 때.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족스러운 공간과 서비스로 즐길 수 있을 때 기분이 좋다. 스트레스가 있을 때는 자극적인 음식을 먹곤 한다. 그런데 그게 해결 방법일까? 또는 글을 쓸때 마음이 안정되곤 한다. 트위터나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꼭 누가 읽어주길 바라서 그랬다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뱉어낼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업무일지도 쓰고, 가계부도 수기로 쓰고, 스케줄도 기록하고, 메모장에 각종 잡다한 정보들을 쌓아놓곤 한다. 잘하는 것이면서 하고나면 마음이 편안한 행동이다. 아, 잘 하면서 흥미가 있는 부분이 이런 기록하는 습관이구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정돈이 안 되보일 수도 있고 글도 잘 쓰는 편이 아닌데 괜찮은걸까?
올해 부모님 관계에서 거부한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용돈이고 또 하나는 명절이다. 올 초부터 중순까지 깊은 감정소모와 갈등을 거친 후 용돈은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만” 드리는 것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폭언도 있었고, 가스라이팅도 있었고, 업무펑크도 나고... 이번 명절에도 나는 나름 잘 준비했는데 용돈을 그거밖에 못 주냐는 소리에 모멸감도 들었지만 어찌어찌 넘기고 있다. 이번 명절은 전편에서 다뤘듯이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안 된다며 폭언을 듣기도 하고, 서운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문자로 니가 이정도 도리도 챙기지 않았으니 ㅇㅇ정돈 하겠지?란걸 받긴 했지만 답장할 마음이 들지 않아사 안 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해졌냐고? 응. 그렇다. 욕은 아주 구구절절 버전을 달리해가며 또는 발전된 형태로 들어먹고 있지만 내 자유랑 바꿔먹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님과 무혈투쟁으로 뭘 얻어본 적이 없었다. 투쟁의 과정에서 상처도 충분히 받았지만 그건 돈을 열심히 벌어서 상담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업무나 모임에서는 거부하기가 조금 더 수월했다. 가족만큼의 질긴 인연이 아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는 안 맞는걸 참고 하면 아프다. 몸이 시름시름 아파져서 내 꼴을 본 사람들이 더는 강제하지 않는 효과가 있달까. 아니면 더 들들 볶으면 내가 왕!! 하고 문다는 걸 아는 걸까. 물론 이것도 상담으로 회복해 나가려고 한다.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는 대부분 명확한 편이다. 나는 나를 이해해주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좁은 인연만 친구나 연인 관계가 되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 관계에서는 상담을 받은 이야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다. 다는 아닐지라도 나의 개인사나 가정사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만큼의 여유가 있다. 이 사람들마저 나를 고통 속에 집어 넣었으면 나는 서른이 되기 전에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가족 간의 관계에서도 동생이 내 숨통을 터 주는 편이다. 강요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선을 넘지 않고, 너는 그럴 수 있구나 존중해주는 관계가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가능했다면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상담이 만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를 스스로 돌아보는 일은 참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나의 가까운 사람들도 알아채기 힘든 내밀한 부분도 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관계가 흐트러질 까봐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내 이야기의 요점을 짚어내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럴 때 상담의 문을 두드린 건 참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