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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수 Sep 01. 2021

신라 왕릉 탐방기 3

#경주 시내와 외곽 왕릉들

신라 왕릉들은 주로 남산 주변에 많이 산재해 있지만 경주 시내 중심가뿐만 아니라 외곽지에도 다수 분포하고 있다. 경주 시내 중심가에 있는 노동리와 노서리 고분군 뿐만 아니라 인왕리 고분군과 황남동 고분군 등지에는 내물왕릉을 비롯한 다수의 국보급 고분들이 많아 주요 관광지로서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 있는 서악 지구에도 몇몇 왕릉들이 조성되어 있고 경주를 벗어난 안강에는 어느 정도 고증으로 밝혀진 흥덕왕릉이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동해 감포 앞바다에는 문무대왕릉이 수중에 잠겨 있고, 멀리 경기도 연천에는 신라 마지막 임금으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준 경순왕의 무덤이 있다. 이번에는 주로 경주 시내와 외곽지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 왕릉들을 다녀 보았다.


신라  궁궐터인 월성과 가까운 교동에는 내물왕릉이 여러 고분들 가운데에 조성되어 있다.  왕으로는  번째로 왕위에 오른 17 내물 마립간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으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내물왕릉의 형태는 원형 봉토분으로 밑부분에는 자연석으로 둘레를 돌린 흔적이 보이고, 내부는 돌무지 덧널 무덤(적석 목곽분) 가능성이 높으나 규모가 작아 굴식 돌방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현재의 황남대총의 남쪽 무덤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내물왕릉 인근에 있는 대릉원 안에는 신라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담장으로 둘러싸인 미추왕릉이 있다. 석씨였던 첨해 이사금이 아들 없이 승하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김씨 왕계의 시조가 된 13대 미추 이사금은 대외적으로 백제의 침입을 막고 대내적으로는 제도와 형벌을 바로잡으며 농업을 장려하였다고 전한다. 23년 간의 재위 끝에 승하하자 다시 석씨 왕인 유례 이사금이 뒤를 이었다. 미추왕릉은 원형 봉토분 중에서는 규모가 큰 왕릉으로 잘 정비된 대릉원 안에 담장을 둘러 보호받고 있다. 내부는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추정되며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다. 

내물왕릉과 미추왕릉

경주 시내에서 가까운 동천동에는 석씨 일족이 20세기 초에 비정해 놓은 탈해왕릉이 소금강산의 남쪽 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유리왕의 유언으로 62세에 왕위에 오른 4대 탈해왕은 23년 간의 재위 기간 동안 왜와는 친교하고 백제와 가야와는 자주 다투었다고 한다. 왕릉 주변에 아무런 시설과 표식물도 없는 단순한 형태의 굴식 돌방 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통일기 전후의 무덤이 아닌가 하는 이설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탈해왕릉 근처인 동천동 북천 가에는 헌덕왕릉이 있다.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41대 헌덕왕은 농사를 장려하고 당과는 친밀하게 지냈으나 나라 안에서는 정란이 잦아 혼란스러웠다. 헌덕왕릉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 밑에는 둘레돌과 면석을 세우고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으나 현재는 5개만 그 형태가 남아 있다. 특이하게 이 능은 둘레돌 바깥에도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설치하고 둘레돌과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아 놓았다.

탈해왕릉과 헌덕왕릉

경주 시내에서 동쪽에 위치한 보문동 명활산 서남쪽 아래에는 진평왕릉이 있다. 신라 시조 혁거세 다음으로 오랜 기간인 54년 동안 재위에 오른 진평왕은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수나라와 수교하였고 국내적으로는 불교 진흥에 힘썼으며 남산성을 쌓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수도 방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릉의 외부는 원형 봉토분이며 밑부분에는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쌓은 흔적이 보이는 비교적 규모가 큰 무덤으로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주 서북쪽에 인접한 현곡면 안태봉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진덕여왕릉은 큰 도로에서 좀 떨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다소 어렵다. 교행이 되지 않는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꽤 넓은 왕릉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에서 야트막한 구릉을 걸어서 올라가면 왕릉이 보인다. 사촌인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8대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려하고 키가 7척이나 되며 백제와의 전투에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혁거세로부터 이어져 온 성골의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은 뒤를 이어 무열왕이 된 김춘추를 당나라 사신으로 보내어 적극적인 사대 외교 정책을 펼치며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무덤의 형태는 원형 봉토분이며 밑부분에는 판석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을 돌렸고 호석의 면석 사이의 탱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겨 놓았다.

진평왕릉과 진덕여왕릉

경주 서남쪽 서악 지구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한 몇몇 왕릉들이 구릉에 산재해 있다.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9대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이며 본명은 김춘추로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공으로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더불어 친당 외교와 내정 개혁을 통해 새로운 신흥 귀족 세력으로 등장하여 왕위를 이어받고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진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는 무열왕릉은 국보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를 통해 무덤의 주인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왕릉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무덤의 형태는 굴식 돌방 무덤으로 추정되고 전체적인 형태는 다소 소박한 편이다.

태종무열왕릉 뒤편 구릉지에 있는 왕릉 중에서 가장 아래쪽에는 헌안왕릉이 있다.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47대 헌안왕은 불교를 통하여 지방 호족 세력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펴며 사후에는 사위인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선도산 왕릉들 중에서 유일하게 석인상이 서 있고 규모가 작은 원형 봉토분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옆에도 비슷한 봉분 하나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태종무열왕릉과 헌안왕릉

헌안왕릉 바로 옆에는 문성왕릉이 있다.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왕위에 오른 46대 문성왕은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호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선도산 산자락의 일부를 깎아내고 평지를 마련한 다음 조성한 문성왕릉은 동서로 긴 타원형 봉토분으로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성왕릉 위쪽에는 진지왕릉이 있는데 서악 지구의 다른 왕릉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중엽에 김씨 문중에 의해 왕릉으로 비정되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태종무열왕의 조부가 되는 25대 진지왕은 거칠부의 세력에 힘입어 왕위에 올라 백제와의 잦은 전쟁을 치르다 승하하고 그의 조카인 진평왕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무덤의 형태는 원형 봉토분으로 보통 크기이며 호석으로 추정되는 괴석의 일부가 봉분에 노출되어 있다.

문성왕릉과 진지왕릉

서악 지구 선도산 왕릉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진흥왕릉은 신라 중흥기에 있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법흥왕의 동생이자 사위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갈문왕의 아들로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24대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여 곳곳에 순수비를 세우고 통일의 중추 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통일 신라의 기반을 닦았다. 불교에 깊은 신심을 지녀 황룡사를 창건하였고 말년에는 법명을 받고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흥왕릉은 정복 군주로서의 업적에 비해 규모가 작은 원형 봉토분으로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호석이 몇 개 보일 뿐이다.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의 서쪽 기슭 끝자락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법흥왕릉은 고분군이 운집한 시내에서 벗어난 외곽지에 축조되었다. 지증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23대 법흥왕은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여 신라의 국민 사상을 통일시켰고 율령과 제도를 정비하여 왕권 확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슬하에 왕자가 없었던 법흥왕은 외동딸인 지소태후를 동생인 갈문왕에게 시집을 보내 훗날 진흥왕이 된 외손자를 보게 된다. 왕릉의 형태는 외형상 원형 봉토분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고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의 일부가 드물게 드러나 있다.

진흥왕릉과 법흥왕릉

경주와 인접한 안강읍 육통리에는 신라 역대 왕릉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한 형식을 갖춘 대표적 왕릉인 흥덕왕릉이 있다. 안강읍에서 기계 쪽으로 향하다 마을로 들어서는 도로를 따라가면 마을 끝에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바로 왕릉이 나온다. 헌덕왕의 아우인 42대 흥덕왕은 재위 첫 해에 왕비인 장화 부인이 서거하자 10년 간 장화 부인만 생각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왕비의 무덤에 합장하기를 유언하여 현재의 흥덕왕릉에 합장하였다고 한다. 왕릉 주변에서 왕의 시호가 새겨진 비석의 파편이 발견되어 흥덕왕릉으로 비정되었다. 봉분 밑에는 판석을 세워 호석을 삼고 탱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봉분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가 한 구씩 서 있고 왕릉의 전방 좌우에는 각각 한 쌍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양 옆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다.

문무대왕면으로 개명된 옛 양북면 감포 앞바다에는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의 수중 왕릉이 있다. 태종무열왕의 장자로 왕위에 오른 신라 30대 문무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백제 저항군을 진압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며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여 진정한 삼국 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며 귀족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수중릉을 만들어 왜적의 침입을 막는 수호신이 되었고 문무대왕의 아들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감은사를 지어 대왕의 업적을 기렸다. 문무대왕릉은 해안에서 200미터 떨어진 지점의 자연암 사이에 수로를 만들어 사방으로 물이 통하게 하였으며 수면 아래에 거북 모양의 넓적한 돌이 덮여 있는데 그 안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흥덕왕릉과 문무대왕릉

경주 시내에서부터 외곽지에 걸쳐 산재하고 있는 신라 왕릉들을 두루 살펴본 마지막 탐방기를 남기며 멀리 경기도 연천에 있는 경순왕릉에 대한 탐방은 훗날로 미룬다. 신라 천년의 푸른 숨결이 서린 왕릉들이 오늘의 경주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 기운을 느끼며 우거진 솔숲 사이를 누비며 셔터를 눌러댄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진다. 신라인들이 남긴 수많은 유적지들을 돌아보는 가운데 왕릉의 길을 따라 걸어 보는 탐방도 천년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Sep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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