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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Dec 07. 2022

어차피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처음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선생님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지 않으며 정말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이고,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직에 들어오고, 매년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고 매해 만나는 새로운 학생들에게 그때에 필요한 걸 채워주려고 나 스스로를 채우고 관심을 많이 가졌다.


어차피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그런 나의 신념은 꽤 일찍(첫 해에) 깨졌는데 팩트 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심리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 이를 부정적으로 표출하는 학생과의 상담이었다. 아이는 상당히 학교와 반대하는 행동을 많이 하였지만(담배, 술, 무단결석/지각/조퇴, 오토바이 탑승 등) '술, 담배는 기호식품이다'라는 엄마의 생각을 물려받은 나는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정작 나는 단 한 번도 술, 담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항상 아이를 나쁘게 보는 다른 선생님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나는 아이와 라포가 상당히 형성되었다. 아이에 대하여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학교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지속적으로 어기면 학교의 규정상 불이익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 최소한 학교에선 자제시키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상담을 시작했다.


사실 아이의 사정에 대해선 그간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다. 아버님이 재혼을 하시며 새로 생긴 가족과의 관계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에 이를 표현하지 않아 속으로 계속 쌓아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한테 이야기하면 아이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행동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생님한테 이야기해도 돼. 선생님이 도와줄게.


그 말에 아이는 정말 담담하게 자신에게 벌어졌던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였다. 아이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자세히 적을 순 없지만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한 걸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아이는 정말 툭 하고 이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일단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내가 너의 무게를 너무 가벼이 생각했다고. 어쩌면 나도 모르게 어른의 무게가 더 무겁다고 생각하고 아이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무나 가볍게 상담을 시작했고, 아이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으며 아이의 이야기가 끝나고 꽤 긴 시간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 날 이후로 더 이상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도와줄게"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은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줄게"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어차피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잖아요."라는 말에 만큼은 늦게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가 선택한 것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 선생님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

그렇지만 선생님이 이런 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OO이의 상황을 알았으니 졸업하고 기숙사가 있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도록 찾아봐준다거나 혹시나 말하고 편해지는 게 있다면 말할 수 있는 쉼터가 돼줄 순 있지 않을까?


아이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허허 웃고, 나도 그냥 웃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는 그냥 재미있게 보냈다.

학교에서 있는 시간만큼은 즐겁게 보내자고.

아이처럼 18살처럼 신나게 보내자고.

집에서의 기억이 괴롭다면 학교에서라도 행복하자고.


아이는 무사히 졸업하였고, 종종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을 하던 중 올해 슬그머니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군대 가요. 그냥 선생님한테 전화하고 싶어서 했어요."


그래. 잘 갔다 와. 연락 줘서 고마워. 아직 기억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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