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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Nov 29. 2022

교직의 시작

그리고 어쩌면 주요우울장애의 시작

교직 이수와 임용시험


부끄럽지만 나는 재수, 휴학을 거쳐 남들보다 늦게 임용시험을 시작하였고 총 세 번의 시험 끝에 합격하여 본격적인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시험이라는 게 사람을 참 피폐하게 만든다.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나는 학창 시절부터 시험을 정말 싫어하여 시험 기간에는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는 이상한 학생이었다. 19살 수능 때는 난생처음 시험 불안이 찾아와서 깔끔하게 1교시 언어영역을 말아먹고, 자연스럽게 2교시부터 도미노처럼 시험을 잘 말아먹었다. 덕분에 남들과 다르게 수능을 두 번 치르게 되었고, 그 기간을 통해 나는 정말 시험 준비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독학 재수를 하였는데 수능 공부보다 그 해에 내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 더 이상 시험을 치뤄 무언가를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4학년 때 교생실습이 나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나는 전공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어 졸업 후 미래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으며, 교직이수는 그저 교회에서 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을 위한 하나의 보완 요인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살이 찌지 않고 빠져서 불쌍해 보이던 내가 교생실습 4주 동안 누가 봐도 건강하게 쪄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갑작스럽게 내 과목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임용 선발 인원 확보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 이거구나.


나는 운명론자라 될놈될이라 생각하는데 내 건강이 회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임용 인원까지 확보라니 이것만큼 나의 운명은 없다 생각했다. 그렇게 임용시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3년이나 걸릴 줄 모르고...)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너무 힘들었다. 첫 해 교육학 과락으로 탈락, 그다음 해 소수점 차이로 탈락을 겪으며 내 멘탈은 털렸고, 이것은 내 운명이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정말 허벅지를 볼펜으로 찌르면서 공부를 하였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힘들게 하며 공부를 했다.


그때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니가 울고 있을 때도 노량진에서 다른 사람들은 공부하고 있다.', '니가 XX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문제 하나를 더 풀고 있다'였다. 공부를 더 하는 데 있어서 이것만큼 좋은 채찍질은 없었지만 그만큼 나는 병들어 갔다. 20대 후반, 다른 친구들은 돈 벌고 있는데 나는 아르바이트, 단기 계약직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나를 금방 병들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부터
좀 더 깊은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그 문구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끝났다' 그리고 '이게 번복될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한테 알리지 말아야겠다'였다. 그래서 너무 기뻐하는 가족들에게도 아직 말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기한 내 제출해야 하는 신체검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정말로 합격한 지 2-3주 지났을 때야, 발령받은 학교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야 가족들을 통해 주변에 합격을 알리게 되었다.


발령받은 학교를 처음 갔을 때도 '시험 합격하셔서 너무 기쁘시겠어요!'라고 말하는 선생님께도 '그냥 그래요.'라고 답변드렸다. 정말 그냥 그랬다. 기쁘다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덤덤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차분한 사람이라고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도, 당사자인 나 조차도 내가 아픈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내 교직생활과 깊은 우울증이 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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