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임당동 신라비 伍 [完]

비석을 건립한 배경

by 새긴믈

비석의 건립 배경을 추론하기 위하여 먼저 인근 유구의 성격, 그리고 비석과 유구들의 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비석이 발견된 것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임당유적 I지구의 최남부에 있는 배수로와 도로 추정 유구의 서쪽 끝 교란층이다. 배수로와 도로 추정 유구의 북단에 저습지가 바짝 접하여 평행하게 펼쳐져 있다. 저습지 권역 안에는 우물과 인공연못 등의 시설물과 적심석積心石 건물지가 위치하는데, 모두 저습지가 완전히 매립된 이후 그 위에 설치된 것들이다. 저습지는 본디 작은 개울로, 출토유물을 보았을 때 서기전 3세기 즈음부터 수변제사가 거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 서기 3세기부터 유물의 매립량이 대폭 증가하며 그 종류도 다양하지는데, 이는 개울이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저습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1] 임당유적 I지구 유구 분포도


적심석 건물은 땅을 굴착한 후 바닥에 돌을 깔아 지대를 단단하게 만든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방식으로 축조된 건물로, 단순히 땅 속에 박아 세운 굴립주掘立柱 건물과 비교했을 때 기둥이 들보와 지붕의 하중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4동의 독립된 건물이 冂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적심석 구조가 기와건물은 연상케 하므로 관청이나 대저택일 가능성이 상정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유구들은 서기 6세기 초엽에서 7세기 중엽까지를 중심연대로 하며, 이는 신라 지방에서 비석이 다량 발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유적 내 다른 유구들과 비석 간에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가 맺어지는지 논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석이 일종의 경관기념물Monument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비석의 입지가 무성의하게 선정되지는 않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즉 비석이 기념물의 일종으로서 가시적 · 관념적인 의미와 역할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입지라는 게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시노하라 히로카타가 비문의 중심내용으로 판독한 "論洹"과 비석의 입지를 종합해보면, 그 내용은 수리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림 2] 비석 출토 지점과 비석 관계 유구 분포도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경산을 중심으로 양옆에 위치한 도시 대구와 영천에 동시기 수리시설 보수사업 관련 비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최근 경산시 와촌면 소월리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아직 1차 판독만을 거친 이 목간은 현재까지 서기 6세기 중후엽 즈음으로 편년되는데, 이는 곧 앞서 언급한 세 비석과 대응된다. 이 세 자료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천 청제비〉는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130㎝, 너비 93.5㎝ 규격으로 역시 신라 중앙으로부터 관료가 파견되어 제방을 축조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에 기록된 병진년이 536년으로 생각되므로 서기 6세기 전엽~중엽 초의 사회상을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등장하는 〈得〉이 〈경산 임당동 신라비〉의 그것과 용례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어 비문 판독에 크게 기여했다. 다만 길이 단위로 생각되는 〈得〉에는 정작 그러한 의미가 없으므로, 시노하라 히로카타는 고대 중국에서 길이 단위로 사용했던 〈獸〉나 〈尋〉의 이체자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특히 〈尋〉의 경우 자형에 유사한 점이 있어 주목된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에서 발견된 〈대구 무술명 오작비〉는 신라 중앙에서 영동리촌으로 파견된 아찬급의 두 승려가 재지의 여러 촌에 소재한 유력자와 촌민들을 통원하여 제방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에 등장하는 재지민들은 다양한 외위를 갖고 있으며, 공사를 위해 대규모 인력이 인근의 여러 촌에서 동원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문에 기록된 무술년이 573년으로 상정되므로, 서기 6세기 중엽~후엽 초의 내용을 담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소월리에서 발견된 목간의 경우 토지와 세금 관련 문서로, 공문을 쓰기 전 예행으로 작성한 초고로 생각된다. 문서는 감말곡촌에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생겨난 추가 이익에 대하여 재분배를 실시하였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일종의 개발이익환수에 관련한 것이다. 시기는 판독자들에 의해 서기 6세기 중후엽으로 비정된 바, 〈대구 무술명 오작비〉와 상정되는 시기가 유사하다.


[그림 3] 금호강유역의 서기 6세기대 수리시설 개발사업 관련 기록자료


이 세 자료는 내용과 위치라는 측면에서 〈경산 임당동 신라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거듭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리시설 개발사업과 관계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금호강유역에 위치하면서 임당동 I지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 반경 20㎞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 분포해 있기 때문이다. 직선거리로 따졌을 때 〈영천 청제비〉와는 약 19.5㎞, 〈대구 무술명 오작비〉와는 약 14.6㎞, 소월리 목간과는 약 14.2㎞ 간격을 두고 있다. 이때 영천-경산-대구는 나열된 순서대로 서라벌에서 외부로 향하는 내륙 교통로가 지나는 곳이며, 특히 세 비석이 위치한 지점은 그중 당시의 거점으로 판단되는 지역이다. 아울러 〈영천 청제비〉건립 시점부터 〈대구 무술명 오작비〉건립 시점까지 약 40년이라는 시기차가 존재한다. 과연 이러한 위치관계가 〈경산 임당동 신라비〉의 시기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 시노하라 히로카타가 주목한 것은 세 비석의 길이 단위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영천 청제비〉와 〈경산 임당동 신라비〉는 〈得〉을 단위로 사용하며, 이는 〈尋〉과 같은 원시 단위와 연결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대구 무술명 오작비〉에는 “高五歩四尺”라 하여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보와 척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즉 서기 6세기 중후엽의 약 40년을 사이에 두고 단위체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삼국사기』의 법흥왕대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위 7년 즉 520년에 법흥왕은 “頒示律令”이라 하여 그 유명한 율령을 반포하는 모습이 확인되는데, 여기서 율령이란 국가 헌법에 가까운 성문법이었을 것이다. 서기 6세기 초중엽에 경주 외 지역에서 율령 관련 금석문이 다수 확인된다는 점을 보았을 때, 법흥왕의 율령은 신라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토록 강력하고 체계적인 법이라면 그 안에 통일된 도량형에 관련된 새로운 규정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가정을 갖고 〈영천 청제비〉와 〈대구 무술명 오작비〉를 보면 전통의 제동시점에 대한 정황 추정이 가능해진다. 즉 520년 율령반포 이후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도량형이 최소 16년간 더 사용되었고, 이것은 약 40년 사이 어느 시점에 점차 바뀌어 서기 6세기 후엽에는 완전히 새로운 도량형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선 위에서 〈경산 임당동 신라비〉의 위치는, 길이 단위가 득에서 보와 척으로 변하기 이전의 어느 시점이면서 서기 6세기 중엽 초에 건립된〈영천 청제비〉보다 늦거나 그와 같은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네 문자자료의 시간적 상대서열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영천 청제비(A) ≤ 경산 임당동 신라비(B) ≤ 경산 소월리 목간(C) ≤ 대구 무술명 오작비(D)(단, A와 B는 D와 같을 수 없다.)


비석과 목간의 제작이 위 도식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곧 이들이 담고 있는 내용 즉 수리시설 개발사업 역시 같은 궤를 같이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금호강유역에서는 영천을 시작으로 하여 크고 작은 수리시설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말인데, 여기에는 웬만하면 신라 중앙의 관료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 중앙의 개입으로 그러한 사업들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역사적 배경은 역시 『삼국사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 법흥왕 18년 3월조에는 “命有司修理隄防”라 하여 왕이 담당 관청에 제방 수리를 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즉 520년에 중앙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제방 수리사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이후 발생한 영천의 저수지 축조사업은 아마도 이 제방 수리사업과 연관 혹은 그것에 연계된 확장사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경산 소월리-경산 임당동-대구 대안동의 수리시설들은 영천의 저수지축조사업과 함께, 혹은 그와 동시에 보수나 개발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이상으로 〈경산 임당동 신라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정리한 것을 토대로 이야기하자면 서기 6세기에 신라 중앙의 주도로 시행된 수리사업은 금호강유역과 같이 서라벌 외부 지역에서도 실시되었고, 이것은 신라의 지방 장악 능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노하라 히로카타는 이 현상을 '지역 정치체들은 서기 4~5세기부터 경주를 상위로 한 정치적 결합을 형성하였고, 서기 6세기 전후가 되면 경주로부터 지방관 파견이 본격화되면서 그 독자성을 잃어가게 된다'고 설명한다. 서기 5세기 이후 밀려오는 신라화의 물결이 서기 6세기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하여 지방소국 하나를 금방 덮어버리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하여 곧바로 독자성을 잃어간다는 뉘앙스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할것이다. 다만 지방의 신라화라는 크고 오랜 조류 속에서 서기 6세기 중엽의 비석에 묘사되는 한 장면을 '당시 경산에 육부 출신 하급관료가 지방관으로서 지방 유력자들과 병립하는 상황'을 표상한다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임당유적 전도.png [그림 4] 임당언덕과 압독의 고총고분군(★은 비석 출토 지점)


기실 압량군 즉 압독의 물질문화는 서기 5세기 이후 신라 트렌드에 완전히 잠식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경산만의 토기양식과 암광목곽묘라는 독특한 묘제를 개발하여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논의되고 있는 바로 그 시점, 서기 6세기 중엽 되면 그런 압독의 물질문화에 또 하나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 시기 임당언덕에는 암광목곽묘로 변형돼 사라졌던 신라식 적석목곽묘가, 그것도 대릉원의 묘제와 아주 흡사한 형태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재등장한 적석목곽묘는 신라 중앙에서 중상위급에 맞먹는 것으로 보이며, 압독 재지세력의 최상위 고총과 병립한다. [그림 4]의 부적리고분군이 바로 그 '새로운' 신라고분군이며, 임당언덕의 묘제가 모두 소형 석실분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짧은 시간동안 서쪽의 조영동과 임당동고분군이라는 재지세력의 묘원과 공존하게 된다. 고고학적 해석의 틀 속에서 부적리고분군 조성 주체들은 조영동과 임당동고분군 조성 주체들의 하위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경위와 외위의 물적 권력 표상 방식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도 될지 알 수 없으므로 실상의 권력도 그와 같은지는 판단하기 어렵겠다. 어쨌든 이러한 고고학적 양상은 신라가 지방에 재지 수장층과 공존하는 형태로 재외관료를 배치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며, 이 비석에 대한 시노하라 히로카타의 해석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길가은, 2018, 「삼국시대 경산지역 적석목곽묘 연구」, 석사학위, 영남대학교.

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慶山 林堂洞 建物址遺蹟』.

篠原啓方, 2010, 「慶山林堂遺跡出土古碑の内容とその歴史的背景」, 『東アジア文化交渉研究』 3, 関西大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