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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May 06. 2020

韓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9

물질문화를 통해 본 辰과 韓 [肆]

라. 진의 성장과 배타적 권력의 확산: 서기전 3세기~서기전 2세기


앞서 언급했다시피 서기전 3세기가 되면 호서에서 호남으로 금속기 다량 부장묘가 확산되는데, 서기전 3세기 늦은 시기가 되면 부장품으로 이용되는 금속기 조합에 철기가 포함되기 시작한다. 이때 철기들은 연화보-세죽리문화나 연을 위시한 전국시대 중원의 물건과 유사한 것이지만, 그 종류와 수량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대개 주조로 제작된 부·착·사가 이전 시기 청동으로 제작된 동일한 기물을 대체하거나 동반하여 부장된다. 다만 안성 만정리유적과 같이 상당히 희소한 사례로 철촉이 확인되기도 한다. 같은 시기 청천강 이북에서는 생활유적에서도 다양다수한 철기들이 확인되는 것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양상인데, 이것은 이 시기 청천강 이남 즉 남성리-초포리유형권역 내에서 철기가 청동제 부장품을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금속기로만 인지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아직 실용기물로서는 소용을 인정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특징적인 유적으로 서남한에는 당진 소소리·부여 합송리·익산 평장리·장수 남양리·전주 원장동·완주 갈동유적 등이, 동남한에는 대구 월성동·팔달동·경산 임당동·조영동·경주 조양동·입실리·죽동리·울산 교동리 등이 꼽힌다.


서기전 3~2세기 서남한 분묘와 출토유물(상: 장수 남양리 4호묘, 좌: 서산 동문동유적, 우: 당진 소소리유적)
대동군 상리 목곽묘 출토 금속기 조합


서기전 4세기에 금속기 다량 부장묘가 등장한 이후 외래한 금속기 부장문화가 남성리-초포리유형권에서 확산됨에 따라, 신문화가 토착 매장문화와 접변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앞서 남한의 청동기시대 토착 권력자의 분묘 즉 의타적 권력자의 분묘로 석검이나 동검을 소수 부장한 지석묘를 꼽은 바 있는데, 이때 확인되는 부장품 조합이 점토대토기조합과 세형동검 등으로 변하기 시작하며, 나아가 묘제도 목관묘로 추정되는 토광묘로 바뀌기 시작한다. 익산 오룡리 3-1·5-1호묘, 익산 구평리 Ⅳ-1·2·4호묘 등은 목관묘이며 홍도장경호와 홍도옹을 대신하여 흑도장경호와 점토대옹이, 마제석검을 대신하여 세형동검이 부장되었다. 마제석촉 3~5점은 전통과 똑같다. 물론 기왕의 조합이 재질만 바뀌면서 그대로 유지되기만 하는 것은 아닌데, 동제나 철제 공구가 소수 부장되는 경우도 확인된다. 이런 경향의 분묘는 영남에도 아주 극소수로 발견되는데, 김천 문당동의 목관묘가 그것이다. 김천은 추풍령을 통해 호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점에서 무언가 떠올릴 만한 여지가 있다. 인근의 상주 낙동리에서 다량의 청동기가 등장했다는 점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의타적 권력자의 분묘(상: 대구 대천동 511-2번지 11·12호묘, 하: 익산 오룡리 3-1·5-1호묘)


이 시기의 사회계층을 연구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분묘들을 금속기 다량 부장묘와 한 종류로 묶어 그것들의 하위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금속기 부장묘 조성 주체들이 극소수의 금속기 다량 부장묘 조성 주체를 위시하여 광역의 지역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고 봐야한다. 게다가 '하위묘'의 부장품 조합을 보았을 때 배타적 권력자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배타적 권력자가 지배하는 사회와 의타적 권력자가 대표하는는 사회가 일률적인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위집단의 권력자가 상위집단의 권력자로부터 지배권을 인정 받고 권세를 빌려 관할지를 관리했다고 봐야하는데, 과연 그런 체계가 있었을까? 물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 사회망이 중심지를 위시한 위세품 사여나 분배를 실현할 만큼 체계적이고 강력한 계층분화를 이루어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재고의 여지를 두고 있다. 반대로 금속기 부장묘 조성 주체들이 저마다 개별적인 스타일로 독립된 점지배를 이루었다면, 굳이 분묘의 부장품 조합을 가지고 일률적인 계층분화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견으로는 배타적 권력자의 사회와 의타적 권력자의 사회가 섞여 분포했을 것으로 본다.


傳 상주 낙동리 청동기 조합


서기전 2세기에 돌입하면 원형점토대토기는 사천 늑도유적을 위시하여 삼각형점토대토기로 일약 변화한다. 이와 함께 금속기 부장묘가 영남을 향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다만 울산 교동리 1호묘나 상주 낙동리(추정), 경주 입실리·죽동리 출토 청동기 조합 등 몇몇 흔적을 제외하고는 배타적 권력자를 상정할 만한 유존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중 울산 교동리 1호묘는 이 시기 배타적 권력자의 온전한 분묘 형태를 보존한 유일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는데, 여기서 확인되는 부장 양상은 남성리-초포리유형의 전형적인 모습과 상이하다. 일단 시신의 머리를 천으로 감싼 후 턱 아래에서 구슬로 묶은 점은 중원에서 확인되는 시신 복안법이다. 아울러 단조철부와 환두도 역시 그간 남성리-초포리유형권에서는 확인된 적 없던 기물이다. 먼저 발견된 경주 입실리와 죽동리유적에서 관부에 뾰족한刺狀 돌기가 부착된 동모가 확인된 바 있는데, 울산 교동리 1호묘에서도 출토하였다. 동모의 자상돌기는 자루의 문양과 함께 서남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이므로 이 역시 돌출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울산 교동리 1호묘만 보면 철기 부장량이 급격히 증가하며 개중에는 모와 도 등 철제 무기도 포함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울산 교동리 1호묘와 출토 유물


이러한 경향은 서기전 2세기 후엽에 금호강유역이나 창원 다호리 등지에서 확인되는 삼각형점토대토기단계 금속기 부장묘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 간의 직접적 관계를 알 수는 없으나 어찌되었든 서기전 2세기 이후 영남지방을 둘러싼 새로운 분위기가 있다는 점은 읽어낼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서기전 1세기 이후 철기 부장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대규모 분묘군집의 등장으로 이어지는데,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확인되는 지역 역시 앞서 언급된 금호강-형산강-남천 라인과 낙동강 하류-밀양강 라인이다. 철기 다량 부장묘 군집의 출현은 그 시점 때문에 이제껏 조선 멸망 및 낙랑 설치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그 기미가 조선과 한 사이의 전쟁(이하 조한전쟁) 이전부터 영남이나 완주를 비롯한 남한지방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굳이 그 동력을 제공한 존재로 한과 한군현을 주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낙랑이 철과 관련하여 진한과 변진의 분화가 유발된 데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점은 고고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뒤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서기전 1세기 동남한의 주요 하천(금호강-형산강-남천/낙동강 하류-밀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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