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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긴믈 Feb 29. 2020

韓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8

물질문화를 통해 본 辰과 韓 [參]

다. 진의 성립과 배타적 권력의 등장: 서기전 4~3세기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금속기 다량 부장묘는 앞서 언급했듯 서기전 4세기~3세기 중엽에 등장하며 모두 호서지방에서 확인된다. 대전 괴정동 · 예산 동서리 · 아산 남성리유적이 가장 대표적이며, 이밖에 보령 관창리 · 아산 백암리 · 청원 비하리 등의 유적이 있다. 이 유적들이 형성되는 시점을 남한 철기시대의 시작점으로 설정했을 때, 유적 내 분묘의 부장품들은 이전 동기시대의 습속과 새로운 부장 습속이 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기전 3세기에 들어서면 이 새로운 권력자들의 공간은 호남으로 확대된다.


일단 지표유적으로 선정한 세 유적이 모두 석관묘인데, 이는 지석묘의 하부시설이자 동기시대의 또 다른 묘제이다. 물론 그 내부에서 목질흔이 확인되기 때문에 나무로 묘 구덩이의 뚜껑이나 관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석관묘들은 기실 돌을 둘러 공간을 만든 후 목관을 안치한 적석목관묘 혹은 위석목관묘가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초기목관묘 역시 석관묘로부터 뻗어나온 묘제임에는 분명하다. 아울러 시신 옆에 단검을 배치하는 점이나 천하석Amazonite으로 옥제 장신구를 제작하였다는 점, 다수의 삼각형 무경식 석촉이 부장된다는 점, 두세점 내외 정도 되는 소수의 토기가 분묘 단벽에 배치되었다는 점 등에서 동기시대의 부장습속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단검은 세형동검, 토기는 원형점토대토기 조합 양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부장 방식과 부장 물건에서 신구 습속이 섞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전 괴정동 석관묘와 출토 유물
예산 동서리 석관묘 출토 유물
아산 남성리 석관묘와 출토 유물


남한의 철기시대 최고급 분묘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생각되는 대전 괴정동 석관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예산 동서리와 아산 남성리의 석관묘는 그것과 비교되어 동이성同異性을 띠는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일단 천하석제 곡옥이나 관옥, 삼각형 무경식 석촉 등 동기시대 혹은 그와 관계된 기물들이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석관 혹은 적석목관묘제를 사용하고 토기를 발치 혹은 머리맡에 소수 부장한다는 점이 그와 같다. 물론 이때 토기는 철기시대에 새로 유입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이다. 그리고 동제 단검과 거울을 주요 기물로써 부장했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 다만 대전 괴정동 석관묘에서는 단 한 점만 부장되었던 세형동검이 예산 동서리와 아산 남성리 석관묘에서는 9점이나 확인되었다는 점은 상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검 단수부장이 표준이었던 동시기대의 부장습속에서 점차 벗어나는 과정을 시사한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동제 의기를 다량 부장했다는 점이다. 거울을 닮았으며 거울의 대체재나 보완재로 여겨지는 원개형동기나 말의 정수리 갈기를 그러모아 장식하는 나팔형동기는 단검-거울조합과 함께 요령으로부터 전파된 문화요소이다. 또한 3점이 한 세트로 부장되는 검파형동기, 출토품마다 형태가 다른 방패형동기는 Made in Korea로 판단되는데, 작이나 시문 과정이 복잡하고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므로 단검-거울과 함께 이 시기 이 지역에서 특별히 사용되었던 제의용 기구의 일종이 아닐까 짐작한다. 한반도에서 창안된 디자인으로 생각되므로 그 조형祖形을 찾기가 어려운데, 암각화의 기하문이 금속을 통해 실물로 구현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검파형동기는 말 그대로 검파劍把 즉 검 손잡이를 닮았다고 명명된 것인데, 대나무 줄기의 형상을 띤 검 손잡이는 남한의 철기시대 단검의 것과 유사하다.


방패형동기와 검파형동기의 조형 비교


서기전 4세기를 기점으로 한반도에 불어닥친 동기 열풍은 서기전 3세기가 되면서 매우 활발해진다. 요령의 다뉴조문경은 이 시기에 호서·호남인의 손을 거쳐 비로소 다뉴세문경이라는 걸작으로 변모하게 되며, 팔주령·간두령·쌍두령 등 섬세한 문양을 가진 다양한 형태의 방울이 등장한다. 서기전 4~3세기에 이렇듯 동제 의기들이 다종다량하게 등장하는 현상은 당시 권력자들이 권력의 세 기반 중 이념Ideology즉 신앙이나 신성성 등을 더 강조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동검 부장량이 급증하기는 했으나 단검은 무기로서 무력기반을 상징하기보다는 제기로서 이념기반을 상징할 것이라는 쪽으로 개인적 견해가 기운다. 무력기반의 상징물은 단검을 제외하고 서기전 3세기부터 등장하는 투겁창이나 꺾창 혹은 서기 2세기 즈음에나 등장하는 장검·대도 등과 같은 병기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 시기 권력자들은 중원과의 원거리 무역도 수행하게 되는데, 이때 획득한 중원식동검은 권력자의 외교력을 과시하는 경제기반의 상징물로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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