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12.02. / ○ 2023.01.01. / ★ 수
사 Happening
# 새해맞이
# 오전 연구모임
# 집 정리와 분갈이
# 일기 쓰기 재다짐
견 Thinking
새해 첫날이다. 의미 있는 시간의 획기는 대개 음력 위주로 세어야 한다는 고집이 있는 터라 각별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보신각의 종이 울리는 시간에는 의식이 있는 채로 보내야겠다 싶어서 자정을 넘길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 마시니 정신이 또렷하다. 얼마 전에 온라인으로 산 W제빵집의 통밀빵을 다식으로 곁들였다. 마침 본가에서 생강과 대추를 갈아 청을 만들어 준 것이 있어 잼처럼 발라 먹어 보았다. 맛은 없다. 새해 첫 음식이 그 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민간의 소소한 믿음이 떠오른다. 오래 그리 재미는 없겠지만 건강하고 알차긴 하려나. 그도 그럴 것이, 올해는 공연 관람을 좀 줄이고 건강과 저축과 연구에 몰두해보자 다짐했으므로 퍽 어울리는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새벽, 늦은 잠을 청한다. 10시에 강·이 두 학형과 연구모임을 갖기로 했으므로 9시쯤 일어나 집과 몸을 정리한다.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이 연구모임은 전공 기초 서적 독서를 마치고 드디어 개인 연구로 돌입했다. 오늘이 그 첫날이다. 10시를 조금 넘겨 강이 도착했고, 아직 이는 오지 않았다. 이를 기다리며 고구마(방금 내 손에서 고구려라는 단어가 자동 완성되었다. 습관은 무섭다.)와 파파얌을 찌고 차를 내렸다. 막간의 여유를 즐기며 다과를 먹는 새 이가 커피 세 잔을 사 들고 부랴부랴 들어온다. 아침에 일어난 뒤 다시 잠들어버렸다나. 오늘 모임의 내용은 강과 이의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위한 밑 작업이다. 연구 문제, 배경, 목적, 대상,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연구계획서를 작성해오라 했는데 준비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12시쯤 마쳤다.
강과 이를 보냈다. 적막이 세를 부린다. 얼마 전 강이 고향에 다녀올 일이 있어 동거묘 Y씨를 잠시 맡았는데, 이번에 다시 데려가서 고요함이 더한 듯하다. 우리 집 동거묘 B씨와 한동안 파닥거리느라 꽤 부산스러웠거든. 다시 조용해진 집 안을 찬찬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별다를 건 없고, 빨래를 돌리고 유리병에 심었던 난초 몇 촉을 달항아리에 옮겨 심었다. 다이소의 달항아리는 수경재배용 화분으로 쓰기에 참 알맞다. 규격, 색채, 문양이 다양하고 가격도 매우 좋다. 기성품일 것이 분명하지만, 자기 특유의 유약 뭉침이나 흐름 같은 흔적이 있어 마치 수공예품 같아 보이기도 한다. 동거묘 B씨가 길쭉한 잎이라면 사족을 못쓰기에(사족보행인데 사족을 못 쓰다니 깔깔.) 일단 잎이 넓은 호접란과 나도풍란을 옮겨 실내로 들였다. 얼마 전 데려온 온시디움 판타지아는 B씨가 환장하는 그 잎이라 밖에 두고 있었으나, 꽃과 향을 외면할 수 없어 분갈이한 후 침실에 두었다. B씨가 접근할 수 없도록 화분과 장식들로 진을 쳤는데, 마치 지휘관이 전법을 연구하듯 이리저리 옮겨가며 이 집요한 검정고양이의 반응을 살폈다. 결과는 성공.
매번 새해로 넘어갈 때마다 하는 일이지만, 다시 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물론 일기 '쓰기'도 일이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성실하게 하는 것은 '다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다 뭐 또 실패하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넘어지고 또 다시 일어나는 게 삶을 살아내는 과정이구나 싶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난 해의 다짐과 계획보다 더 나아야 하므로 일기의 형식을 만들어보았다. 사견정체, HTF 서술법. 뭐 이름은 대충 그렇다. 말하자면 하루에 일어난 사건(Happening)과 그에 대한 의견(Thinking), 그리고 오늘 하루와 앞의 사건에 대한 정서(Feeling)를 따로 분리해서 서술해보자는 것이다. 살아간 하루가 늘어가면서 과거의 기억이 뒤죽박죽 떠오를 때도 많아졌다. 사실과 소견과 감상이 뒤엉키면 그저 한 덩어리의 막연한 기억일 뿐, 이로부터는 제대로 된 반성이나 교훈을 얻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혹은 어제나 그제의 가까운 과거를 공들여 반추해보고 여기에서 이성과 감성의 얽힌 타래를 갈라내다 보면, 그것으로 선비의 밤을 흉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러나 상상한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이 소견이고 무엇이 감상인지 명확하지 않은 지점이 많다. 그래도 최대한 해봐야지.
정 Feeling
작년부터였을까, 새해 첫날이 주는 기대감이나 설렘, 혹은 비육지탄 같은 여러 감정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이. 올해는 거의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냥 인간으로서, 한 해를 넘기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약식으로나마 지키기 위해 잠을 미루었을 뿐이다. 그래도 아직 설이 멀었다는 생각이 강하기도 하고, 진정한 새해는 다가오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그렇게 나는 송구영신을 미룰 생각인가보다. 갑진년에 어떤 미련이 남았을까. 진짜 단어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2024년, 특히 하반기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참 많은 일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무난했다고 생각하나 사회적으로는, 계엄이라니. 탄핵이라니. 참사라니. 해 넘어가는 시기에 역사적인 사건이 잇달아 정신이 없다. 앞으로 남은 올해의 날들은 제발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
후배 학형들의 석사 논문을 자발적으로 지도하게 된 것이 이제 6년쯤 되었나. 작년부터는 여러 이유로 그 규모를 확 줄였는데, 그래도 그 끈은 놓지 않으려 한다. 다양한 주제를 보게 되면서 거저 공부한다는 생각도 있고, 나에 대한 담금질이기도 하고. 그러나 나에 대한 실망, 여력 부족, 성원들의 태도에 대한 실망, 아니꼽게 보는 외부 시선 등 여러 부담을 견디기 어려워졌다. 아쉬운 점이 많지만 전과 같이 확대하고 공개적으로 설칠 생각은 없다. 두 학형과의 연구모임에 목표가 있다면, 이 둘이 올해 안에 석사 논문의 틀을 갖추고 진도를 꽤 빼기를 바란다. 타지에서 주경야독하느라 모임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다른 두 학형 역시도 올해 기대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기를.
타인에 대한 기대는 그러하고, 스스로의 목표라면 좀 덜 예민하고 좀 덜 흥분하고 좀 덜 욱하고 좀 더 숨기고 좀 더 다듬고 좀 더 절제하기. 근래에 와서야 내가 그러한 성정임을 인정하고 직면하게 되었다. 내 안의 바다에는 폭풍이 잦다. 전야가 좀 더 길 뿐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메타인지가 성장한 것인지, 내가 마치 얼음 가시 고슴도치같이 느껴진다. 거의 10년간 나를 옥죄던 문제들을 외면하기 바빴다. 그 결과는 사실 이 사적인 글에서도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많이 처참하다. 결과가 그러하니 그 원인을 바로보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원인을 보려면 결과부터 목도해야 하니까. 언제부턴가 거울을 1초 이상 직면할 수 없었다. 보게 되면 흐린 눈으로 스치듯 시선을 옮겼다. 그래, 나는 자기혐오와 우울에 빠져 있었다. 아마 2020년 이후로 마음이 차츰 나아져 갔던 것 같고 최근에는 그 양화가 피부에 와닿을 정도이긴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 근원은 그대로이다. 이제는 내 표면의 늪을 직면하여 걷어내고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바닥을 더듬을 '각오를 할 수는 있게 된' 용기랄까, 정신력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뭔가 변해야겠다는 다짐이 마음 깊숙이 자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뭔가 달라질 것 같다. 진짜로 뭔가 그런 느낌이 온다.
내 안의 예민함을 다스릴 수 있게, 그리고 내 안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일단은 운동을 시작해 체력을 길러야 한다. 다정은 체력이다. 부디,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안에 박아 넣은 고드름 떼가 더 이상 남을 찌르지 않도록. 그것이 녹아 없어지진 않더라도. 이번 모임에서도 자제력을 살짝 잃었던 것이 마음에 이렇게나 큰 동심원을 남겼을 줄이야. 와다다다 두들겨놓고 놀라는 중이다.